외국희곡

고선웅 재창작 '칼리굴라 1237호'

clint 2025. 5. 20. 15:15

 

 

방역회사에 다녔던 주인공은 사회생활에 적응을 하지 못하고 자신의 내부에 
존재하는 자유의지와 욕망에 솔직해지려 노력한다. 그러던 중 깔리랜드라는 
테마파크에서 실행하는 깔리굴라 프로그램에 1237번째로 지원한다. 깔리랜드는 
인간의 욕망을 자극하고 혼자만의 절대적 유희를 추구하는 테마파크이다. 
지원자에게 100분 동안 자신이 원하는 막강한 권력을 마음대로 휘두를 수 있는 

권한이 부여되고 그의 상대역할들은 그에게 복종하거나 저항하거나 

사랑할 수 있도록 프로그래밍 되어있다. 

주인공은 파멸이 아닌 자멸을 감행하기 위해 이 프로그램에 지원하게 된다. 

깔리리굴라 1237호는 황제로 즉위하자 곧바로 서브들의 수면시간을 제한하며 

지금까지 그들이 누렸던 모든 권한을 축소하고 사유재산을 국유화한다.
그는 자신이 사회생활에서 겪었던 모든 정신적인 방황과 억제된 욕망을 
게임을 통해 마음껏 풀어헤친다. 그는 모든 논리를 거부하고 오로지 본능에 

의해서만 살아가기로 한다. 그는 자신의 연인 역인 까에조니아에게 고통을 준다.
까에조니아는 깔리굴라의 정신분열을 감당하지 못하지만 그녀의 몸은 
이미 깔리굴라를 사랑할 수밖에 없게 프로그래밍 되어있다.
서브들의 반란 음모가 현실화 될 때 즈음 깔리굴라의 고뇌와 번민은 더욱
극심해지며 심각한 자아분열 상태에 이르게 된다. 
결국 깔리굴라는 절대권력을 휘두르는 최고의 절정에서 결국 스스로의 

혀를 자르고 까에조니아의 앞에서 최후를 맞이하게 된다.

 

 

 

칼리굴라가 너무나도 사랑하던 누이동생 드리쥬라가 죽자 인간은 죽고 그래서 행복하지 못하다는 부조리를 발견하고 자신의 삶에선 아무런 어떤 의미도 찾지 못하고 미치광이 폭군으로 변하게 된다. 하지만 '칼리굴라 1237'에서는 방역회사를 다니던 주인공이 회사에서 쫓겨나서는 칼리랜드의 테마파크에서 자신의 욕망과 본성을 표출하며 이를 감당하지 못하고 자멸한다는 내용인데 사실 인과관계가 원작에 비해서 떨어지는 것 같다. 고대 로마 제국의 3대 황제 칼리굴라는 엽기적인 폭군의 대명사로 후대에 알려진 인물이다. 이 광포한 군주를 통해 부조리한 세상의 한 단면을 제시한 이가 프랑스의 소설가이자 극작가인 알베르 카뮈다. 그는 희곡 '칼리굴라'(1945)에서 부조리한 인간의 조건에서 벗어나 자유를 얻는 일의 어려움을 보여준다.

 

 

 

재창작한 '칼리굴라 1237'에서칼리굴라를 이름 그대로 주인공으로 내세우는 한편, 위에서 말한 주제의식을 닮으려는 기미가 역력하다. 한마디로 카뮈의 정신적인 적자(嫡子)를 자처한다고선웅 작·박근형 연출의 이 작품에서 칼리굴라는 소시민이다. 바퀴벌레를 잡는 게 큰일인 방역회사의 직원이다. 그의 처치 대상인 바퀴벌레는 제법 상징적인 의미로 다가온다. 우리는 흔히 쓰레기 같은 인간을 바퀴벌레로 묘사하곤 하는데, 이 주인공이 사회에서 치우고 싶어 하는 것도 기실 '잡아도, 잡아도 다시 기승을 부리는' 바퀴벌레(쓰레기 같은 인간)인 것이다결국 칼리굴라는 자신의 잣대로 보기에 합리성이 결여된 부조리한 세상과 결별을 결심하고 '칼리랜드' 라는 테마파크에서 실행하는 '칼리굴라 프로그램' 1237번째로 지원한다. 자신의 전 재산을 털어 지원한 이 세상(마치 사이버 공간 같은)에서 칼리굴라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한다. 인민들의 수면시간을 제한하고 사유재산을 국유화하는 등의 조치를 취한다. 오로지 본능만이 법인 세상에서 모처럼 해방감을 느끼지만 그게 곧 구속의 부메랑이 돼서 돌아올 줄이야.

