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희곡

이미경 ‘맘모스 해동’

clint 2016. 7. 14. 12:38

 

 

 

고상하길 원했으나 초라할 뿐인 삶을 감추고자 인간은 허영의 포즈를 취한다. 희망이나 기대 없는 삶의 신산함, 그 와중에 허영을 유지하는 것은 절망하지 않기 위한 최소한의 장치다. 뚝배기 속 개고기를 접시에 덜어 칼로 썰면서 에스프레소를 곁들이는 행위. 이 부조리한 식사 방식이 비웃음거리라는 것을 대놓고 까발리는 것은 가식적으로 썰리는 고기를 위해 개를 때려잡는 노동행위다.

 

 

 

 

 

피아노를 전공했지만 지금은 시어머니가 물려준 보신탕 식당을 운영하고 있는 아내는 개고기와 에스프레소를 먹으며 빨래에 집착하는 남편을 긍정하는 유일한 인물이다. 이해하기보다 그 허영의 포즈에 비루한 인생을 기대고 있다. 살아 있는 상태에서 얼어버리므로 위용을 유지하고 있으나 결국 시체일 뿐인 맘모스가 가짜라는 것을 알려주는 이는 아내의 식당에 개를 대주는 사내다아내는 물론 라파엘 전파 화가들의 그림 속 인물에게까지 누님이라고 부를 수 있는 이 남자는 명화의 화풍과 내제돼 있는 의미를 탐구하기보다 인간이 갖고 있는 원초적 본능으로 모든 걸 보편화시킨다. 고상하고 인자한척 하지만 실은 냄새나고 더럽고 초라하고 궁색할 뿐인 삶을 간파한다. 따라서 온통 새하얀 누님의 식당이 왜 보신탕과 어울리지 않는지 완벽히 몸으로 이해하고 있으며 말할 수 있다.

 

 

 

 

 

비록 냄새날지라도 분수에 맞게 사는 개장수에게 맘모스는 시체를 동태처럼 얼려놓고는 살아있다 믿게 하는 눈속임일 따름이지만 아내는 그 박제된 꿈에서 눈을 떼지 못한다. 남편은 아내의 기대에 맞춰 7년 째 논문 출판을 준비하고 있다. 아내는 살아 움직이지 않는 꿈을 위해 기다리고 또 기다린다. 남편이 교수가 되면 지긋지긋한 생활에서 벗어나 다시 품위를 찾을 수 있을 거라는 허황된 믿음으로 개고기 살점을 발라내기 위해 눈을 부릅뜬다. 맘모스같은 꿈이 해동되지 않기를 바란다. 그러나 강박관념처럼 세탁을 하더라도 집안 곳곳에 배인 냄새는 쉽사리 지워지지 않는다. 미학 논문 따위를 읽는 세상을 바라느니 천지가 개벽하길 기다리는 게 낫다는 남편의 말은 그래서 아내에게 사형선고와도 같다. 이미 인생을 기다리는데 다 써버렸는데 천지가 개벽하는 것 쯤 왜 기다리지 못하느냐고 묻는 아내의 질문은 지극히 현실적인 비극이다. “내가 돌아갈 곳을 지키고 있어야지. 그저 막연하게 꿈이라도 꿀 수 있게.” 아내의 어머니는 성악을 전공했다. 포르노 영화를 찍는 남편이 늘 대작을 준비하는 천재감독으로 남길 바라며 밤무대에서 노래를 불렀던 어머니는 딸에게 현실을 견딜 수 있는 비법을 물려줬다.

 

 

 

 

 

연극 맘모스 해동은 그저 위선과 가식으로 가득한 불행을 까발리는 작품이 아니다. 잠깐의 방심으로도 깨질 수 있는 얇은 외피 같은 꿈으로 추위를 견뎌야 하는 인생의 나약함, 그 저변에서 인물들을 집요하게 추동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게 한다. 허름한 공간에 어색하게 배치된 고풍스러운 가구들, 밀레이의 그림, 비정상적으로 큰 거울과 세탁기 그리고 등장인물들의 과장된 웃음이 그로테스크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이 기괴함이 맘모스의 의미이자 인생의 본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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