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희곡

박상현 '405호 아줌마는 참 착하시다'

clint 2016. 7. 23. 13:38

 

 

'405호 아줌마는 참 착하시다'는 장미촌 아파트 204동 505호에는 30대 중년부부 유지호와 심은희가 살고 있다. 그들은 맞벌이를 하여 결혼한 지 9년만에 아파트 장만한 것을 기뻐하고, 며칠 전 동창회에 참석해 취한 지호가 아래층 405호로 잘못 들어간 사건으로 사소한 부부 싸움을 벌이는 평범한 부부이다. 지호는 마주 보이는 아파트에서 밤마다 깜박이는 카메라의 불빛을 보고 107동 505호에 사는 문진수를 알게 된다. 진수는 사진작가로 각 층의 아파트를 시간대 별로 찍는 작업을 하고 있다. 어느 새 친해진 그들은 아파트 각 층에 어떤 사람들이 사는지 이야기를 나눈다. 대화 도중 지호는 묘령의 405호 여자와 우연히 관계 맺은 사건을 말한다. 한편, 지호와 같은 동에 사는 305호에서는 아이를 잃어버린 여자가 살고 있다. 그 사건이 발생한 후로 아이 어머니는 아이를 찾아 온 아파트를 헤매고 다닌다.이윽고 오랫동안 비어있는 집인 405호 여자를 의심하게 된 305호 여자는 지호의 집 베란다를 이용하여 405호에 들어가 볼 것을 주장한다. 부탁을 받고 아래층으로 내려간 지호는 경악을 금치 못한다. 그곳에는 죽은 지 여러 달이 지나 썩어가고 있는! 여자의 시체가 있었다. 405호 사건으로 후유증에 시달리던 지호와 은희는 타인에 대한 두려움으로 이삿짐을 싼다. 짐정리를 하던 지호는 진수가 우연히 건네주었던 405호 사진의 날짜를 보면서 현실에서 불가능하게 여겨지는 믿을 수없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서 막을 내린다       

 

 

 

 

 

