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희곡

배진아 'One More Time'

clint 2015. 11. 24. 10:02

 

 

 

당선소감
"우물쭈물하다 내 이럴 줄 알았다.” 버나드 쇼의 묘비명이다. 대학교에 갓 입학한 후 처음 듣는 전공수업에서 추도사를 쓰는 과제물이 있었다. 수많은 과제물 덕에 친구들은 우스갯소리로 ‘내 자신을 죽이고 싶은 심정’이라고 이야기했을 때 문득 누군가가 나에 대한 추도사를 쓴다면 무어라 말해줄까라는 상상을 해보곤 했다. 살아가면서 누군가에게 평가를 받는다는 것은 참으로 기대되기도 하고 민망한 것은 사실이다. 글을 쓰는 것도 그래서 두려웠던 적이 있었다. 이리저리 피해보고 도망도 가보았지만 결국 다시 돌아온 것은 처음 내가 있었던 자리다. 방황하던 때 어머니께서는 “어떤 일에서든 자신을 한 번 이겨보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자신감이 생긴다.”는 말씀을 하셨다. 나에게 있어서 ‘나를 믿는 것’이 나를 이기는 것이었다. 당선소식을 듣고 ‘이제 정말 시작’이란 것을 생각했다. 스스로에게 열심히 했다, 최선을 다했다고 거짓말할 수도 없게 말이다. 부족한 제자를 늘 곁에 두고 격려해주고 믿어주신 홍창수 교수님께 감사드립니다. 김명인·서종택·이혜원 교수님 주시는 큰 가르침 항상 감사히 배우겠습니다. 장성희·이옥수·박흥식·박라연·임정식 교수님 감사합니다. ‘오늘 나는 개를 낳았다’를 통해 만난 인연들이 연극에 눈을 뜨게 했습니다. 감사합니다. 고려대학교 문예창작학과 열정녀들, 동기, 선·후배들, 일반대학원 창작세미나 선생님들, 방송작가협회 교육원에서 만난 스터디멤버들, 마음으로 날 응원해준 친구들, 글 쓰는 내 모습이 가장 예쁘다는 와꾸까지 정말 사랑하고 고맙습니다. 항상 든든한 친구가 되어주고 채찍질하며 칭찬해주는 우리가족 아버지, 어머니, 내 동생 병진이 고맙고 사랑합니다. 마지막으로 저에게 큰 용기를 주시고 작품에 빛을 불어넣어주신 심사위원 선생님께 깊은 감사드립니다. 작가로서 발전해가는 모습으로 보답하겠습니다.
배진아 프로필

 

1986년 3월, 서울 출생
고려대학교 미디어문예창작학과/언어학과 졸업
고려대학교 일반대학원
문예창작학과 석사과정

 

 

 


심사평
희곡 분야에 본심에는 8작품이 올라왔다. 그중에서도 ‘바퀴’ ‘One more Time’ ‘강강술래’가 수작이었다.
‘바퀴’에서는 자아와 진리에의 추구의 도상적 기호로 바퀴를 활용하면서 등장인물의 갈등과 화해, 관념과 실천의 과정을 보여주었다. ‘강강술래’는 근원적 사랑의 모습을 따뜻하고 간결하게 형상화하고 있다.
그러나 무대화로 갈 경우 다양한 연극적 기호를 동원하여 관객의 공감각을 자극할 수 있는 장치가 미약하기 때문에 희곡 분야 당선작으로는 아직 부족하다고 판단되었다.
‘One more Time’은 윤회의 과정에서 닿을 듯 닿지 못하는 인연의 고리들을 무대의 다양한 기호를 통해 관객의 다양한 감각과 이성을 자극할 가능성을 지닌 희곡이다.
윤회는 반복 뿐 아니라 변증법적 지양도 가능하다는 암시를 작품이 선명히 보여줄 수 있었다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그러나 작품의 사상은 작가가 평생 발전시켜야하는 부분이므로, 당선작으로는 손색이 없다고 사료된다.
이상란: 서강대학교 교수,독문학 박사,연극평론가

 

 

 

