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희곡

피터 바이스 작 '마라 사드,

clint 2016. 1. 15. 20:16

 

 

 

 

 

세기의 예술가 피터 바이스 원작, 피터 부룩의 연출로 1966년 브로드웨이에서 공연되어 연극계 최고의 상인 토니상 작품상을 수상했던 작품이 "마라와 사드"이다. 이작품은 잔혹극이라는옛 장르의 독창적인 새로운 방식으로 활용하여 성 페테르스부르그 페스티벌에서"최우수 작품상"을
수상했고, 프랑스 아비뇽페스티발, 홍콩예술제, 일본시즈오카 예술제 등 세계 유수의 페스티발 뿐만 아니라 미국과 유럽의 수많은 도시에서 격찬을 받은 세기의 걸작이다.

 

 

 

1964년 브룩은 세계의 주요감독 중 하나라는 그의 명성을 확실하게 굳혔다. 왜냐하면 이 해는 그의 런던 로열 셰익스피어 극단이 피터 바이스의<THE Sade de Marquis the of Direction under Charenton Asylum Inmates by performed as Marat Paul Jean assasination and Persecution>때문이다. 여기서 브룩은 그동안 그가 기울였던 노력으로부터 결실을 보게 된다.<리어왕>과 브레히트와 아르또라는 너무나도 다른 스타일을 혼합해 냈던 잔혹연극 훈련 덕분이었다. 브룩의 천재성은 브레히트의 객관적 연극이 주는 소외효과와 아르또의 주관적 접근이 주는 감정의 회오리 바람 사이의 연관성을 찾아냈고 작품에 생명력을 불어넣었다. 그리하여 많은 사람들이 그의 이 작품을 고든 크레이그의<MOSCOW Hamlet>, 막스 라인하르트의<기적>, 마이어홀드의<THE General Inspecter>, 박탕코프의<투란도트>그리고 그랜스빌 바커의<한여름밤의 꿈>(브룩 연출의<한여름밤의 꿈>은 흔히 이러한 거장의 작품들과 함께 거론된다)와 나란히 현대 연극역사의 하이라이트로 기억한다. 브룩은<마라/사드>에는 엘리자베스 시대의 드라마에서 발견할 수 있는 비슷한 흥분, 경험과 시가 농축되어 있다고 생각했다. 브룩은 이 연극의 스타일이 브레히트적이면서 아르또적인 것의 혼합이라고 생각했고 이 둘이 갈등관계에 있다고 생각치 않았다.

나는 (그가 쓰기를) 삶처럼 연극도 인상과 판단의 이어진 갈등으로 이뤄져 있다고 생각한다 - 환상과 비환상이 힘들게 공존하고 그 둘은 서로 분리될 수 없다고.<마라/사드>는 턱을 고이고 있는 관객을 깨게 하고 얼음물을 끼얹고는 그에게 일어났던 일이 무엇이었는지를 이성적으로 생각토록 하고 그 다음엔 그를 발로 차고서 그의 감극들을 다시 돌려준다.

 

 

 

 그 연극 전체의 제목이 암시하듯<마라/사드>는 한 정신병자 수용소에서 수감자들이 동료 수감자 사드의 감독으로 공연한 연극(1808년에)에 관한 작품이다(브룩에게는 패트릭 마기가 연출한 것이 모델이 되었다). 정신병자가 혁명적인 마라(런던에서는 클라이브 르빌이 그리고 미국에서는 이안 리차드슨이 연기)를 연기한다. 그는 심각한 피부병 때문에 욕조 안에 있다. 여기서 아무리 피를 흘리더라도 전체주의적 통제는 필요한 것이냐에 관해 추상적 철학적 토론에 대한 근거가 제시된다. 논쟁의 승자가 누구인가 하는 것에 대하여 광장한 논란을 일으켰으나(마르크스주의 작가들은 마라에게 손을 들었다) 그 작품과 공연은 정치적으로 양면적이었고 그것의 연극적 기회주의적 색채가 너무 강하여 각계의 비평가들은 그 작품이 회피적이며 궤변적이라고 생각했다.

