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느빌 백작의 막내딸 세리외즈는 날이 저물자 슬그머니 성에서 빠져나와 숲에서 밤을 지새운다.
숲에서 덜덜 떨고 있는 세리외즈를 발견하고는 자신의 집으로 데려가 돌봐 주던 점쟁이 로잘바가
딸을 데리러 온 느빌 백작에게 예언한다. ‘매각을 앞둔 플뤼비에 성에서 열릴 마지막 가든파티에서 당신은 초대 손님 중 하나를 살해하게 될 거예요.‘
예언이 행해졌으니 누군가는 반드시 죽어야 한다. 가든파티를 취소할 수도 초대 손님을 죽일 수도 없는 딜레마에 빠진 느빌 백작은 이때부터 불면에 시달린다.
세리외즈에게는 미남 미녀에다 모든 것을 갖춘 일등 신랑 신붓감, 오빠 오레스트와 언니 엘렉트르가 있다. 그래서 점쟁이는 백작에게 묻는다. 왜 셋째 이름이 이피제니가 아니고 세리외즈냐고.
이쯤 되면 같은 이름의 자식들을 뒀던 아가멤논, 그리스군 총사령관으로서
사냥의 신 아르테미스의 노여움을 잠재우고 트로이 전쟁을 이끌기 위해
막내딸 이피제니를 제물로 바쳐야 했던 아가멤논의 비극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아니나 다를까, 세리외즈가 나서서 누군가 죽어야 한다면 자신을 죽여 달라고 애원한다.
언제부턴가 오감을 통해 느끼는 것이 마음에 와 닿질 않는다고, ‘나와 나 사이에 있는 얼음의 장벽’ 때문에 살아도 사는 게 아니라고, ‘날 사랑한다면 제발 죽여 달라고’, 그게 유일한 해결책이라고 아버지를 설득한다.
흥미로운 것은 이 설득과 유혹의 과정을 통해 세리외즈가 욕망의 주체로 거듭난다는 사실이다.
세리외즈가 다시 살고자 하는 것이 정말 슈베르트의 음악이 그녀 마음에 와 닿았기 때문일까?
혹시 ‘남성’인 아버지를 설득 혹은 유혹하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 아닐까?
그 덕분에 마치 끈끈이에 붙들린 것처럼 헤어 나오지 못했던 모호성 - 유혹의 대상과 주체 사이의,
아이와 여성사이의, 동화와 비극 사이의 모호성- 에서 벗어났기 때문은 아닐까?
어쨌든 현대판 숲속의 공주는 더는 운명에 휘둘리지 않는다.
저주에서 풀려나기 위해 백마 탄 왕자의 키스 따위가 필요하지도 않다.
아멜리 노통브의 여주인공들이 늘 그렇듯, 주도권은 오롯이 그녀가 쥐고 있다.
그녀는 아버지처럼 장르의 형식에도 얽매이지 않는다.
아버지인 느빌 백작의 세계는 가령 이런 것이다.
「소설다운 소설에서 일단 무기가 등장하면 그것은 사용되어야만 해.」
이에 맞서 세리외즈는 아버지의 눈앞에서 보란 듯이 다음 행동을 개시한다.
무기, 즉 운명 따위는 빼앗아 호수에 던져 버리면 된다. 그렇다, 그렇게 쉽다. 지나칠 정도로.
아멜리 노통브는 ‘푸른 수염’(2012)에서 신작 ‘추남, 미녀‘(2016)에 이르기 까지 샤를 페로의 잔혹동화를 다시 써보는 도전을 하고 있다. ’느빌 백작의 범죄‘ 역시 그런 도전 중 하나로서, 장르의 관점에서 보면 동화와 비극의 요소들이 뒤섞인 이상야릇한 작품이다. 하지만 저자가 강조하듯, ’괴물 같다고 해서 반드시 가치가 없는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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