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희곡

고연옥 '발자국 안에서'

clint 2016. 7. 24. 15:44

 

 

 

변두리 동네, 쌀집 간판이 달린 빈 가게에 값싼 작업실을 찾는 젊은 화가가 세를 든다.

미궁에 빠진 살인사건이 일어난 곳이라는 부동산 업자의 설명이 있었지만 화가는 오히려 영감이 느껴진다며 그곳을 마음에 들어한다. 화가가 작업실을 꾸리자 마을 주민들은 쌀을 사기 위해 찾아온다. 30여년 간 쌀집이었던 곳에서 왜 쌀을 팔지 않느냐는 주민들의 아우성에 화가는 점점 짜증이 난다. 게다가 살인 사건을 해결한답시고, 밤낮없이 들이닥치는 형사의 간섭에도 지쳐간다. 퇴물처럼 방치된 쌀집간판을 스스로 떼어내려던 노력도 헤프닝으로 끝나고 만다. 결국 화가는 작업실 한켭에 쌀통을 두고, 주민들이 스스로 쌀을 사가도록 하는 셀프시스템을 마련한다. 어느 날, 한 손님이 쌀을 담는 종이봉투 대신, 그림이 그려진 화가의 파지에다 쌀을 담아간 이후 손님들은 화가의 그림이 그려진 봉투를 찾게 되고 쌀봉투 그림은 금새 유명세를 탄다. 주민들은 그곳이 쌀과 예술이 공존하는 곳이자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쌀집이라고 입을 모은다. 화가는 쌀봉투 그림으로 자신의 첫 번째 단독 전시회 제의도 받는다. 화가는 생전 처음 느끼는 인기에 흥분하며, 이것이 작업실이

없어서 잃어버린 첫 번째 기회를 만회하는 두 번째 기회라고 여긴다. 하지만 마을 사람들은 이곳에서 김치와 담배도 팔 것을 제안하고 화가는 이곳은 쌀집이 아니고 자신도 쌀집 주인이 아니라며 분개한다. 단골손님 중 하나인 여자에게 이런 사정을 토로한다. 오히려 여자는 마을 사람들의 의견에 동조하게 되는데...

 

 

 

 

 

<발자국 안에서>의 제목은 낭만적이다. 그런데 내용은 연쇄살인범의 이야기이다. 그렇다고 연쇄살인범의 이야기를 직접적으로 다루고 있지는 않은데, 오히려 연쇄살인이 일어나는 공간에 주목하고 있다. 곧 살인사건이 일어났었던 쌀집을 중심으로 또다시 벌어지는 새로운 살인사건을 보여주고 있다. 누가 범인인가의 이야기보다는 공간 자체가 주인공인 극이다. 그리고 작가는 이 공간을 누군가의 흔적이 남아있고, 새로운 흔적이 덧씌워지는 마치 ‘발자국’ 같은 공간이라고 명명하고 있다. 재미있는 것은, 공연에서 김광보 연출은 쌀집이라는 고정된 공간을 이리저리 옮겨 다니며 ‘움직이는 집’의 공간 이미지를 보여주고 있는데, 그러한 ‘떠도는 집’의 이미지는 이 극의 근원에 놓여있는 세상에 대한 공포와 불안감을 잘 표현해주고 있다. 사방 네 기둥만으로 세워놓은 텅 빈 쌀집과 함께 쌀집 양옆 가림막 뒤에 마치 벽 속에 갇힌 유령들처럼 서있는 사람들의 희미한 모습으로 시작하는 첫 장면은 쌀집이라는 공간 자체가 인물들을 압도하고 살아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인물들 또한 주인공인 화가를 제외한 모든 인물들의 얼굴을 하얗게 분장하여 마치 유령 같은 존재들로 표현하고 있는데, 이들은 살아있는 인물이면서 쌀집에 붙들려 있는 죽은 존재들처럼도 보인다. 이들은 개인 작업실로 쓰기 위해 쌀집의 새로운 주인으로 들어온 화가에게 쌀집의 존재를 반복적으로 확인시키고 화가가 다시 이 공간에서 쌀을 팔도록 강제한다. 시간의 흐름을 나타내는 무대 전환시 흐릿한 암전 상태에서 등장인물들이 통통거리는 종종걸음으로 직접 쌀집의 무대 세트를 옮기고 등퇴장을 하는 것도 이들의 비현실감을 반복적으로 환기시킨다. 이 극의 인물들은 개별적인 이름이 없는 존재들이다. 주인공인 ‘화가’도, 남녀노소의 적절한 안배로 배치해 놓은 손님들도 1, 2, 3, 4로 익명화되어 제시되어 있고, 연쇄살인범조차 이름 없이 그냥 ‘손님4’이다. 그리고 이러한 익명성 뒤에 인물들이 감추고 있는 폭력성과 의외성이 점차 드러난다. 쌀집 주인이 아닌 화가에게 쌀을 팔고 식료품을 팔 것을 집요하게 요구하는 손님들뿐만 아니라 화가를 더 자주 보고 싶어 하던 ‘여자/아내’도 “그림 그리는 어른 처음 봤어”라는 말로 화가가 화가이기보다는 쌀집 주인이기만을 원한다. 그리고 손님4는 자신이 과거 쌀집 살인사건의 범인이라며 자신의 살인을 쌀집이라는 “공간이 부추긴 것”이라고 정당화한다. 일견 평범해 보이는 인물들이 시간 흐름에 따라 변하고 괴물이 되어가는 과정을 1시간 15분의 짧은 시간 동안 간명하게 보여준다.       