 

 

 

까뮈의 <칼리굴라> - 부조리에 대한 반항
까뮈의 <칼리굴라>는 수에토니우스(Suetonius)의 「12황제의 생애」 에서 모티브를 얻어 집필한 것이다. <칼리굴라>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인물들은 실존했던 인물들이며 깔리굴라 황제의 광기나 그의 말과 행동 중 많은 부분이 실제로 있었던 사실로부터 기인한다. 그러나 이 작품을 마치 한 미치광이 황제와 그의 잔인함을 그리는 것으로 착각해서는 안 된다. 깔리굴라는 단지 절대성에 대한 강박관념에 휩싸여 부조리한 세상에 정면으로 대항하고자 하는 인물일 뿐이다. 그래서 혹자는 <시지프 신화>의 내용을 희곡화시킨 작품이라고도 한다. 
깔리굴라는 두르실라의 죽음을 통하여 이 세계가 결코 인간에게 호의적인 것이 아니며, 이러한 세계에 지배되고 있는 인간은 절대 행복해질 수 없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된다. 여기서 나와 세계와의 단절이 시작된다. 세계가 부조리하다는 진실에 직면한 채 절망에 빠진 깔리굴라는 세상의 모든 의미와 가치를 부정한다. 이전까지 그에게 소중했던 우정도, 사랑도 그 의미를 잃어버린다. 타인들과의 단절이 시작되는 것이다. 스키피오는 깔리굴라와 아름다운 우정을 나누던 시인이었다. 그러나 폭군으로 변한 깔리굴라는 많은 살인을 저지름과 동시에 스키피오의 아버지도 잔혹하게 살해해 버린다. 아버지에 대한 복수심에 불탄 스키피오는 다른 귀족들과 더불어 깔리굴라의 살해모의에 가담하지만 깔리굴라와 자신 사이에 흐르는 정신적 교감을 부정할 수 없어 깔리굴라를 떠나버린다. 칼리굴라는 자신에게 순수한 사랑을 바쳤던 에조니아마저 살해하기에 이른다. 그가 생각하기에 신들이 결정하는 인간의 죽음이란 애초에 납득할 수가 없는 것이기에 그가 행하는 살인은 이런 죽음의 부조리함에 대한 철저한 항거로 볼 수 있다. 
칼리굴라의 의도는 부조리한 세계를 완전히 파괴시켜 새로운 세상과 행복을 찾으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세계를 변화시키기 전에 행복을 누리기 전에 그에게 돌아온 것은 그 자신의 파괴였다. 그는 신이 아니었기에 그의 무자비한 살인 행위로 고통받던 사람들은 결국 인간신들이 되어 깔리굴라에게 그가 했던 것과 똑같이 죽음의 일격을 가했다. 음모자들의 칼이 날아왔을 때 깔리굴라는 끝까지 깨어있는 의식을 놓치지 않으려 애쓰면서 '나는 아직 살아있다'는 외침과 함께 쓰러져간다. 비록 '정의'가 아닌 '불의'를 선택했기에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지만 이것이 뭐가 추구하고자 하는 부조리한 세계에 대해 반항하는 인간상이었던 것이다. 

 

까뮈의 <칼리굴라> 공연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