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희곡

이미경 '무덤이 바뀌었어요! '

clint 2016. 7. 13. 17:47

 

무덤이 바뀌었어요, 이미경.hwp
0.16MB

 

 

 

 

 

바쁜 현대인을 위한 사후대행 서비스 업체 '하늘로 가는 길'로부터 아버지 기일이라는 메일을 받은 서우진 재수생인 아들 서환, 인터넷 쇼핑몰로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아내 이경숙과 모처럼 함께 제사 준비를 한다. 이들은 이번 제사가 10번째가 되어 사이버머니를 현금으로 교환해 상속금을 받을 수 있다는 기쁨에 열심히 제사를 지낸다. 하지만, 제사를 지내는 중 서비스업체의 전산장애로 할아버지(서우진 아버지) 무덤이 사라지게 되고, 가족은 우왕좌왕 하지만 상속금을 받아야 된다는 생각에 어쨌든 기일을 지켜 증거를 남겨야 한다며 바뀐 무덤 앞에서 서둘러 절을 한다. 며칠이 지나도 전산오류가 복구되지 않자 화가 난 서우진은 사후 대행 서비스 업체를 찾아간다. 서비스 업체의 변명을 듣는 와중, 한 노인이 함께 동거하는 할머니와의 합장으로 인터넷 묘지를 만들고 싶다며 지금 당장 잔금을 치르겠다며 다급하게 들어온다. 각자의 사정으로 다급한 서우진과 알 수 없는 노인은 우연히 마주친 상황에서 서로를 알아보는데...

환이네 가족이 제사를 지내고 있다. 컴퓨터 모니터에 영정 사진이 떠 있고, 거기 절을 한다. 그 모습이 꽤나 진지하고 능청스럽다. 어느 타이밍에 웃어야 할지 모르겠다. 아… 제발… 그렇게 격식을 갖추려고 애쓰지 말라고… 환이의 할아버지 서춘식이 죽기 전 장묘문화서비스에 등록을 한 결과다. 이 업체는 서비스를 신청한 이가 죽은 후, 그 가족들에게 해마다 기일이 되면 알람을 해준다. 그들은 인터넷상에 묘지를 만들어주고, 가족들이 제사 지내는 사진을 찍어 올리면 열 번째가 될 때 신청자가 기탁해놓은 현금을 유가족에게 돌려준다. 그런데 제사를 지내던 중, 눈 깜짝할 사이에 모르는 할머니의 사진이 모니터를 점령한다. 전산오류다. 이거 절을 마저 해야 하는 건가?


제사를 지낸다는 건, 떠난 이를 기억한다는 뜻일 게다. 그 과정에 수많은 까다로운 절차와 지켜야 할 약속이 있다는 것은 그만큼 온 마음으로 정성을 다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러니 한편으로 생각하면 업체의 알람을 받고 인터넷상의 무덤에 절을 한다는 것은 ‘제사’라는 의식의 본질을 완전히 전도시켜 버린 것 아닌가. 그런데 뭐, 세상에 그렇지 않은 일은 또 얼마나 있겠는가. 어차피 기억되고 싶은 사람이 돈으로 그 기회를 산 것이다. 가족들은 기탁금이 얼만지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 몇 년간 의무감으로라도 고인을 위한 시간을 갖는다. 그런데 아무리 그래도, 그 모든 게 다 가짜라 해도 모르는 사람 무덤에 절을 할 수는 없는 거 아닌가? 혹은 도대체 그게 무슨 상관인가…

 

 

 

 

서춘식은 그런 사람이었다. 매일 만선으로 돌아오는 선장처럼 큰 소리를 치지만 정작 가족들에게 남겨놓은 건 빚 독촉장뿐인. 그러다 아들의 결혼식에도, 아내의 장례식에도 가지 못하고 오랜 세월 가족과 연락을 두절한 채 홀로 나이든 노인. 그리고 이 가족들이 다 그렇다. 다들 그런저런 각자의 이유로 외로워한다. 기실 특별할 것도 없는 사연들이다. 이 작품은 바로 그 평범한 외로움들을 정색하고 또박또박 이야기한다. 세상에 이런 감정을 느끼는 사람도 있었는데 몰랐지? 하면서 눙치고 말을 건다. 그리고 이야기의 외연에 자그마한 프레임이 하나 들어온다. 무대는 폭이 3m 남짓 되는 모빌하우스다. 관짝 같기도 하고, 고립된 쪽방 같기도 한 이곳에 들어선 사람들에게 탈출구는 없다.

 

 

 

 

 

2012년 <그게 아닌데>로 우리 연극계를 깜짝 놀라게 했던 이미경 작가는 지난 ‘봄작가 겨울무대’에서 민새롬 연출의 작품을 보고 이 대본을 건넸다. 무대가 시각화되는 방식, 연출을 비롯해 스태프들이 작가의 글에 섬세하게 파고들어 공들인 흔적에 좋은 인상을 받았다고 한다. 그리고 민새롬 연출은 그간 사람 사는 이야기를 따뜻하게 풀어왔던 극단 이루에 이 작품을 같이 하자고 제안했다. 이번 작품 역시, 무대에서부터 영상에 이르기까지 소소한 요소들과 배우들의 정감어린 연기가 어우러져 이 외롭고 쓸쓸하기 짝이 없는 이야기에, 견딜 수 없이 부조리한 현실에, 관객들을 던져놓는다. 바로 그 정직한 극작과 연출, 그리고 배우와 스태프들의 조화는 지금 우리가 왜 이 이야기를 볼 수밖에 없는지 생각하게 만든다. 진짜로 바뀐 건 무덤이 아니다. 웃자, 그리고 어서, 기억되기에 적절한 방식을 물색하자.

 

'한국희곡'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미경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1) 2016.07.15
이미경 ‘맘모스 해동’  (1) 2016.07.14
박수진 '영광의 탈출'  (1) 2016.07.12
차근호 '70분간의 연애'  (1) 2016.07.10
김숙종 '낙타 채'  (1) 2016.07.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