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희곡

하이네 뮐러 '황폐한 물가 메데아자료 아르고호 사람들이 있는 풍경'

clint 2016. 3. 8. 19:00

 

 

 

 

 

 

동방의 나라 콜키스의 왕 아이에테스의 딸. 따라서 일신(日神) 헤리오스의 손녀, 키르케의 질녀에 해당한다. 이아손이 황금의 양모(羊毛)를 찾아서 콜키스에 왔을 때, 그를 사랑한 메디아가 양털을 찾아 주고 함께 콜키스를 탈출하였다. 아버지와 함께 그녀를 뒤쫓아오는 동생을 잡아죽여 갈갈이 찢어 뿌림으로써 아버지의 추적을 벗어났다. 이아손과 결혼하여 그의 고향인 이올코스에 갔을 때, 이아손과 그의 아버지 아이손의 적인 펠리아스를 살해하기 위해 펠리아스의 딸들에게 재생의 마법을 보여주었다. 그녀의 마법을 믿은 펠리아스의 딸들은 아버지를 칼로 썰어서 끓는 가마솥에 넣고 살아나기를 기대했으나 펠리아스는 되살아나지 않았다.
그 뒤 메디아는 이아손과 함께 코린트로 도망간다. 코린트에 와서 이아손이 국왕 크레온의 딸을 아내로 삼으려고 하자, 메디아는 마법을 써서 왕녀와 국왕을 죽이고 자기 자식까지 죽임으로써 남편에게 보복한 후, 아티카의 왕 아이게우스 곁으로 갔다가 다시 아이게우스와 함께 아테네로 떠난다. 한편 에우리피데스가 코린트에서의 메디아의 비극적 운명을 《메데이아》에서 다루었고, 이것을 바탕으로 세네카가 다시 《메데아》라는 작품을 썼다.
1982 하이네 뮐러는「황폐한 물가 메데아자료 아르고호 사람들이 있는 풍경」을 썼다.

 

