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담을 비롯한 세상을 창조한 하나님은 외로워하는 아담을 위해 아담의
갈비뼈를 취해 이브를 창조한다. 라파엘이나 미카엘과는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는
천사 루시퍼는 하나님이 하신 일들에 대해 불만을 토로하다
선과 악이 분리되면서 지옥으로 떨어져 악마가 되고 만다.
뱀으로 분한 루시퍼는 이브에게 하나님이 금지시킨 선악과를 따먹게 하고
또 아담도 이 죄를 저지르도록 유혹하는 데 성공한다.
선악과를 먹고 눈이 밝아진 아담과 이브는 자신들의 벗은 모습에 부끄러움을 느끼고
하나님을 두려워 피하려 한다.
하나님은 이들에게 저주를 내려 에덴 동산에서 내쫓고 만다.
아담의 아이를 가진 이브는 자신이 임신을 했다는 사실조차 모른다.
한편 하나님은 자신의 뜻하지 않은 인간의 번식에 우려를 나타낸다.
루시퍼는 여지없이 이브를 찾아가 사실을 말해주고 그녀를 자기 편으로 이끌려 하고,
잉태의 고통에 시달리는 이브는 하나님을 저주하고 루시퍼의 말을 믿게 된다.
아담은 아이의 이름을 카인이라고 짓고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한다.
하나님의 뜻에 따라 인간에게 죽음의 맛을 보게 하기 위해 죽음의 천사 아즈라엘이
지상으로 내려간다. 루시퍼는 이브와 대화를 나누다가 살인의 꿈을 꾼 아담이 놀라
이브에게 하는 얘기에 끼어든다. 하나님과 이브의 아우 아벨에 대한 편애와
자신의 직업에 불만을 가진 카인은 아벨을 증오하기 시작한다.
한 해 추수를 마치고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기 위해 일 년간 지은 농산물과
양을 올려 놓는 카인과 아벨. 아벨의 제물만 받고 카인의 제물은 여전히 제단에 있자
카인은 분을 참지 못하고 아벨을 도리깨로 쳐 죽이고 만다.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카인은 하나님에게 표를 받은 후 내쫓기게 되고
이브는 자비를 구하는 기도를 올린다.
인류는 태초부터 현재까지 어떻게 변천해 왔으며, 이 작품에서도 아담과 이브의 원죄를 어떻게 끌고 갔느냐가 또한 핵심이었던 것같다. 도입부에서 하나님은 신의 모습과 그대로의 아담을 만들어 놓은 그 피조물 아담으로 하여금 神의 말에 응답할 수 있는 자유를 주어 하나님과 아담은 정답게 웃어 가며 대화를 주고받는다. 동식물이나 온갖 사물 등 하나님의 피조물에 대한 이름을 아담에게 짓게 하고 그렇게 재미있게 얘기하는 아담에게는 독자적 지위를 주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하나님과 아담의 사이는 『그대와 나와의 관계』에서 자신과 상수할 수 있는 존재를 창조한 것이다. 그러한 위치에 있는 아담은 神의 창조물로서 가장 理想的이며 자유로운 存在였다. 이 점으로 보아도 하나님과 똑같은 像으로 만들어진 인류의 시조인 아담은 최초에 아무런 죄 없는 존재이고 결코 죄악은 인류에 있어 본질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을 충분히 엿볼 수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모든 인간은 原罪 속에 있다는 근본적인 사실을 설명하기 위해 아담의 추락이야기가 나온다. 성서에도 있듯이 아담이 루시퍼(뱀)의, 즉 「神과 같이 선악을 알게 된다」는 유혹에 의해, 神의 말을 배반하고, 최초의 죄를 범한 원인으로 죽음의 공포와 살기 위한 고통으로 몸부림 치게 된 원죄, 번식, 인간의 生死 등 인간의 비극이 시작된다는 창세기의 기록에 충실하게 이야기는 진행된다.
神으로부터 추방되어 나가는 人間은 神을 중심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자기중심의 世界에 몰두하게 된다. 이브는 임산의 고통을 맛보게 되고, 이브의 몸에서 카인이 태어나고, 또 아벨이 태어난다. 농사일하던 카인은 하나님과 부모의 아벨에 대한 편애에 반감을 갖고 아우 아벨에게 도리깨질을 함으로써 아벨을 죽이게 된다. 결국 아담, 이브의 용서를 받지 못한 채 그들의 곁을 떠나 야수들에게 둘러쌓인 낯선 세상을 향해 가는 카인으로부터 우리 人間은 어느 누구나 자기 존재의 해소의 대한 반항을 본다. 카인은 차츰 인간의 허무에 대항하여 생에 대한 불안에 못 견디게 된다. 다시 말하면 카인은 환경의 世界와 人間의 世界, 공동 世界 속에서 이미 카인 자신 단독으로 존재할 수 없고 결국 自己 고유의 生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카인의 후예는 누구나 남의 의미를 묻고, 고민하고, 허무와 투쟁하고 인내해 보기도 한다. 드디어 生의 意味를 찾지 못하고 자살의 길을 택하는 데까지 조달하기도 하는 것이다. 세상에 태어나 살아가는 동안 허무와 不安에 못 이기는 人間은 항상 무엇에건 다사 분주하고, 혹 他人과의 교류 관계를 원함으로써 不安에서 피하기도 한다. 노동이나 예술활동도 불안을 회피하는 하나의 方式이라고 할 수 있다. 그토록 여러모로 생각게 하고 人類의 歴史와 삶의 철학을 깊이 생각을 키우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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