추리극과 추리 소설은 대개 희생자의 죽음이나 피해를 대전제로 하여 탐정이 범인을 찾는 추리 형식을 취한다. 그 결말은 범인의 정체를 밝히거나 아니면 밝히지 못하여 사건이 미궁에 빠진다. 범인을 밝히는 경우, 범인을 밝혀나가는 과정의 놀이적 재미나 관객과 독자의 기대를 전복시키는 반전과 충격의 묘미가 마련되고, 그렇지 못할 경우엔, 관객의 기대를 저버리긴 하나 상황의 부조리성이나 불가해성이 강조된다. 범인 찾기의 추리 구조는 그 자체가 흥미진진하다. 쫓는 자와 쫓기는 자, 정체를 밝히려는 자와 끝까지 숨기려는 자의 숨바꼭질이 진행된다. 관객과 독자는 몇 가지의 단서를 갖고서 출발하여 탐정을 따라 미로처럼 이어져 있는 미지의 세계를 지나면서 진실 찾기의 게임을 즐긴다. 대중성이 강한 극과 서사물들 중에 추리물이 많은 것도 관객과 독자를 강력하게 흡입하는 추리 형식의 속성 때문이다.
이번에 공연된 박상현 작, 이성열 연출의<405호 아줌마는 참 착하시다>(학전블루소극장, 2003.8.5.-8.17)는 추리극적 미스테리를 표방하고 있다. 중심인물은 두 부류의 사람들이다. 107동에 살면서 맞은편 아파트를 카메라로 찍으며 관찰하는 진수라는 절름발이 사내와 맞은편 아파트 204동에 이사온 지호 부부다. 진수는 남의 사생활을 엿보며 관찰하는 자이고 지호 부부는 진수의 관찰 대상들 중 하나다. 극의 진행은 동일한 무대 공간 안에서 진수와 지호 부부의 삶이 교차되는 방식으로 이뤄진다. 이를 위해 무대 공간은 두 부류의 생활이 가능하도록 간소하게 꾸며져 있다. 중앙에 소파가 있고, 뒷면에 베란다 문이 있고, 오른쪽 구석에는 조그만 오디오와 원두커피 포트와 찻잔들이 놓여 있다. 어느 아파트에서나 쉽게 볼 수 있는 모습이다. 다만 다른 점은 무대 좌우편에 긴 파이프가 4개씩 세워져 있고 파이프의 중간부분에 영사막이 설치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거실 안의 상징물과 같은 인상을 주면서 기능적인 측면에서 슬라이드 사진을 투사해서 볼 수 있는 영사막으로 활용된다. 아파트 실내로서의 공간적 동일성은 두 부류의 생활이 쉽게 넘나들며 전개될 수 있게 한다.
서로 다른 공간에 존재하는, 이 두 부류의 삶이 관계를 맺는 것은 ‘훔쳐보기’(voyeurism)다. 진수는 카메라를 자동으로 설치하여 맞은편 아파트를 찍으면서 미묘한 변화를 관찰하기도 하고 아파트 주민들의 각기 다양한 동태를 흥미진진하게 살핀다. 진수와 지호의 만남은 지호가 진수의 비도덕적 행위를 알아차리면서다. ‘훔쳐보기’ 또는 관음증은 남의 사생활을 몰래 들여다보는 변태적 행위로서 도덕적으로나 법적으로 용납되지 않는다. 이 음흉함은 남의 사생활의 비밀을 발견하거나, 훔쳐보는 자가 남의 사생활에 연루되어 극적인 사건을 만들기에 서사의 모티브로 자주 이용된다. ‘훔쳐보기’의 영상 미학을 실현시킨 대표적인 예술가로서 알프레드 히치코크를 들 수 있다. 그의 대표작인<사이코>(Psycho)와<이창>(Rear Window)은 ‘훔쳐보기’의 효과를 십분 발휘하고 있다.<사이코>에서는 카메라의 시선을 관객들의 시선과 일치시켜 관객들을 훔쳐보게 한다. (연극과 영화는 기본적으로 관객들이 무대와 영상 속의 세계를 훔쳐보는 예술이다.) 메리언의 살해자가 노먼의 어머니일 것이라고 짐작하는 관객들로 하여금 어머니의 목소리를 흉내내며 정신분열증에 시달리는 노먼의 모습을 보게 하여 충격을 던져준다. 여기에서 훔쳐보기 수법은 관객의 기대를 전복시키면서 사건의 진범을 충격적으로 폭로하는데 쓰인다.<이창>은 ‘훔쳐보기’의 기법을 가장 극대화한 작품이다. 다리를 다쳐 집안에만 있게 된 신문 기자는 우연히 맞은 편 아파트의 창을 통해 비치는 한 가정에 주목하면서 살인 사건의 진범을 밝히고 그 사건에 연루된다. 여기에서 단순한 ‘훔쳐보기’의 행위는 은폐된 살인사건을 규명하는 진실의 열쇠이자 극적인 사건을 낳는 계기가 된다. 그렇다면<405호 아줌마는 참 착하시다>에서 훔쳐보기는 어떻게 다뤄지는가? 405호 아줌마의 죽음과 결부되면서 그 행위는 오해를 받는다. 진수는 살인 사건의 참고인 자격으로 형사 앞에서 그간의 일들을 독백하듯이 진술하게 된다. 관객들은 진수를 405호 살인 사건의 용의자로 생각해보지만, 뚜렷한 단서나 혐의점을 찾지 못한다. 오히려 그가 찍은 사진들을 통해 이 비정하고 단조롭기만한 아파트에 다양한 인간 군상이 거주하고 있다는 소박한 발견을 알아차리게 된다. 흑백 사진과 같은 단순함 속에 참으로 다양하여 흥미있는 삶의 양태가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진수의 훔쳐보기가 갖는 긍정적 의미는 여기에 있다.