메디아의 어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비판자’ ‘알고 있는 자’라는 뜻이 있다고 한다. 현실 속에서 어쩔 수 없이 예쁘고 공손한 모습으로 남자의 소유로 살아가기를 인내하는 여성들에게 있는 그대로 주체적인 자신의 삶의 길을 알려주는 인물이다. 독일 작가 하이네 뮐러의<황폐한 물가 메데아 자료 아르고호 사람들이 있는 풍경>에는 메디아가 아이들을 죽인 이유가 아이들이 ‘남자의’소유이기 때문이며 메디아 자신도 ‘남자의’ 소유물에 그치므로 그 ‘남자의’ 세계에서 벗어나기 위한 길로 바로 자신과 혼연일체인 자식을 죽인다는 것이 아주 확연하게 드러나 있다.
기호와 상징, 시각적, 청각적 이미지를 이용한 상상력의 확대 - 이는 잘 짜여진 플롯과 줄거리에 의존하는 기존의 보편적인 사실주의 연극에서 탈피하고 새로운 표현 양식을 추구하는 현대 연극이 지향하는 작업방식이다. 이러한 연극은 연극이 끝난 뒤에도 계속되는 관객의 깊은 성찰을 요구하고 그 과정에서 관객을 예술의 단순한 소비자가 아닌 예술의 공동 생산자로 끌어올린다. 극단 그림연극의<메디아>(이현찬 작,연출)는 이같은 시도를 보여주는 한 가지 예이다.
<메디아>-는 조국과 가족까지, 모든 것울 버리고 선택한 남편 이아손의 배반에 두 아들을 죽여 복수하는 메디아의 비극적 이야기를 권력과 욕망의 폭력으로 순환하고 있는 역사에 대한 비판으로 풀어낸다. 무대는 죽음과 피의 이미지로 가득 차 있다. 확대된 해골을 연상시키는 거대한 손과 기형적 얼굴이 무대의 좌우에 배치된 가운데 무엇인가 흰 천에 덮여서 서있다. 여기에 알 수 없는 신호음, 그리고 천둥과 함께 점차 증폭하는 폭우 소리가 극장을 뒤덮는다. 흰 천으로 덮여있던 것들이 움직이기 시작하고 이들은 골 얼굴없는 흰 가면에 방독면을 쓴 인물로 나타난다, 흰색과 검은 색의 대비 속에서 생명이 사라진 세계, 암울한 미래가 보인다. 이 같은 죽음의 배경 앞에새 그들이 춤을 이용한 몸의 언어로 말하고 있는 것은 권력과 성(性)을 포함한, 인간의 무분별한 욕구로 가득 차 있는 혼돈의 현재이다. 얼굴이 없던 그들이 스스로 눈과 입을 그린다. 잘못 흘러가고 았는 현재의 역사를 보고 발할 눈과 입이 필요하다. 그러나 현대인들에게 그러한 눈과 입이 있는가? 이 무대가 던지는 첫 번째 질문이다. 여기에 스피커에서는 누구인지 알 수 없는 남자의 목소리를 통해 하이너 뮐러의 텍스트가 울려나온다. 압축된 인어와 3개의 독립된 징면으로 구성된 뮐러의 「황폐한 물가 메데아자료 아르고호 사람들이 있는 풍경」중 첫 번째 장면,「황폐한 물가」의 텍스트 일부가 이용된 것이다. 죽은 나뭇가지가 널려 있고 물고기 시체들과 똥덩어리, 콘돔갑이 떠다니는 황폐한 호숫가를 배경으로 찢짓어진 월경대에서 억압당한 콜키스여인들의 피를 보고 살아남은 자들에 의해 더럽혀진현해의 역사를 옹시하며 신화 속에 내재하는 폭력구조와 현재의 역사를 연결하고 있는 뮐러의 이 텍스트는 이 무대가 그려내고 있는 현재와 미래의 암울한 역사구조를 더욱 강렬한 이미지로 상승시킨다. 이 같은억압과 폭력의 역사구조 속에서 한 여성이 무대의 중앙 계단에 잉태했던 것을 낳아 놓는다. 붉은 천으로 싱징화된 이것은 혼돈의 현재에서 새롭게 태어난 생명(역사)일 수도 있으며 억압당한 자들의 흔적(피)일수도 있다.<메디아>의 1부, 프롤로그는 이처럼 철저하게 폭력과 혼돈으로. 기형화한 현재와 그로 인해 죽음의 흔적만 발견하게 될 미래의 어두운 모습을 그려낸다. 이 죽음과 피의 이미지는 마지막 3부, 에필로그에서 무대 좌우에 배경처럼 걸려있던 거대한 손과 얼굴이 빗소리와 함께 죽음의 사신처럼 관객을 향해 덮쳐 오고, 무대 앞에서는 8개의 흰 가면이 생각에 잠긴 채 피를 쏟아내는 것으로 연결되어 극 구조 상 하나의 틀을 형성한다. 현재와 미래는 죽음의 어두운 그림자와 피로 드러난다. 결국 죽음과 피의 혼적으로 얼룩져 있는 어두운 역사는 반복되고 있다. 이 잘못된 역사의 순환을 인식하고 이에 저항할 힘은 어디에 있는가?

 

 

