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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만 멜빌 '모비 딕'(Moby Dick)

clint 2023. 7. 21. 13:00

 

이 소설의 화자인 이슈마엘은 무료한 학교선생 생활에 싫증을 내고 어느 날 맨해튼을 떠나 포경선에 오른다. 뉴베드포드에 온 그는 그날 여관방이 부족하여 남태평양 출신의 작살잡이 퀴케그와 방을 함께 쓴다. 온몸이 문신으로 가득한 퀴케그는 야만스런 외모와는 달리 친근한 사람으로 둘은 친구가 되어 같은 포경선 피쿼드 호에 오르기로 한다.

항해가 시작된 후 여러 날 동안 선장은 나타나지 않고 포경선은 두 항해사 스타벅과 스터브가 조종한다. 어느 날 배가 남쪽으로 갈 때 에이합 선장이 갑판에 나타난다. 선장의 한쪽 다리는 고래의 턱뼈로 만든 의족이고 얼굴 한쪽의 심한 상처는 옷깃 속으로 이어져 마치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상처가 이어진 듯 보인다. 배는 고래떼를 찾아 계속 남쪽으로 내려간다. 선장은 선원들을 갑판에 모으고, 일 온스짜리 금화를 돛대에 박고, 모비 딕이라는 전설적인 거대한 흰 고래를 처음 발견하는 자에게 이 금화를 주겠노라고 선언한다. 그는 그의 다리를 앗아간 흰 고래 모비 딕을 처 치해야 할 악의 화신으로 보고 있다. 스타벅과 스터브를 제외한 모든 선원은 환호하고 흥분한다. 그러나 일등 항해사 스타벅은 흰 고래에 집착하여 복수하겠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힌 선장의 광증을 비난한다. 모비 딕은 그를 죽이려는 자에게 위협적이다. 과거에 에이합 선장은 모비 딕과의 싸움에서 다리를 하나 잃었으나 또 싸우게 되면 생명을 잃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그는 스타벅의 말을 듣지 않고 모비 딕의 파멸을 기원하며 선원들에게 술을 돌리고 격려한다. 선원들은 고래잡이로 바삐 움직이며 잡은 고래를 자르고 분리하고 저장하는 작업에 분주하다. 다른 포경선들을 만날 때마다 선장은 흰 고래의 행방을 묻는다. 다른 선장들이 모비 딕을 쫓는 일은 바보짓이라고 경고하지만 에이합의 집착은 변함이 없다.

한편 열병이 난 퀴퀘그는 자신이 죽을 것을 예감하고 그의 종족의 관습에 따라 카누 모양의 관을 만들어줄 것을 요청한다. 관은 만들어졌지만 퀴퀘그는 회복하여 관에 희귀한 무늬를 조각하고 이를 상자로 사용한다. 선장은 파르시 교도인 페달라를 높이 평가한다. 페달라는 선장의 죽음을 예언한다. 어느 날 밤 무서운 폭풍이 일고 번개를 맞은 돛대에 불이 붙는데, 이는 마치 하나님의 손이 고향으로 돌아가라고 채찍질하는 것 같이 보인다. 오직 에이합 선장만 겁을 내지 않고 악의 화신처럼 불붙는 돛대 아래서 흰 고래를 찾아 죽이고 말겠다는 결심을 선언한다. 며칠 후 모비 딕이 발견되고 보트들의 추격전이 벌어진다. 모비 딕이 작살을 맞아 요동치자 보트가 조각나고 선원들은 물에 빠진다. 모비 딕 추격은 계속되나 고래는 사라져 나타나지 않는다. 다음 날 모비 딕을 다시 발견하여 작살 3개를 그의 옆구리에 꽂는다. 고래의 요동에 방향을 잃은 보트들은 부서지고 선장과 선원들은 구조되었으나 페달라는 보이지 않는다. 셋째 날 모비 딕은 지쳐 보였고 피쿼드의 보트들이 모비 딕을 잡았을 때 고래 등 작살에 묶인 페달라를 발견한다. 고래는 고통으로 분노하며 보트들을 뒤집고 깨트린다. 피쿼드 호에서 지켜보던 스타벅이 선장과 다른 선원들을 구하려고 포경선을 모비 딕 있는 곳으로 돌리자 고래는 피쿼드 호에 달려들어 배를 부셔버린다. 에이합은 작살에 목이 엉켜서 죽고, 이슈마엘만 혼자 살아남고, 선원들 모두 죽는다. 피쿼드 호가 가라앉을 때 카누 모양의 관이 떠올라 이를 붙잡고 몇 시간 표류한 이슈마엘은 지나가던 배에 의해 구조된다.

