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희곡

민새롬 '전방인간'

clint 2015. 11. 23. 22:54

 

 

 

 

 

 

말년휴가 마지막 날, 최웅재 병장은 그의 첫사랑이었던 친구를 만난다. 정상현 일병은 전출 가기 전 전투훈련에 한창이다. 둘은 사수와 부사수의 관계로, 경기도 포천의 한 전방부대의 작은 행정병 사무실에서 만나게 된다. 상현을 간절하게 기다렸던 웅재는, 마음과 성을 다해 후임병인 상현을 맞이하지만 잠시 그의 얼굴을 보고 동요한다. 상현 일병은 자꾸만 애인에게 전화가 걸려오는 사무실에서 업무를 보기 싫어한다. 그런 상현을 사무실에 붙잡아두고만 싶은 웅재는 그를 야단치려 하지만, 항상 상현을 받아줄 뿐. 둘의 인수인계가 한창이던 어느 날 밤, 상현은 고열로 쓰러지고, 웅재는 마음의 병이 심해진다. 웅재가 상현의 초병근무를 대신 서 주던 어느 날, 상현은 끔찍한 꿈을 꾼다. 단단해 보이기만 했던 상현은 웅재를 학대한다. 휴가복장인 웅재가 사무실에 들어온다. 잠에서 깨어난 상현은 조금 전의 상황이 꿈인지 현실인지 분간하지 못한다. 정신을 차리고 휴가준비를 하러 나가는 상현의 뒤로 전화기가 울리지만 상현은 전화를 받지 않고, 위병소로 걸어가는 웅재는 내리는 눈에 잠시 멈춰선다.


작품은 너무나 사실적이어서 사실 개인적으로 군대를 갔다 온 경험이 있는 사람으로서 그것들이 너무나도 실감나게 다가오는 것은 아닐까 하는 스스로에게 자기검열을 끊임없이 해야 했다. 즉, 이는 작품의 주는 즐거움이 단순히 남자여서 쉽게 공감하는 것인지 보편적인 층위에서 유효할 수 있는 작품인지에 대한 반문이었다. 어쨌거나 군대에서의 경험을 적극적으로 응용한 것 같은 탄탄한 현실 뒷받침의 대사들이 극의 단단한 포석이 되는 가운데 극은 중반 이후 빠르게 클라이맥스의 곡선을 타고 아드레날린을 분출해 내고 있었다. 오히려 초반의 대사들은 군대에 대한 직접적인 경험이 없다면 지루할 수도 있었다고 보인다.

 

 

 

지나치게 사려 깊고 친절한 최 병장과 그의 조수로 맞게 되는 지나치게 활달한 정 일병의 만남은 군대의 현실적 업무의 표피적 측면에서 곧 사회로 확장되는 그들의 내면이 반추되며 군대라는 외피를 벗고 군대라는 조건에 처한 인간의 치열한 반응들에 대한 탐색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사실 그 ‘지나치게’라는 말은 현실에서도 충분히 성립할 수 있는 캐릭터인지에 대한 것이었다. 군복을 입고 군대의 사무실을 상정하는 것은 군대에 대한 사실적인 배경을 제공하는 듯 보였지만, 소위 말년병장이라고는 하지만 이미 그 군대라는 위압적 계급 구조를 꿰뚫고 초월한 것 같은 병장의 모습과 그가 있는 부대로 배치된 이후 소위 군기가 금방 빠지고 적응하여 그 선임을 가볍게 비웃으며 옴짝달싹 못하게 하는 두 사람의 역전의 관계 이후부터는 엄연한 금기로 존재했던 군대 안의 조건들을 버리고, 두 사람의 깊숙한 관계에 치중케 되면서 그 조건들을 벗어나 있는 그들의 모습을 관찰하게 된다. 그렇다면 재현에서 극적 고양으로 치닫는 가운데 그 디테일한 군대의 일상들을 길게 앞에서 제시하는 것은 어떤 사족에 불과한 것일까? 약간은 그렇다는 생각도 들었는데, 캐릭터의 특성을 제시하는 것 이외에 다소 본론에 앞선 서두가 길고 재현 그 자체에 머물고 있는 측면이 커 보이는 게 사실이다.

 

 

 

 