신화 속의 인물 메디아가 그 힘을 보여 준다.<메디아>의 2부는 남편 이아손의 배반에 두 아들을 죽여 복수하는 메디아의 이야기이다. 크레온왕의 추방 명령.권력을 얻기 위해 크레온의 딸 크레우사와 결혼하는 이아손, 독이 묻은 신부복을 보내 크레우사를 죽이고 두 아들까지 죽이는 메디아의 이야기가 1부와 3부의 강렬한 시각적, 청각적 상징으로 가득 찬 무대 사이에 하나의 줄거리를 가지고 삽입되어 있다. 2부가 갖는 가장 큰 상징성은 메디아의 복수에 있다. 이 이야기의 전개 과정에서 그려지고 있는 것은 야만적인 국가 콜키스 출신의 메디아와 문명국가 코린토스의 왕 크레온과의 관계에서 드러나는 야만과 문명의 대립, 왕족과의 결혼을 통해 권력을 얻으려는 이아손을 통해 드러나는 역사의 권력구조와 남성중심의 가부장제 전통에서 드러나는 억압구조이며, 이를 인식한 메디아의 복수 행위는이와 갈은 잘못된 역사구조에 대한 저항으로 읽혀진다. 메디아가 모든 복수를 마친 후 자신 앞에 서 있는 이아손을 보며 유모에게 묻는 말, "유모, 이 남자를 아세요?"라는 질문은 억압과 폭력의 역사를 인식하고 역사의 잘못된 흐름을 바꾸려는 주체의 존재 표현이다. 연출자 이현찬은 이 이야기를 앞서 언급한 하이너 뮐러의 작품 중?두 번째 텍스트「메데아자료」를 통해 들려준다·. 뮐러의 이 텍스트는 처음의 메디아와 유모의 대사, 그리고 마지막 이아손과 메디아의 짧은 대사를 제외하면 폭력의 역사에 대한 주체석 인식과 적극적 저항이 철저하게 시적으로 압축되어 있는 메디아의 독백 텍스트이다. 이 텍스트를 이용하면서 메디아의 복수 과정을 그리그 있는 2부는 이 공연의 중심부에 해당한다. 그럼에도 이 공연의 취약점은 2부에 드러나 있다. 어차피 메디아와 관련된 신화의 내용을 관객들이 이미 알고 있음을 전제로 그 내용을 폭력과 억압의 순환이라는 역사 구조에 비유하여 상징화하고 있는 이 공연은 메디아의 복수 과정 자체보다는 메디아의 복수가 갖는 의미, 그리고 그 의미의 확장에 초점을 맞추어야 했다. 메디아의 복수 과정을 자세하게 이야기하다보니 뮐러의 압축된, 텍스트에 줄거리 전개를 위한 연출의진부한 텍스트가 삽입되었고 이것이 상징의 강한 힘을 앗아가는 역효과를 낳았다.

 