내가 알기로, 배진아 작가는 원래 희곡 전공자가 아니다. 다시 말하자면 처음에는 희곡을 지향하지 않았다. 더 자세히 말해보자면 배진아 작가는 (이번에 된 대부분이 그렇겠지만) '희곡적 문법'에 익숙하지가 않다. 그 말은 즉, 자신의 희곡이 무대에 '어떻게' 펼쳐질 것인지를 판단하면서 희곡을 쓰기가 힘들다는 말이다. 이것은 '공연화'에 대한 문제이다. 연극 작업에 많이 참여해 본 이들은 자신의 희곡이 무대에서 어떻게 펼쳐질 지 어느정도 감이 온다. 그래서 보통 '어떻게 펼쳐질지'를 염두에 두고 작품을 쓴다. 이것은 어떻게 보면 '현실적'이고 어떻게 보면'제약적'이다. 무대를 알고 희곡을 쓴다는 것은 무대를 벗어나지 않는다는 점에서 훌륭하지만 어찌 보면 무대라는 제약에 갇힐 수도 있다는 말이다.
배진아 작가의 희곡을 처음 읽었을 때 나는 분명 이 작가가 '연극'을 했던 사람은 아닐거라는 생각을 했다. 오히려 이 작가는 '문학'을 하는 사람일 거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연극과 문학의 차이는 실은 별거 아니지만 편의상 나눔) 배 작가또한 최명식 작가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생각'을 '작품'으로 표현하는 타입인 것이다. (이번에만 한정해서!)내가 배우는 선생님들께서 늘 말씀하신다. 희곡은 '공연성'이 오십이면 '문학성'이 오십이라고. 내가 봤을때 배진아 작가는 오십의 문학성 중에서 오십을 모두 가지고 있다. 그 이유는 '자기 세계관'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문체,플롯, 이런거 말고 '자기 세계관'을 얼머나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문학성'이 결정된다고 생각하는데 배진아 작가는 분명한 자기 세계관을 가지고 있다. 문제는 '공연성'에 대한 부분인데, 난 사실 희곡을 읽으며 '이게 과연 공연 될 수 있을까' 라는 생각먼저 했다. '놀이동산'이라는 설정도 그렇거니와 범퍼카,롤러코스터,유령의집이 줄줄히 등장하는 설정이라니, 과연 한 무대에서 이게 자연스럽게 펼쳐질 수 있단 말인가. 장면에서 장면이 이동하는 그 사이사이를 어떻게 채울수 있단말인가라는 생각. 희곡의 '내용성'은 인저했으되 '공연성'에 대한 의문. 그게 내가 이 작품을 바라보는 관점이었다. 그러나 막상 공연을 봤을때, 나의 이런 의문은 말끔히 씻어졌다. 여러개의 큐빅만을 이리저리 활용하여 만들어내는 놀이동산,범퍼카,롤러코스터,유령의집이라니. 더군다나 배우들은 모두가 통일된 리듬과 동작으로 연기하고 있었다. 그들의 대사는 듣기 좋은 운율이 있었고 그들의 동작에는 춤적인 날렵함이 보였다. 연출님이 뮤지컬 관련학과의 교수님이라는 얘기를 나중에 듣고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래서 이런 리듬감이 나온거구나. 어찌보면 '무대'를 만들어내는데 있어서 이 작품이 가장 성공적인 '연극적 무대'를 만들어내지 않았나 싶다.
한가지 언급할 것은 이 작품에 대한 이해와 해석이 관객들 사이에 분분했다는 것이다. 작품의 결론을 모르는 것에 대한 분분함이 아니고 그 결론 자체에 대한 분분함이었다. 이런 반응이 맞냐 아니냐를 떠나서 이러한 '반응'이 나오는 것은 긍정적으로 생각된다. 공연을 보고 아무 생각 없이 나오는 것 보다는 '어떠한 반응'일지라도 '반응'이 나와주는 것이 더 성공적인 공연이니까. 다만 위험한 생각은 든다. '하나의 현실'에 대해 '하나의 결론'을 보여주려는 듯한 모습이 보일 때 관객들은 '도리질'을 할 수가 있다. 다만 아직까지 그런 내 의견을 강하게 어필하고 싶지 않은 것은 이 작품이 배진아 작가의 '첫 희곡 작품'이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그녀는 수업 과제의 일환으로 쓴거란다. 허허) 아직 그녀는 (긍정적의미로) '치열하게 쏟아붇지'않은 상태이고 이제 '더더욱 가다듬을 준비'가 되어 있는 상태이다. 그녀의 세계관은 아직 관객들에게 충분히 선보여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