 

 

문학사나 예술사에서는 작품의 진가가 뒤늦게 발견되는 경우를 가끔 접하게 된다. 사무엘 베케트(1906-89)의 『고도를 기다리며』가 프랑스 무대에서 초연되었을 때 이에 대한 대부분의 평론가들의 반응은 좋지 않았고 관객의 야유는 대단했다. 그러나 오늘 날 이 작품은 부조리극을 대변하는 현대극의 고전이 되었다. 『모비 딕』도 이와 같은 수모의 경험을 했다. 이 소설은 1851 10월 영국 런던에서 처음 출판되었는데, 당시 유력한 문학지들이 졸작이라는 낙인을 찍어 멜빌을 완전히 짓밟아버렸다. 한 달 후 미국에서 출판되었을 때도 어느 정도는 영국의 영향이 미쳤다. 그로부터 70여년이 지난, 1920년대 초엽, 이 책의 위대성이 재발견되었고, 멜빌(Herman Melville, 1819~91)은 포(1809-49), 에머슨(1803-82), 호손, 휘트만(1819-92), 소로(1817-62) 등과 더불어 19세기 미국문학의 거장일 뿐만 아니라, 그의 『모비 딕』은 세계문학의 최고봉에 올랐다.

 

 

뉴욕 시에서 태어난 멜빌은 글쓰기를 시작하기 전까지, 은행원, 세일즈맨, 농부, 교사, 엔지니어, 선실 심부름꾼, 고래잡이 등 다양한 일에 종사했다. 작가는 바다 생활의 경험을 통해 여러 가지 타입의 인물들을 창조하였다.

소설 「모비 딕」에 담긴 뜻과 의미는 인간의 깊이만큼, 아니 우주만큼 깊고 넓고 복잡해서 해설 자체가 힘들다는 평자들의 공통된 의견이 있다. 많은 평자들은 이 소설의 핵심을 한쪽만 보려는 인간 욕망에 반대되는 우주에 내재한 이원성(duality)의 암시에서 찾는다. 멜빌은 모든 사건, 모든 대상은 다양한 여러 개의 의미가 있는데, 인간은 대체로 한 가지만 몰두해서 보려는 경향이 있음을 지적한다. 하나님은 무한한 의미의 우주를 창조했으나 인간은 영원히 한 가지 구체적인 의미에만 안주한다는 것이다. 구약성경의 요나와 고래에 대한 본문을 갖고 매플 신부는하나님께 복종하기 위해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부정해야 한다"는 열정적인 설교를 한다. 즉 우리는 한 가지 의미만 고집하는 우리 안의 경향을 거부하라는 뜻이다. 궁극적으로 삶의 진정한 기쁨과 성취는 법이나 권력, 힘을 통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인정할 때라는 점이 신부의 설교 요지이다.