관객에게는 하나의 볼거리로 보일 수도 있었겠으나 그림자 극으로 처리한 이아손과 크레우사의 첫날 밤 장면은 작품 전체가지니고 있는 상징성 관계에서 불일요한 장면으로 보인다. 이 장면은 메디아가 보낸 신부복을 입고 크레우사가 죽음을 맞이하는 단순한 내용 이외에 아무 것도 보여주지못했다. 또 한 가지 2부에서 아쉬운 부분이 있다면 2부의 시작에 인형으로 처리한 두 아들이 등장한 장면이다. 두 아들을 인형으로 처리한 시도 자체는 관객들로 하여금 또 다른 상징 매체를 통한 상상력 확장의 기회를 만들어 주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막간극으로서, 죽음의 현재와 미래라는 결론을 내고 있는 이 공연의 3부를 뒷받침 해 줄 수 있있던 이 장면은 분명한 메세지를 전달해 주지 못한 채 불분명한 인형의 움직임으로 남고 말았다. 1부와 3부와는 대조적으로 밝은 리듬의 음악과 함께 등장한 두 인형,?즉 두 아들이 이 작품에서 차지하는 위치는 어디에 있는가. 밝은 배경음악이 알려주듯 두 아들은 아직 자라지 않은 아이들로서 미래를 의미한다. 그리고 이들이 딸이 아니라 아들이라는점에 주목해야 한다. 메디아는 이 아들을 죽임으로써 남성 중심의 역사, 그 역사가 끊임없이 만들어낼 폭력의 역사를 종식시키고자 하는 것이다. 이 장면은 명확하지 않은, 무엇인가 어떤 놀이를 하는 두 아들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으로 끝나 버렸는데 그 놀이 속에 폭력과 억압의 이미지가 상징을 담음으로써?또다시 암울한 미래의 역사가 계속될 것이라는 강력한 전달력이 표출되었어야 했다. 이러한 상징성이 분명히 드러났더라면 이 장면은 작품 전체의 주제를 압측해 전달해줄 수 오는 코드로서 효과적인 막간극이 되었을 것이다.
1부와 3부에서 보여준 다양한 상징과 기호의 시도, 그리고 풍부한 볼거리로 의욕에 넘친 무대였음에도 불구하고<메디아>는 메시지 건달을 위한 코드의 부재, 안무의 평이함에서 오는 지루한 움직임. 그리고 2부의 늘어진 줄거리 전개 등으로 인해 강한인상을 주지 못했다. 텍스트 사용에서 보듯이 전체적으로 철저히 하이너 뮐러의 시각에 따른 공연이었고, 강한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는 과감한 움직임과 연출의 독자적인 해석이 아쉬운 공연이었다. 이 실망은 전적으로 이 작품이 "이현찬 작"으로 발표된다는 사실에 가졌던 기대에서 기인한다. 연출은 하이너 뮐리의 텍스트를 "인용"한다고 했다. 인용은 단순히 가져다 쓰는 것에서 그치는 일이 아니다. 인용을 자신의 극작법중 한 가지로 효과적으로 이용한 뮐러에게서도 볼 수 있듯이 인용은 의미의 확장과 새로운 해석의 결과로 나타날 때 진정 예술가 고유의 표현방법으로 그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다.
<황폐한 물가>,<메데이아자료 아르고호 사람들이 있는 풍경>,<아르고호 사람들이 있는 풍경>이 세 편의 독립된 장면으로 이루어진 《황폐한 물가 메데이아 자료 아르고호 사람들이 있는 풍경》은 1982년에 완성했지만, 상당히 오래전에 구상한 것이었다. 1983년, 보홈 사우슈필하우스에서 이 작품을 초연하고 난 뒤 한 대담에서 하이너 뮐러는 첫 장면인<황폐한 물가>가 30년 전에 쓴 것이고, 둘째 장면인<메데이아 자료 아르고호 사람들이 있는 풍경>은 절반이상이 15년 된 텍스트이며 새로 쓴 것은 마지막<아르고호 사람들이 있는 풍경>뿐이라 밝힌 바 있다. 이는 메데이아 신화를 통해 파악한 현재의 역사적 상황 에 대해 뮐러의 인식이 오랜 기간, 시대가 변하면서도 바뀌지 않았음을 보여 준다. 하이너 뮐러가 이 신화에서 본 핵심은 “이아손 이야기가 식민화에 대한 최초의 신화”이며 자기가 탔던 배에 머리를 맞아 죽는 이아손의 종말은“ 신화에서 역사로 전이, 그 문턱을 표현한다. 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 뮐러에게 이아손은 "신화에서 역사로 넘어가는 문턱에서 자기가 탔던 것에 의해 맞아죽는 최초의 식민지 개척자”였다. 뮐러는 이를 역사와 관련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유럽 역사는 지금까지 그렇게 진행되어 왔듯이 식민화와 함께 시작된다. 식민화의 차량이 식민자를 때려죽인다는 것은 먼저 그 식민화의 종말을 가리킨다. 이는 우리가 직면해 있는 종말의 위협이다. "성장의 종말"인 것이다.

 

 