 

 

 

405호 살인 사건과 관련된 또 다른 인물은 같은 동 505호에 사는 지호다. 이곳으로 이사온 지 얼마 안된 그는 만취하여 귀가하던 중 405호를 자기의 집인 줄 잘못 알고 들어갔다가 그 아줌마를 만나고 나온다. 후에 405호 아줌마의 죽음이 밝혀지면서 단란했던 지호 부부 사이에는 불협화음이 생기기 시작한다. 지호가 405호에 들린 사실을 알고 있는 지호의 아내는 알 수 없는 불안에 휩싸이고 지호 역시 자신이 살인하지 않았으면서도 알 수 없는 죄의식에 사로잡힌다. 이 작품이 무게를 두고 있는 부분은 진범 찾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알 수 없는 불안과 공포의 심리적 분위기에 있다. 작가는 살인 사건을 극의 중심적 배경에 놓고, 그와 연관된 사람들로부터 진범이라는 의심을 갖게 하지만, 진범이 누구냐를 궁극적으로 따지지 않고, 플롯의 방향을 선회하여 사건과 관련된 의미있는 메시지를 전달하는데 주력한다. 미궁에 빠진 405호 아줌마 살인 사건, 실종된 아이를 찾아 헤매는 305호 아줌마의 울부짖음, 일상의 행복한 삶을 비집고 들어와 서서히 파괴시켜가는 불가시적 힘 등이다. 그것은 마치 아파트 바깥에서 매스껍게 풍겨오는 냄새와도 같이 눈에 보이지 않으면서 이 세계 안의 인간들에게 나쁜 영향을 미치고 점차 지배해가는 무형의 힘인 것이다. 이 작품은 이와 같이 인간과 세계의 부조리성과 서스펜스가 주조를 이루고 있다. 부조리성과 서스펜스는 그 자체가 부조리극의 중요한 속성이다. 합리성 이성으로 설명할 수 없는 세계와, 사건의 현상은 있으나 진실은 밝힐 수 없는 모호성의 세계는 인간 이성의 절대주의를 거부하며 상대주의를 지향한다.
상대주의의 관점은 405호 아줌마의 정체를 통해 전달된다. 무대에 한번도 등장하지 않은 405호 아줌마는 여러 사람들의 체험을 통해 확인될 뿐이다. 그녀에 대한 정보는 보는 사람에 따라 남자들을 유혹하는 색기 있는 술집 여자, 착한 아줌마, 아가씨와 아줌마의 모호한 경계, 실종된 아이의 유괴 혐의자 등이다. 아이들에게는 착한 아줌마로 비친 반면에 어른들에게는 성적 욕망의 대상이거나 매혹적인 여인이면서 동시에 실종된 아이의 유괴 혐의자로 비친다. 그러나 그들의 진술을 통해서도 그녀가 죽을 만한 구체적인 이유나 단서는 발견되지 않는다. 더욱이 그녀를 보았던 주체 역시 혼란에 빠지게 되면서 서스펜스는 증대된다. 마지막 장면에서 지호가 405호 아줌마와 대화를 나누기 이틀 전에 이미 아줌마는 죽어 있었다는 것을 사진을 통해 뒤늦게 확인함으로써 혼란과 불안은 극대화된다. 취기에 우연히 만나 대화를 나눈 아줌마에 대한 기억이 실재인지 허구인지 근본적인 의문에 부쳐지면서 대상으로서의 객체뿐만 아니라 경험 주체이자 인식 주체도 카오스의 상태에 휘말리고 만다. 결국 405호 아줌마의 정체 문제는 인식의 주체마저도 회의에 부치고 만다. 주체와 객체의 회의는 인간 이성의 본질을 의심하는 것이고 진실의 부재 혹은 불가지론으로 이어진다.
이 작품의 부조리성을 성공적으로 극화하는데 있어서 배우들의 연기는 주목할 만하다. 이찬영(진수 역)은 일반적으로 훔쳐보는 자가 갖는 음흉함이나 변태적인 느낌 없이 담담한 어조의 논리적 대사, 세계의 남다른 통찰을 갖고 있는 예술가적 무게를 표현하였고, 부부로 나온 이해성(지호 역)과 이경선(은희 역)은 30대 후반 평범한 부부의 소박한 가정 생활이 점차 와해되어가는 과정의 심리를 섬세하면서도 조화롭게 그려냈다. 단역으로 나온 박수영(경비원 역)과 이현경(305호 아줌마 역)의 연기는 이 작품에 단역 이상의 무게를 실었다. 경비원으로서의 해학적인 사투리와 행동은 잔잔하고도 건조한 일상에 잠시나마 생기를 불어넣는 희극성을 부여하였고, 이현경의 비애로 가득찬 눈매와 표정은 그 자체가 불안과 공포를 일으키는 강한 징후가 되었다.