배우들은 극중극 형식을 띤 그 작품에서 놀랍도록 사실주의적 방법으로 다양한 수준의 정신병을 연기했다(브룩은 정신과 의사인 그의 형으로부터 도움을 받았다). 그러나 대본의 그 연극적 쿠데타에 대해 너무나 광범위하게 허용했기 때문에 리허설 중에 그들은 즉흥적으로 연기했다. 마가렛 크로이든에 따르면 바이스의 텍스트에서는 "모든 것이 정당화될 수 있었다. 그리고 모든 것이 교체될 수 있었다. 머리카락은 채찍, 칼, 성기, 욕조, 영구차가 될 수도 있었다." 브룩은 상징적 연기를 창조해 내는데 천재성을 발휘하여 다음과 같은 장면을 고안해 냈다. 앞무대에서는 피트로 정신병자들이 머리만 내밀고 고개를 홱홱 내젖고 있고 뒤쪽에서는 정신병자들로 하여금 나무로 만든 셔터를 쿵하고 닫게 함으로써 단두대가 주는 효과를 만들었던 것이다. "처형"deofid이라는 주제적 암시를 부각시키기 위해 여러색으로 된 피가 깔때기로 부어진다. 민중들에게 빨간색, 귀족계급에겐 파란색, 지식인들에겐 하얀색. 가장 논란이 일었던 장면은 마라가 욕조 밖으로 나와 아무 것도 입지 않은 그의 엉덩이를 관객들에게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1964년에 이러한 것은 충격적인 행동이었던 것이다. 극이 끝나갈 즈음엔 정신병자들은 관객들에게도 폭력을 휘두를 것처럼 위협하면서 소리를 지르며 무시무시한 실제 상황을 방불케 하는 폭동을 일으켰다. 결정적 순간에 누군가 무대로 올라와 호루라기를 불면 모든 동작이 정지된다. 그리고 나서 배우들은 조용해지면서 가면을 벗는다. 관객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박수를 치기 시작하고 배우들도 천천히 박수를 친다 - 관객들로 하여금 시각을 돌려 그 일을 다시금 숙고하게 하면서. 브룩은 떨떠러름한 결말에 이르기까지 아르또 - 브레히트의 변증법을 사용했던 것이다.

 

 

 

 샤랑통 정신병원의 황자들은 사드후작의 지휘 아래 환자들의 교화 차원의 방편으로 연극을 준비한다. 프랑스 대혁명의 급진 개혁파의 선두주자인 장 폴 마라가 암살되기까지의 과정을 진행하면서 예기치 못한 상황들이 발생하는데…. 페터바이쓰가 밝힌것처럼 그는 항센, 헤세, 카프카, 헨리 밀러 등에게 문학적으로 사숙한 반면 연극적으로는 프랑스 쉬르레알리즘 연극이라든지 아르또의 잔혹극등에 심취했던 흔적이 있다.. [마라 와 사드]의 문체가 “자유 운율”과 “크뉘텔-페어스”(한줄에 4강음을 가진운율)가 뒤섞이는 가운데 시적인 분위기와 마음속의 이미지 풍경이 표출 되는가 하면 더불어서 속어와 일상적인 표현이 구사된다.. 이 작품 속에서 연출을 담당한 “사드 후작”과 그것을 논평하는 “쿠울미에 원장”…. 샤랑통 정신병원에서 저마다 역할을 배정 받는 환자들은 마라의 암살이 벌어진 1793년을 13년 거슬러 올라가 재연한다…

 

 

 

페터 바이스 (petter weiss 1916.11.8~1982.5.10)
오스트리아령 헝가리출신에다 체코의 시민권을가진 유태인!!직물공장 공장장인 아버지와 스위스 바젤 출신의 능력있는 배우였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태어날때부터 역설적으로 국적을 초월한<세계시민>이었으며 방랑의 구스모 폴리탄이었다.페터바이쓰는 전후의 독일 문학집단인<그룹47>의 일원이 되어소설, 방송극,희곡 등을 발표하고 스트란드 베리의 작품번역등을 통해 이민 작가로서 때때로 서독을 방문하는 방식으로 독일 식자들 사이에서 알려지게된다...그러던 페터바이쓰가 하루아침에 전국적인 작가 더 나아가 세계적인 작가로 각광받게 된것은 그의 나이 48살이던 1964.4.29 서베를린 시립 쉴러 극장에서 개박된 [마라와싸드]연극때문이었다..이 작품으로 그는 고발의 작가,기록의 작가,비판의 작가로서 그리고 사회주의 토론의 사회 참여작가로서 명성을 확고히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