이로써 이 작품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분명해진다. 정복자인 이아손을 비롯한 아르고호 원정대와 그의 피정복자였던 메데이아 이야기를 통해 역사의 억압구조, 그 반복으로 인한 인류의 종말을 경고하려는 것이다.
어느 날 슈트라우스베르크 부근에 있는 호수에서 아내 잉게 뮐러와 수영을 하면서 뮐러가 보았던 것들이 구체화된 첫 장면은 먼저 암울한 역사상황을 암시하는 황폐한 자연 환경과 더불어 정복자들에 의한 억압의 흔적들을 보여준다. 극이 펼쳐지는 장소와 시간을 나타내는 지문인 첫 두행,"슈트라우스베르크부근의 호수, 황폐한 물가/ 이마가 납작한 아르고호 사람들의 흔적”이 점차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피사체, 즉 호수 "물가" 흔적의 분석적인 3단계 접근에 따라 이어지는 광경은 성장이 멈추어 버린, 죽어 있는 역사의 모습이다. 파괴된 자연의 메타포, 삭아 버린 갈대와 죽은 나뭇가지, 물고기 시체, 그리고 더 이상 자라나지 않을 나무는 역사의 파괴적 상황, 죽음의 풍경이다. 호수와 육지 사이의 경계인 물가는 신화의 시간과 현재 시간의 경계로서 파괴와 폭력, 그리고 죽음의 역사적 흐름이 신화적인 과거의 지나간 역사에서 현재로 넘어 들어오고 있음을 보여 준다. 남성 전유물인 콘돔갑과 담뱃갑이 쓰레기로 널려있고, 찢어진 월경대가 보인다. 월경 혈을 정복자에게 유린당한 콜키스 여인들이 흘린 피와 동일시한다면, 여기에서 하나의 대립적 관계가 드러난다. 즉 지배자, 정복자로서 흔적을 남긴 아르고호 대원들과 정복당한 피지배자 콜키스 여인들의 대립관계가 그것이다. 이는 지배자인 남성과 피지배자인 여성이라는 대립관계를 명확하게 보여주는 것으로, 이 대립 관계는 신화의 경계를 넘어 일상의 현재로 이입된다.
"그들은 기차 안에 쪼그리고 앉아 있다 바지 안엔 번들거리는 좆 싸구려 일간지와 침으로 이루어진 얼굴들이 3주간의 주급이 들어가는 하수구 덕지덕지 찍어 바른 살덩이를 응시한다. 그 칠이 터져버릴 때까지 그들의 여자는 먹을 것을 따뜻하게 내어놓고 이불을 창가에 내걸며 일요일 외출복에 붙은 토한 찌꺼기를 솔질해 털어낸다 하수관 벌레들이 행진한 대가로 아이들을 싸질러 낳으면서..."
남자들은 여자들을"3주간의 주급", 비싼 돈을 지불해야 얻을 수 있는 “하수구”, 성적쾌락의 대상으로 바라볼 뿐이다. 여자는 창녀일 뿐이고 종족 보존과 재생산 도구로 전락해 있다. 여기에 "시체 보관소에는/ 피범벅이 된 여자들"이 앞의 "찢어진 월경대 콜키스 여인들의 / 피”와 연결되어 폭력과 야만의 역사를 드러낸다. 이렇듯 남성과 여성의 지배 - 피지배 관계로 죽어 있는 억압의 역사가 존재한다. 이 암울한 역사의 장소, "살아남은 자들에 의해 더럽혀진 땅- 에, 그 지배 구조에 대항하는 여성, 메데이아가 등장한다. 메데이아는 억압의 관습, 남성의 지배구조, 권력구조에 대항하는 존재를 상징한다. 이와 더불어 메데이아의 등장은 다음 장면이 신화 속에서 이루어질 것임을 암시한다.
다음 텍스트<메데이아 자료 아르고호 사람들이 있는 풍경>은 첫 장면에서 암시했던 메데이아 신화의 내용을 직접 이용하며 메데이아와 유모, 이아손과의 대화, 메데이아의 독백, 그리고 자식에게 하는 메데이아의 말로 구성되어 있다. 전체적으로 본다면 대화 중심의 전통적인 희곡 작법을 따르고 있으나 근본적인 구성은 메데이아의 독백으로 이루어진 시적 텍스트다. 메데이아와 유모, 이아손의 짧은 대화는 도입부로서 메데이아가 왜 지금까지의 역할을 거부하고 반란의 모습을 갖게 되는가에 대한 전제를 보여 줄 뿐이며, 초점은 메데이아의 자기 상황과 역할에 대한 인식을 드러내는 독백에 있다. 메데이아 텍스트는 그 방향이 이아손과 자식들에게 교대로 향하고 있어서 의미의 방향 전환이 상당히 자주 일어난다. 이를 분석해 보면 다음 다섯 가지 내용으로 크게 나누어 볼 수 있다.