이 작품에서 지적하고 싶은 것은 작품의 구조다. 진수의 시간은 역순으로 진행되어 그가 형사에게 취조를 받는 장면에서 시작하여 그가 이곳에 이사를 오는 장면으로 끝난다. 이에 반해 지호 부부는 이사를 오는 장면에서 시작하여 다시 이사를 가게 되는 장면으로 끝난다. 그리고 마지막 장면에서 진수와 지호 부부의 시공간이 중첩되어 한 무대 안에 두 부류의 상황이 공존하게 된다. 작품의 이러한 구조는 자못 독특하다. 순행적 시간 구조와 역행적 시간 구조가 계속 병치되어 전개되다가 마지막에 하나로 합쳐지는 것이다. 그런데 과연 이러한 구조의 복잡한 얼개가 이 작품의 주제 구현에 적합한 것일까? 친절하게도 장면 전환시 영사막의 슬라이드 영상을 통해 시공간을 보여주지만, 상호 반대방향으로 진행되는 두 개의 시간 구조가 주제적 의미와 어떤 구체적인 연관성을 확보하고 있는가? 나아가 이런 시간 구조가 이 작품의 추리 형식에 어떤 순기능을 하고 있는 것일까? 두 부류의 생활이 동일하게 순행 또는 역행의 시간 구조로 전개된다면 극적인 효과는 어떻게 달라지는가? 필자의 단견일지 모르나, 작가의 작품 구조에 대한 독특한 전략과 설명(공연 팜플렛에 나온 작가 박상현의 글 ‘연극 속에 존재하는 두 시간 : 크로노스와 아이온’)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이 작품을 관람했을 때, 그 구조가 지적인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거나 신선한 자극을 주지 못하였다. 대체 왜 그럴까? 진수의 시간 구조를 굳이 역순으로 할 필요가 없다는 점이고, 장면 전환시 슬라이드 영상을 통해 시공간을 알리지 않았더라도 진수의 생활을 순차적으로 이해하는데 큰 지장이 없다는 것이다. 예컨대 극의 결말부에서 진수가 ‘이 아파트’로 오는 장면은 진수가 ‘다른 아파트’로 이사오는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두 부류의 생활을 동일한 시간 구조로 얽어 놓아도 작품의 다양한 메시지 전달에는 전혀 지장이 없다고 본다.
이 작품의 구조 문제는 작가의 작품에 대한 정치한 의식과 논리를 반영한다. 그만큼 이 작품은 부조리한 소시민적 인간들과 현실에 대한 섬세한 지각과 통찰이 담겨 있다. 훔쳐보기와 살인 사건이라는 대중적 소재를 작품 안에 익숙하게 끌어오면서도 그 의미를 뒤집거나 우회하여 자신의 목소리를 전달하는 개성이 담겨 있다. 그 개성에서 작가의 열려 있는 가능성과 저력을 확인한다.       

 

 

 

* 작가 소개 - 극작가, 박상현

서강대학교 신문방송학과 졸업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연출과 전문사과정 중퇴
미국 마이애미대학교 대학원 연극과 졸업(MA)
[창작희곡]
[수상경력]
-1997년 한국연극평론가협회 선정 올해의 연극 베스트3(키스)
-2004년 제6회 김상열연극상(자객열전)
-2004년 한국연극평론가협회 선정 올해의 연극베스트3(자객열전)
-2004년 제12회 대산문학상 희곡부문(405호 아줌마는 참 착하시다)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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