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희곡

이예찬 '도넛 dOnut'

clint 2016. 5. 13. 07:49

 

 

 

 

 

한국희곡작가협회 2016 신춘문예 당선작.

 

꼭대기에 도넛(Donut)이라는 영문 간판글씨가 보인다. 그 왼편에 긴 지주에 도넛을 올려놓은 쟁반이 여러 개 달린 조형물이 있고, 무대 여기저기에 식탁과 의자를 둘러놓았다. 무대 좌우에도 여러 개의 의자를 놓아 출연자들이 앉도록 해 놓았다.

도넛 가게에서 알바를 하는 젊은 여성이 도넛 주문을 받는다. 출연자들이 등장하면서 독특한 동작을 해 보인다. 마치 달 표면에 도착한 우주인의 보행 같은 걸음걸이다. 중력이 없는 세계에 사는 인간군상 같다. 여기에 중력을 연구하는 박사와 조수가 손님으로 등장하고, 법관이 되려는 여자 고시생, 젊은 남자손님이 손님이고, 도둑과 여자 형사가 합류를 한다. 음악이라든가 출연자들의 동작이 느린 동작의 팬터마임이나 로봇이 움직이는 것 같아 관객의 시선을 일찍 암치 끌어들인다. 각자 도넛을 시키면서 도넛에 관해 한마디씩 하며 도넛의 뚫린 공간을 두고, 인간의 내면이나 허점과 비교해 가며 흡사 개그 같은 분위기를 창출하기도 한다. 도넛을 파는 예쁘디예쁜 알바여, 백발의 박사와 조수의 중력과 연관된 식견이 발표되고, 법관지망 고시녀의 법률지식이 펼쳐지면서 마치 장승 못지않은 큰 키의 도둑이 등장한다. 도둑은 성품인양 도넛도 도둑질을 해 먹어야 만족을 느낀다는 설정이고, 묘령의 여성 형사는 언젠가 실수로 도둑을 놓친 자신의 과오 때문인지 제대로 한 번 도둑을 버젓이 체포함으로써 전의 과오를 상쇄하려 한다는 것이 객석에 전해진다그러나 도둑은 도넛을 훔치는 동작을 취하자마자 마침 그 자리에 와있던 형사에게 체포되고 만다. 형사는 체포하기 전에 총성을 내면서 위협을 하고, 도넛을 팔던 알바는 이런 장면을 지켜보면서 도둑의 말과 형사의 말에서 새로운 경험을 하게 된다. 도넛의 구멍처럼 뻥 뚫린 인생의 공간과 세상의 공간을 비로소 보게 된다.

 

 

 

 

 

당선 소감 : 이예찬

어느 날 어느 버스 안이었다. 비가 오는 날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어째선지 기억 속의 날들은 비가 오는 경우가 많다.) 도넛 모양 바퀴들은 젖은 포장도로 위를 구르고 있었다. 한 사람이 어린 시절 자신을 사로잡았던 도벽에 대해 이야기했다. 나는 그 이야기를 흥미롭게 들으면서도 왠지 마음이 아팠다. 그 사람이 어린 시절 행한 절도에 나의 책임이 있는 것 같은, 나의 잘못이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내가 절도를 한 적이 있었나? 무언가를 훔친 적이 있었나? 아님 절도를 조장하기라도 했나? 답은"아니다.”였다. 그러나 모종의 고통스러운 책임감이 나를 놓아주지 않았다. 이제 그 이야기를 내게 해준 이름은 아프고 슬플 때만 생각나는 이름이 되어버렸다책임감을 입에 물고 우물거리며 <dOnut>을 썼다. 모양은 도넛이었는데, 타이어 고무처럼 질겼다. 잇몸에선 딸기시럽이 흘렀다.dOnut을 탈고하던 날, 그 이름이 꿈에 나왔다. 서글픈 꿈이었지만 무도 상처를 받지 않았다. 나는 무언가에 대하여 어느 정도 용서를 받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꿈결이 전에 없이 달콤했다. 나는 1초보다 짧은 시간을 도우(dough) 처럼 부풀려, 그 속에서 아름다움을 노래하겠다, 다짐했다. 무엇보다 감사했다.

이제 감사를 말하고자 합니다. 우선 부족한 글을 뽑아^신 심사위원들께 감사합니다'무엇보다 너의 이야기를 써라' 말씀해주신 윤대성 선생님, '기억이, 이야기가 있다면 사람은 살 수 있다'고 말씀해주신 이강백 선생님, '천천히 걷고 즐거워하라' 말씀해주신 장성희 선생님. 감사합니다. 그 말씀들이 제 길의 등이었습니다.

 

심사평 ; 위기훈, 김수미

올해는 총 54편이 응모되어 신춘문예의 열기가 뜨거웠다. 작품들은 전반적으로 우리의 일상과 사회의 부조리하고 암울한 문제에 깊은 관심을 나타냈다. 작품들의 수준은 높낮이가 있었다. 예심을 거쳐 본심에 일곱 작품이 선정되었다. 본심을 거쳐 최종심에서는 비교적 깊이 있게 논의할 만하다고 평가되는 세 작품으로 좁혀졌다. 촬영, 키다리 아저씨 행방불명><dOnut>.

촬영은 소재와 주제의 접목이 돋보이며 단막임에도 서사를 끌고 가는 힘이 느껴진다. 영상 자막을 통해 전달되는 다큐멘터리에 대한 비판적 인식과, 다큐드라마 제작 과정이 보여주는 생생한 현실의 구체적 형상이 잘 조화를 이루고 있다. 주요 등장인물들의 성격과 갈등은 선명하나 그 성격과 갈등이 새롭지 않다는 아쉬움을 남긴다. 결말 또한 휴먼을 다룬 드라마에서 접하기 쉬운 것이어서 아쉬움을 더한다.

키다리 아저씨 행방불명은 등장인물의 성격이 잘 살아 있고, 주어진 사건의 상황 및 전개가 흥미롭다. 하나의 사건에 등장인물 각각의 입장을 드러내며 긴장감 있게 전개한다. 주 무대와 가려진 이면무대의 활용도 적절하다. 그러나 서사가 제대로 무리 되지 않았으며, 그 주제 또한 또렷하게 부각되지 못한 단점이 있다.

 

<dOnut>은 단막극 분량으로서는 긴 편에 속하나, 신인다운 패기와 신선함을 갖추고 있다. 도입부에서 인물들의 '양식화 된 대사와 행위'가 자못 서툰 솜씨로 읽혀질 수 있으나 초반을 넘어서면서 '도넛'이라는 상징물에 세상의 여러 시각과 기준, 잣대와 세계괸을 투영하는 솜씨가 매우 발랄하고 신선하다. 반복되는 대사로 인해 긴장감과 템포가 다소 늘어지는 면이 있긴 하나, 등장인물들 간에 '사실적이진 않으나' 양식화된 극중 전개와 논리 방식 안에서 개연성을 획득하는 관계 맺음이 인상 깊다심사위원들은 세 작품 중에서 <dOnut>올 당선작으로 결정하는 데 이견이 없었다. 앞의 두 편에 비해 소재, 구성, 주제의 측면에서 신선했다. 작가의 문제의식, 상징의 능숙한 활용, 어느 정도 안정된 극작술은 심사위원들에게 믿음을 주었다. 작품의 단점을 보완한다면, 좋은 공연이 되리라 기대한다. 아울러 이번 신춘문예에 투고해준 모든 응모자들에게 감사의 말을 전한다. 분발하여 다음 기회에 도전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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