1) 메데이아는 자신이 단지 이아손의 도구에 불과했던 과거를 회상한다.
2) 메데이아는 코린트에 적응하고 있는 자식들의 배반을 책망한다.
3) 메데이아는 이아손에게 화해를 가장해 그의 새 신부에게 자기 신부복을 선물한다.
4) 메데이아는 자신의 행위를 "나의 연극”, “희극”으로 규정하고 크레우사의 죽음을 조망대에서 관찰하는 형식으로 묘사한다.
5) 메데이아는 배반한 자식들에게로 복수의 방향을 전환해 자식들을 죽인다.
메데이아는 이아손이 콜키스를 탈출할 때 남동생을 죽여 그 시체 조각을 추적자들에게 던짐으로써 추적자들이 그 시체를 수습하느라 따라오지 못하도록 하여 이아손의 탈출을 돕고, 그를 따라 코린트에 왔다. 그러나 이아손은 메데이아를 버리고 코린트의 왕 크레온의 딸, 크레우사와 결혼하고자 한다. 메데이아는 사랑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했으나 이제 늙고 버림받은 여자에 불과하다. 이아손의 배반은 그녀를 절망으로 몰고 간다. 더욱이 미래를 상징하는 두 아들까지 이아손에 속해 있다. 두 아들은 메데이아에게 "배반의 열매', "배반의 자식들"일 뿐이다. 현재와 미래는 이아손의 것이다. 반면 메데이아에게 남은 것은 피비린내 나는 과거뿐이다. 이아손의 배반은 메데이아로 하여금 자기 위치를 자각하게 만든다. 여기에 두 아들의 배반으로 이루어지는 이중의 배반은 메데이아가 극단적인 복수를 하게 되는 근본적인 이유가 된다. 메데이아는 자신이 지금까지 이아손의 "여종”, "도구”, "암캐”, "창녀” 그리고 그의 명성을 위한 “디딤판”이었음을 자각하고 복수를 계획하며 자신의 정체성을 찾기 시작한다. "계집년, 내 앞에서 너는 도대체 뭐였지?" 이아손의 질문에 "메데이아 였죠" 라고 자기 이름을 분명히 밝히며 자신의 존재를 강조했던 메데이아는 자신이 잃은 것을 되찾고 자한다. 메데이아는 이아손에게 말한다. "당신은 나한테 남동생이란 빚이 있어요, 이아손.” 모두 세 번 반복되는 이 말은 이아손에게 자신의 죄를 인정하라는 요구인 동시에 그렇지 않을 경우 복수가 이루어지리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메데이아의 이 요구에 이아손은 두 아들을 줌으로써 그 빚을 갚았다고 주장한다. "나는 남동생에 대한 대가로 당신에게 두 아이들을 주었어." 이것은 폭력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남성의 야만적 논리다. 메데이아는 남성 지배세계에서 피지배자인 여성으로서 이 주장에 대항할 다른 방도가 없다. 여기에서 생겨난 메데이아의 무력감은 결국 죽음을 부르는 극단적인 복수로 이어진다. 메데이아는 첫 번째 복수로 이아손의 새 여자인 크레온의 딸에게 신부복을 선물한다. 이 옷은 독을 내뿜어 이아손의 새 신부를 태워 죽인다. 독은 이아손의 배반이 야기한 메데이아의 "상처와 흉터"가 만들어내는 것으로서 하수의 주체는 메데이아 자신을 넘어 이아손에 의해 파괴된 그녀의 정체성일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메데이아가 복수의 도구로 이용하는 이 신부복은 그녀의 파괴된 정체성을 상징하는 것일 수 있다. 이 끔찍한 복수를 보여주는 메데이아의 연극에 두 아들은 관객이 되어야 한다. 이제 메데이아의 복수는 자식들을 향한다. 메데이아는 두 아들을 죽인다.