에이합 선장은 흰 고래를 우주의 악의 상징으로 볼 뿐, 다른 다양한 의미로 보기를 허락하지 않는다. 마지막 클라이맥스 장면에서 멜빌은 에이합의 운명이 바뀌지 않음을 보여준다. 스타벅은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단념하도록, “모비 딕은 선장을 찾지 않습니다. 그를 미친 듯이 찾아다니는 쪽은 선장님입니다!"고 부르짖으며 선장을 설득한다. 스타벅이 강조하는 것은 선장이 보는 건 흰 고래 자체가 아니라 선장이 악의 상징으로 믿고 이를 처치하겠다는 것이 문제라는 것이다. 자신의 다리를 앗아간 흰 고래를 악으로 보고 이를 복수하겠다는 일념으로, 처자식을 과부와 고아처럼 던져두고 바다에 목숨 걸고 있는 선장의 시선이 문제라는 것이다. 에이합은 그의 말을 듣지 않았고, 때는 늦었다. 이제는 죽을 일만 남았다. 맹목적인 증오의 화신이 되어 광기에 완전히 노예가 된 에이합 선장은 "내 몸을 태양에 등지고... 정복되지 않는 저 고래에게 달려가야 한다"고 외친다. 선한 빛을 상징하는 태양을 등지고 어둠의 악을 향하여 몸을 돌린다. 마지막 장면에서 피쿼드호가 물거품을 일으키는 바다 표면 아래로 사라질 때 하늘의 매 한 마리가 피쿼드 호의 닻에 찔린다. 휘하 선원을 모두 죽음으로 몰아넣을 뿐 아니라, 하늘에 사는 것조차 에이합의 배에 파괴되는 아이러니한 모습을 멜빌은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모비 딕」은 대자연의 신비를 가리키는 셈이다. 인간의 욕망이나 희로애락과는 전혀 상관없이, 요컨대 에이합의 40년에 걸친 집념 같은 것은 한낱 하얀 물거품으로 한방에 날려버리고 고래는 유유히 바다 속으로 사라진다. 에이합이 믿고 의지하는 피쿼드호, 그의 용감한 뱃사람들, 모두 그의 인생을 자유케 해줄 힘이 없다. 그가 죽는 순간 그의 계획은 끝난다. 다윗 왕은 이 진리를 알았다. "방백들을 의지하지 말며 도울 힘이 없는 인생도 의지하지 말지니, 그 호흡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서 당일에 그 도모가 소멸하리로다"(시편 146:3-4). 인간이 아무리 발버둥치고 노력해도 진정 닿을 수 없는 우주의 신비한 수수께끼를 느끼게 한다멜빌은 이 작품에서 인간이 스스로 신처럼 행동하고 하나님이 우주에 심어 놓은 어떤 힘을 제거하려 할 때, 요컨대 하나님의 위치를 대신하려 할 때 나타나는 결과는 파멸임을 보여주려고 시도했다. 에이합 선장이 악으로 규정하고 처치하려는 흰 고래를 그의 힘으로 무찌를 수 있다는 그의 오만한 자신감, 그의 교만은 하나의 악으로 간주된다. 성경에서 교만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최고의 적으로 간주되어 자신의 능력이나 소유만을 의지하는 악한 소행을 뜻한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는 하나님이 반드시 꺾는다. 고전 그리스 비극이나 로마 비극에서는 교만을 자기 파괴적인 결과나 신들에 대한 무례함 등의 주제로 변형해서 사용하였다. 에이합의 교만한 성격은 파멸을 야기하고 치욕을 불러온다.

작가는 제목과 인물의 이름을 지을 때 의미를 두는 경우가 많다. 에이합은 성경에 나오는 아합 왕과 이름이 같다. 이스라엘 왕 아합은 왕 후 이세벨의 부추김으로 우상에게 복종하고, 그 이전의 왕보다 더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의 분노를 일으킨 왕이다. 에이합의 목숨 건 도전은 패배할 수밖에 없다. 신의 영역에 대한 도전이기 때문이다. 패배하도록 태어난 인간, 이 점은 인간의 비극성이기도 하다.

 

 

이 작품은 낭만주의의 특징을 보여준다. 소외된 자아, 자아 발견의 고통, 선악의 대결, 인간의 절대적 부족함, 파우스트 적인 영웅주의, 절대 진리에 대한 탐구, 인간 의지력의 한계, 신념과 의문 등, 이 소설이 다루는 것들은 19세기의 중요한 이슈들이었다. 135장에 걸친 방대한 『모비 딕의 장중한 문체와 격조 높은 리듬은 멋지다. 소설가 멜빌의 서술체는 극적이다. 이는 극작가 유진 오닐(1888-1953)의 극이 서술적인 점에서, 각기 다른 영역의 두 대표작가인 소설가와 극자가가 두 장르의 양상을 넘나드는 비슷한 글쓰기 스타일은 흥미롭다. 인간이 다른 동물과 크게 다른 점은 바로 언어 구사력에 있다. 하긴 하나님은 인간을 하나님의 이미지로 창조하셨다고 했으니까. 불과 30세 나이에 이토록 창의성이 뛰어난 웅장한 구상을 하고, 독자를 깊은 어둠으로 끌어 들이는 멜빌의 감동적인 울림, 그의 사색과 심리적 탐색은 놀랍다. 불후의 명작을 남기고 30 안팎에 요절한 예술가들이 제법 있으니 나이를 들먹일 수만은 없겠지만, 그래도 멜빌의 경우는 번득이는 천재적 영감의 산물이 아닌, 끈기 있는 체계적 연구조사의 결과를 30세에 내놓았다는 점이 대단하다.    '모비 딕은 고래에 관해 많은 것을 가르쳐주는 고래 전과지도서 같은 책이기도 하면서, 또 한편 집요한 흰 고래 사냥을 지켜보는 독자들로 하여금 영웅적 고래잡이가 되는 감동도 느끼게 해준다.

 

(Herman Melville, 1819~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