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희곡

셰익스피어 김상열 번안 각색 '실수연발'

clint 2024. 9. 1. 10:12

 

 

<실수연발> (이근삼 역, 김상열 번안 각색, 이승규 연출, 1971.5.6~9, 국립극장에서 극단 가교가 공연)

신라의 상인 안지온은 상해로 가게 된다. 
그곳에서 두 쌍둥이 아들을 낳고, 버려진 말뚝이 쌍둥이 형제를 데려다가 
하인으로 부린다. 이들이 신라로 귀항 하던 중 풍랑을 만나 이산가족이 된다. 
아버지는 작은 아들(안후달)과 작은 말뚝이와 함께 구조되고, 
어머니는 큰 아들(안선달)과 큰 말뚝이와 함께 구조된다. 
이들 두 형제가 서로를 찾아 헤맨다. 
무대는 백제의 기벌포, 여기서 일어나는 것은 제목 그대로 주인 쌍둥이들과 
하인 쌍둥이들로 해서 일어나는 요지경의 대소동 속에서 이산가족이 
재회하는 로망스다. 

"언어, 습관, 의상의 엄격한 고증은 무시됐지만 우리말의 리듬과 색깔을 잘 살려 

관객의 귀에 거침없는 즐거움을 전달할 수 있었다.” 

이러한 열매는 “광대(윤문식)와 두 말뚝이(박경현, 기운희), 대사와 연기가 

함께 빛을 내고 있다."는 구히서의 평이 있었다.

 


김상열 번안·각색의 글 - 한국의 삼국시대로 번안한 이유

번역극이 시작된 이래 번역극에서는 언어가 상실됐다. 단지 주제와 문장만이 무대 위에서 오고간다. 참으로 묘한 일인 것이 이 땅에선 한번도 들어보지 못한 혀를 괴상하게 굴리고 의미를 서구식으로 올려붙이는 번역극식 버릇이 생긴 것이다. 국적불명의 이 언어는 어떤 이유에서 번역극에 끼어들었는지 알 수 없으나, 아직도 우리의 무대에서 열심히들 지껄이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 식의 언어가 있고 부담없이 상호교류할 수 있는 우리의 고유 발성법이 있다. 그리고 아무도 우리의 언어를 미개하거나 부끄럽게 생각치 않는다. 우리는 진정으로 구성지고, 푸짐하고, 익살스럽고 아름다운 우리말을 사랑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번역극이 막이 오르면 배우들은 목청과 혀를 서구식으로 축소 또는 확대시켜 발성하여 소속을 알 수 없는 Internation의 소리를 내지른다. 더욱 애처로운 것은 연극을 수업하는 사람이나 대학에서 공부하는 학생들은 이 무소속의 발성을 습득하는데 많은 정력과 시간을 소비하고 있다. 이 번역극식 발성이 철저하게 잘 훈련됐을 때 숙련된 연기자로 자부하고 또 인정해주고 있다. 
  번역극의 토착화와 한국화의 문제가 갑자기 대두된 것은 아니나 근래에 더욱 절실히 요구되고 있으며 창작극의 발굴문제와 거의 같은 비중으로 중요시되고 있는 것이다. 물론 번역극의 토착화에 있어서 큰 문제들이 따르게 된다. 이 땅에선 별로 생각하고 따져 보지 않았던 서구의 관념적인 사상과 또 그들이 늘 내세우는 제임스 조이스나, 프로스트 류의 의식의 흐름 따위가 우리의 언어와 문장으로 어떻게 변형될 수 있으며 우리 관객의 사고에 어떤 방법으로 영합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예를 들어 같은 미국의 작가로서 유진 오닐과 테네시 윌리암스를 비교한다면 오닐의 작품은 토착화의 가능성이 엿보이지만 테네시 윌리암스의 작품은 거의 불가능하게 생각된다. 주제가 그것은 두 사람이 다루는 주제의 성격에서 가늠할 수 있게 된다. 향토식 자체가 되거나 인간의식의 문제나 실존의 문제가 그 바탕이 되면 번역극의 토착화가 난처해 지지만 그러나 염려할 게 없는 것이 수많은 영원한 고전, 즉 희랍비극에서부터 세익스피어, 괴테, 입센이후의 주옥같은 사실주의 연극들은 얼마든지 우리의 옷을 입혀 우리의 언어로 우리의 관객에게 보여줄 수 있다. 세계가 공유하는 보편적 진실과 국경과 언어를 초월하는 자연과 인간의 영원한 주제를 다룬 이 고전들은 우리의 것으로 언제든지 순조롭게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다.  이제 그 작은 모험이 시작된다. 실험에는 모험이 따르게 마련이다. 다행히 "실수연발"은 Plot과 언어의 연극이다. 셰익스피어 특유의 사건전개와 언어구사가 일품이다. 
국문학의 르네상스인 이조 正祖時代 (1700년)로 옮겨볼까 했으나 원작과의 시대적 또 지역적 시추에이션이 맞지 않아 삼국시대의 백제땅으로 옮겼다. 원작에서 요구하는 네 나라 (고구려, 신라, 백제, 당)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연대는 신라와 백제의 양국관계가 최악의 연대인 600년대며 백제는 무왕, 신라는 진평왕, 고구려는 영유왕대다. 물론 장소는 백제의 기벌포(지금의 장항)로 잡았다. 다행인 것은 사회제도나 남녀관계, 문화생활 등이 이조때보다 훨씬 자유롭고 풍성했기 때문에 원작에서 전개되는 인물들의 자 유방종한 행동과 언어들이 어느정도 맞아들어 갔으나, 무려 1400년전의 풍습과 언어를 자세히 파악할 길이 없어 (더욱 백제의 문헌과 역사기록은 전부 소각돼 삼국중 가장 미흡함) 우리 귀나 입에 익어온 이조시대의 여러 것들이 부득이 섞이게 됐다. 물론 이 작업의 결과 여부는 계속 숙제로 남게 된다. 단지 번역극과 공연의 고질적 방법에서 탈피하여 관객들이 우리의 것으로 받아들여 좀더 무대를 향해 자연스레 접근할 수 있다면 그이상 바랄 것이 없겠다.

 

 

 

1971년에 가장 큰 주목을 끌었던 작품은 이승규 연출로 국립극장 무대에 올랐던 <실수연발>이었다. 이 공연은 “우리나라 신극 60년사에 전환점을 찍었으며, 그간 번역극을 좋아하는 연극계를 반성시키는 공연이었다”(<동아일보> 공연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