복수로 끝맺는 메데이아와 이아손의 관계는 먼저 남성과 여성의 상하관계로부터 지배와 피지배구조로 발전되어 나타나는 역사구조의 일면이다. 정복자로서 이아손과 야만인으로서 그 지배하에 존재하는 메데이아의 관계는 이미 지배와 억압의 사회적 구조를 보여준다. 여기에 이아손이 자기 아내를 버리고 정략적으로 코린트의 공주와 결합하려는 모습은 남성에 의해 이루어지는 정치적 권력관계의 본보기다. 메데이아는 처음에 사랑이라는 이유로 이아손에게 굴종함으로써 주체와 객체 관계에서 스스로 객체의 위치를 인정한다. 이아손은 이러한 여자의 속성을 이용하는 것이며 여기에서 야기되는 이아손과 메데이아의 대립은 지배와 억압, 구속과 착취 관계를 드러냄으로써 역사적인 주객 관계를 구체화한다. 메데이아는 복수를 통해 이 불평등 관계를 지우고자 한다. 남성, 정복자의 역사에 대항하는 메데이아의 복수행위는 남성과 여성의 보편적인 성 역할 내지 성 규정을 극단적으로 폐지하려는 시도라 할 수 있다. 마지막 장면, 이아손이 메데이아를 부를 때, "유모 이 남자를 아세요" 라는 메데이아의 조소 섞인 물음은 그녀가 남성과 여성, 공동의 역사가 만들어 낸 지배와 피지배, 억압과 착취의 야만적인 역사구조를 의식에서이미 지워냈다는 표현이다. 메데이아는 남성이 가하는 폭력의 역사에서 어머니 역할을 포기하고 자식을 죽이는 극단적인 방법으로 저항하며 해방자로 남는다. 메데이아는 "남성중심의 야만적 역사의 연속성을 파괴하고 새롭게 태동하는 역사의 가상적 주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메데이아의 자각이 스스로의 인식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이아손의 배반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이다. 여성은 남성의 역사에 저항하지만 메데이아가 자식을 죽이는 자기 파괴 과정을 걷듯 폭력의 순환 구조는 사실상 진정 한 출구를 찾지 못하고 있다. 뮐러는 메데이아의 극단적인 복수 행위로써 이러한 야만적인 역사가 반복되는 것을 멈출 희망을 상징화하는 동시에 그 같은 역사적 상황은 여성과 남성 모두, 즉 인류 전체의 책임이라는 사실을 주지시키고 있는 것이다.
마지막 장면<아르고호 사람들이 있는 풍경>은 누구 인지 알 수 없는 어느 화자인 "나"의 목소리로 이루어져 있다. 첫째 장면<황폐한 물가>와 마찬가지로 이 장면 또한 구체적인 시간과 장소가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첫째 장면과 비교해 우선 구별되는 점은 이미 존재하고 있는 주변 모습을 보이는 대로 보고하던 첫째 장면의 화자와 달리 이 장면의 "나"는 자아를 비롯한 여러 대상에 대해 깊이 성찰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성찰은 주체에 대한 것으로 시작한다.
그러나 "비처럼 쏟아지는 새똥 석회 껍질 속에 나 그는 누구인가"라는 화자의 질문으로부터 그 존재가 누구인지, 두 가지 추측이 가능하다. 첫째, “새똥"은 첫 장면과 연결 가능성을 부여한다. 즉 “새똥”은 나무에 걸려 있는 아르고 호를 가리키는 “독수리들의 똥 자리”와 연결되고, 아르고호 밑에 누워 있다가 그 배가 떨어지는 바람에 그것에 맞아 죽는 이아손을 염두에 둔다면 "비처럼 쏟아지는 새똥" 속에 존재하는 "나"는 이아손이라 할 수 있다. 둘째, "나"는 자신을 움직이지 못하고 돌처럼 굳어 버린 코카서스 산 프로메테우스와 동일시하고 있다. "비처럼 쏟아지는 새똥 석회 껍질 속에 나"는 신들의 처벌로 독수리들에게 공격을 받으며 코카서스 산에 매달려 있는 프로메테우스를 상기시킨다. 그러나 여기에서 드러나는 프로메테우스의 이미지는 인간에게 불을 사용하는 법을 가르쳐 준 저항적 계몽자가 아니라, 그 저항 끝에 저항 정신을 상실하고 만, 역동성을 상실한 채 역사의 똥 속에 파묻혀 석화되어 버린 절망적 상황에 놓인 존재라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이 장면의 화자는 분명 남성이다. 