 

 

 

 

 

화가역을 맡은 정승길, 아내 김지성, 손님1의 정규수, 손님2의 황지혜 등은 반복되는 상황 속에서 조금씩 말을 바꾸고 변해가는 인물들의 이중성을 때로는 소극(笑劇)적 스타일로, 또 때로는 건조한 표정과 기계적인 동작으로 포착해내고 있다. 일상성과 비일상성, 선의와 악의, 욕망과 파괴, 희비극적 스타일의 연기 등 이 작품은 궁극적으로 이중성의 세계를 보여주고 있다. 쌀집은 동시에 쌀집이면서 화가의 작업공간이고 살인의 현장이듯이 선악이 혼재되어있는 공간이고, ‘손님4/전주인은 손님이면서 살인자이고, ‘화가는 화가이면서 쌀집 주인인 혼란스러운 상황이 중첩되어 반복되고 있다. 그리하여 이 공간은 우리가 살아가는 공간에 대한 거대한 비유로서 기능하는데, 문제는 주인공인 화가의 존재이다. 화가는 얼굴에 회칠하고 소극적으로 표현되고 있는 다른 인물들과 달리 자연스러운 분장과 연기를 보여주는데 마지막에는 새로운 살인의 희생자가 된다. 곧 화가는 처음부터 손님들로 대변되는 동네 사람들과 차별화된 존재로 이들과 섞이지 못하고 결국 살인자에 의한 우발적인 살인의 대상이 된다. 아무리 살인자가 살인의 이유로 내세우고 있는 공간의 논리를 내세우고 있다 하여도,

사실 화가는 아무 이유 없이 죽음을 당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으로 이는 현재 세계에 만연해 있는 폭력의 자의성(恣意性)을 극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으로 시사하는 바가 크다. 실제로 우리는 아무 이유 없이 살고, 정당한 이유 없이 아이들이 실종되고, 인정할 수 없는 갖가지 이유로 사람들이 다치고 죽어가고 있다. 그런데도 극은 살인자의 고백을 통해서나 모든 것을 한꺼번에 밟아 없애버린 거대한 발자국이라는 극 초반의 형사의 말, “모든 것을 밟아 없애버렸지만 동시에 새롭게 만들어진 공간이라는 마지막 부동산의 말을 통해 이 공간을 일종의 발자국으로서 거듭 의미 부여하고자 한다. 이미 희미하게 지워져 있는 발자국에서 새로운 증거를 찾아보려는 안타까운 노력들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 새로운 증거는 확실한 증거로 채택되기엔 너무 희미하다. 각인물마다 촘촘하게 겹쳐놓은 어지러운 발자국까지 합쳐져 더 혼란스럽다. 주인공인 화가도, 살인자인 전주인도, 수없이 등퇴장을 거듭했던 손님들도 아닌 형사와 부동산을 통해 작품의 주제를 직접적으로 전달하고 있는 부분도 쉽게 이해되지 않는다. 연쇄살인범의 이야기를 단순한 흥밋거리로 전달하지 않는 것은 이 작품의 미덕이나 이 이야기를 통해서 관객은 과연 무엇을 생각해야 할지 미궁에 빠지게 된다.

 

 

 

 

작가 고연옥
1971년 서울 출생.
1996 부산일보 신춘문예 희곡 부문 당선
2001 올해의 연극 베스트3, 올해의 우수희곡 선정
2003 대산창작기금 희곡부문 선정
2004 올해의 예술상 연극부문 우수상 수상
2007 서울연극제 대상, 희곡상, 연출상 수상<발자국 안에서>공연<꿈이라면 좋았겠지>,<인류 최초의 키스>,<웃어라 무덤아>,<일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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