전역을 한 달 앞둔 최 병장은 경리과에서 행정 업무를 보는데 주로 전화로 부대 상황 등을 전달받고 전하거나 부대에 부대원들의 월급과 보급물자 따위를 셈하는 것이다. 그가 있는 공간은 바깥과 단절된 지하 공간을 상정했는데, 곽 일병이 부대를 드나들며 닫힌 문-물론 그 밖은 보이지 않는다-을 열고 나갔다 다시 들어오는 것으로 약간의 숨통이 트이는 듯했다. 건조한 군대의 공기를 고스란히 재현하면서 군대 내 드러나지 않는 복잡한 군인들의 심리 상태가 튀어나오도록 하는 것은 두 사람의 만남이 깊어지면서부터이고, 동시에 사회적 단서들이 조금씩 극을 비집고 들어왔기 때문이다. 교환병 동기를 둔 최 병장이 정 일병이 전입했을 때 애인에게 전화를 걸 게 해줬을 때 그를 기억하지 못하는데 나중에 마약으로 상태가 이상한 것으로 드러난다. 사실상 그녀의 목소리를 들을 순 없고, 전화를 받는 정 일병의 연기에서 모든 것이 드러나야 한다. 그렇게 사회와 차단된 상황에서 이중으로 가닿을 수 없는 사회적 현실과 몸으로 부딪치며 비슷한 일상을 구가하며 지속시켜 나가야 하는 건강한 군인으로서의 삶을 감내하는 것은 뭔가 답답하거나 유예된 삶을 살아나가는 것 같다. 최 병장은 업무뿐만 아니라 숙식을 하는 부대 내에서도 인정받고 싶어 하는 곽 일병에게 ‘적당히’ 하는 것이 중요하고 그렇지 않으면 다친다는 말로 그의 행동에 우려를 표하며 충고한다. 곽 일병은 그의 진정 어린 충고가 지나친 간섭으로 생각되고, 그를 힐난한다. 밀폐된 공간에서 시를 쓰고 음악을 듣는 것으로 사회에서의 삶의 거리를 완전히 차단하지 않는 최 병장은 정 일병의 말처럼 군대라는 사회에서 도피하여 완벽한 모범적인 병장의 모습을 유지한 채 자기 배설의 욕망에 기대 있는 것일 수도 있다. 군대에 있어 병장이 되면 사회에 나갈 시점이 가까워 오는 것이고, 이로써 최대한 몸을 사려 다치지 않고 나가는 것이 목적이 되는 시점이 생기기 시작한다고들 말한다. 군대라는 사회는 그 자체로 하나의 완벽한 공상의 세계를 구축하는 것 같지만, 사실상 단절의 형태를 띰에도 이십년 이상의 사회에서의 삶과의 간극을 완전히 해소할 수 없는 까닭에 그러한 이년 정도의 삶이 완전히 개인에게는 체화되는 형태로 나타나지 않는다. 어떤 이중의 의식을 취하게 되는 것인데, 소위 ‘열심히’라는 말보다는 ‘열심히 하는 척’(‘적당히’라는 말과 어느 정도 연계성을 지닌다)이라는 말에 더 맞게 행동하는 것이 현명하다고들 말하는 것은 그러한 이중의 의식과 가까워 보인다. 하지만 그 ‘적당히’라는 이 병장의 말을 벗어나 군대에서의 삶에 완전히 밀착하고자 하는 정 일병은 사실상 마약 한 애인의 사회로부터의 응답을 거부하는 것으로 이중의 삶을 회피하지만, 이는 일 년 정도 있을 사회에서의 삶을 한편으로 유예하는 것이기도 하다. 애인의 응답을 크게 화를 내며 전화를 끊는 것으로 대신하는 정 일병의 욕망은 스스로에 의해 차단되고 또한 반작용으로 드러나지만, 반명 최 병장의 욕망은 불확실한 공상의 형태로 드러난다. 처음에 여자 친구와 이별했다는 사실과 함께 그에 대한 애틋한 마음이 곽 일병에 대한 친절로써 나타난다는 것 정도는 감지되지만, 잘 때 귀를 만지는 군대 내에서 후임 괴롭히기의 악습 정도로 생각되는 행동이 그동안 이 병장에 의해 정 일병에게 행해졌음이 그것을 당하는 것을 모른 척 참아 왔던 곽 일병이 화를 내며 그 사실을 말함으로써 드러난다. 표피적으로는 도덕적으로만 보이는 최 병장이 부도덕한 잘못을 저질렀다는 것에 대한 충격에 가깝지만, 이 작품의 특징은 군대 내의 표피적인 사실들이 저질의 그것으로만 묘사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지 않는데, 그러한 말들에 의해 무력하게 무릎을 꿇는 최 병장의 행동에서 조용하게 모든 것을 감내하며 하루하루를 유지하는 것 같은 평소의 그의 행동의 연장선상에서 그러한 흥분은 상쇄되는 것이다. 즉, 사랑과 그리움의 정서는 폭력과는 다른 층위에서 귀를 만지거나 하는 무력한 행위를 통해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최 병장이 Iggy Pop의 「The passenger」를 부르기 시작할 때는 군대보다 더한 인내와 고독으로 점철된 닫힌 내면에 한 가닥 숨통을 트여주는 느낌이었다. 최 병장과 정 일병, 둘이 외떨어져 최 병장은 휴가를 나오고 정 일병은 부대에 머물 때 음악이 다른 식으로 연주 교차되어 오버랩 되는 상황은 둘의 존재를 각각 상정하고, 그것의 존재감을 동시에 각인시키며 둘의 떨어짐에 대한 외로움을 한층 가속시켰다. 극단의 감정들과 연기 뒤에 고요 속에 극이 끝난다. 이는 확실한 결말을 내리기보다 두 사람이 애인과 이별했던 것처럼 그것들을 과거의 기억으로 돌리고, 이후 기억에 대한 부름에 답하는 삶으로 흘러감을 의미한다. 젊음과 사랑/이별, 군대라는 것들의 공통점은 끝임 없이 소생되는 기억의 부름 아닐까. 동시에 군대라는 특수한 환경이 조직하는 감정들은 현실과 실질적 연계성을 띠기보다 오히려 공상적인 형태를 취하는 것 아닐까 싶다. 전방인간이 만드는 극적 공간은 사실적이되 극단의 감정을 만들어 내고, 그 기류에는 관찰자로 등장하지는 않음에도 최 병장의 내면이 가로놓이게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