그러나 화자인 이 남성은 이아손이나 프로메테우스 한 사람으로 규정할 수 있는 개인이 결코 아니다. 하이너 뮐러는 이 작품 말미에 붙인 주석에 "각각의 풍경에서처럼 이 셋째 텍스트의 나는 집단적이다”라고 분명히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따른다면 첫 장면의 화자, 둘째 장면의 메데이아와 이아손의 목소리 또한 집단의 목소리다. 결국 이 마지막 텍스트의 목소리는 파국적인 세계역사의 상황을 고통스럽게 경험한 집단의 목소리다. 다시 말해 문명 발달이 가져다준 인류에 대한 위협, 그리고 그 절망적 미래를 만들어 낸 현대의 우리 자신을 스스로 심문하는 목소리 일 수 있다. 이는 주체의 소멸과 예술의 위기, 그리고 전쟁으로 인한 인류의 파멸을 경고하는 성찰의 목소리로 구체화한다. 첫째 장면<황폐한 물가>에서 제시했던 죽음의 풍경은 계속되고 있다.
인간이 스스로 만들어 놓은 이런 환경에서 주체는 사라 져 있다. "나”는 스스로 움직이는 주체가 아니라 “바람을 전제로” 겨우 펄럭일 수 있는 "피로 물든 넝마조각”, 또는 "배설물”에 지나지 않는다. "피로 물든 넝마조각”과 "배설물"에서 인식할 수 있는 것은 억압당한 존재다. "나"는 억압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때문에 "나”는 자신에게 붙여진 이름에 대해서도 불안할 수밖에 없다. 이는 끔찍한 일이다.
"나”는 끊임없이 억압 상황을 본다. "죽은 자들이 바닥에서" 있고 "죽은 흑인들은 / 늪 속에 말뚝이 박혀 있듯” 존재한다. 이들은 모두 억압당한 지들의 모습이다. 움직임의 능력을 박탈당한 정지 상태, 역사의 죽음이다. 전쟁과 물질문명의 소비 구조는 절망적인 미래와 연결된다. 과거 "탱크전에 대한 기억”에서 출발해 "폐허와 건물의 파편 사이"를 통과하면서 "나”는 그 파괴된 역사 공간에서 "새로운 것”이 자라나는 것을 보지만, 그것은 진정한 발전을 위한 새로움이 아니라 상품으로서의 성을 포함한, 더욱 커져 가는 소비구조와 그 안에서 획일화해 가는, 주체적인 사유 능력을 상실한 현대인일 뿐이다.
이 작품은<호라치 사람>과 마찬가지로 전통적인 희곡형식을 파괴하고 해체하여 하이너 뮐러의 실험적 시도가 철저하게 이루어진 텍스트다. 또한 순탄치 않았던 부부관계, 여행에서의 경험, 실제로 꾸었던 꿈 등 뮐러의 개인적인 체험이 성찰로 구체화된, 말하자면 체험을 토대로 하는 뮐러의 극작형식을 다시 확인시켜 주는 텍스트다. 뮐러가 본 오염된 자연환경은 종말론적인 문명의 마지막 단계로, 부인 잉에와의 갈등은 남성과 여성의 대립, 지배와 피지배의 권력관계, 역사의 억압 구조로 확장되어 있다. 개인적인 체험을 통해 시작된 인류와 역사에 대한 이 같은 성찰은 이름 없는 어느 남성 화자의 목소리 사이에 여성 메데이아의 목소리를 배치해 남성과 여성의 대립적 위치를 상징적으로 구현하고, 치료 가능성이 없어 보이는 문명 세계에 대한 절망적 시각을 독립된 언어의 조각들로 조립해 놓은 시적 스케치로 다시 태어났다. 따라서 이 언어의 조각들 자체가 갖고 있는 독립적인 이미지들 사이에, 그리고 그 조각들의 충돌을 통해 새로운 풍경들이 만들어진다. 말과 말 사이, 신화와 일상 의 현재 사이, 그리고 장면과 장면 사이에 벌어진 틈, 빈자리, 그곳에 엄청나게 확장된 상상의 스크린이 펼쳐져 있다. 그 스크린을 채우는 그림은 보이는 동시에 들린다. 그림을 들려주고 목소리를 그려 주는 텍스트 - 이 짧은 연극 텍스트는 그림의 울림과 소리의 풍경을 담아내는 새로운 경험의 자리를 마련해 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