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작품의 무대는 애초에 영화 시나리오로 구상된 원작을 둔만큼 장소 성을 염두에 두고 심혈을 기울여 구성했음을 알 수 있다. 백두대간, 안나푸르나, 일상 공간 등을 아울러야 하는 과제를 자유소극장의 특성인 3층에 해당하는 높이의 공간과 대형 스크린을 적절히 안배해 성공한 공간연출능력을 보여준다.
연극 [안나푸르나]는 1999년 안나푸르나 등정 후 실종된 故지현옥씨의 실화를 근간으로 만들어졌다. 의대를 다니다 산이 좋아 학교를 그만두고 산에 오르는 강현정, 막걸리 집 딸 윤희서, 그리고 베테랑 여성 산악인 공 선주. 이들 세 사람이 이 연극의 주인공이다. 특히 강현정은 여성 산악인으로 실제 지난 1999년 안나푸르나 등정 후 하산 길에 실종된 지현옥 씨가 모델이다. 범인의 시각에서는 이해하기 힘든 산에 대한 애정을 가진 세 여자의 이야기이지만 이 연극은 '산 이야기'로 국한되지 않는다. 산을 오르는 그들의 노정은 우리네 인생길과 같다. 사람들은 저마다 올라야 할 산을 가지고 있으며 산에 오르기 위해 그리고 다시 내려오기 위해 사랑하는 사람들과 부대끼며 이야기를 만들어 나가는 것이다.
현정, 희서, 선주는 산을 사랑하는 친구들이며 안나푸르나 등정을 목표로 한 동료들이다. 안나푸르나 행을 앞두고 갈등을 겪게 되는 이들은 산에 오르는 길이 여러 갈래이듯이 저마다 다른 길을 걷게 된다. 하지만 그 길들이 다시 모아지는 것도 산의 이치이자 섭리이듯이 이들은 다시 만나고 화해하고 서로의 등을 쓰다듬어 준다. 산을 오르는 사람들에게 함께 자일을 묶는 사람은 단순한 동료가 아니라 목숨을 건 동반자이다. 현정과 희서가 자일을 묶은 친구이다. 어쩔 수 없이 그 자일이 풀리고 각자의 길을 가게 되더라도 마음 속 자일은 죽음을 초월하여 둘을 연결시켜준다. 연극[안나푸르나]에 나오는 산은 사람들의 인생 노정이며 그들의 우정은 사람들의 로망이다. 극의 클라이맥스에서는 조명, 눈발 효과, 연기, 음향에 영상 효과까지 더해 안나푸르나의 서슬 퍼런 풍경을 실감나게 그리고 있다. 안나푸르나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드라마가 가진 감동은 양희은의 '한계령'으로 깊이를 더한다.
줄거리
산에 미친 세 명의 여자가 있다. 안나푸르나를 꿈꾸며 열심히 훈련을 하는 현정, 희서, 선주.
여자끼리의 등정은 무리라며 안나푸르나 원정을 허가하지 않는 연맹. 그래서 더더욱 열심히 훈련하는 세 여자. 열심히 하는 도가 지나쳐 빙벽훈련중 선주가 추락하여 다리를 다치고, 평생 산에 다닐 수 없는 몸이 된다. 결국 여자들끼리의 안나푸르나 원정은 물거품이 되고 현정은 합동등반대의 일원으로, 그것도 대장으로 에베레스트 등정에 성공한다. 희서를 탓하는 선주는 희서에게 고개를 돌리고, 희서는 혼자 에베레스트에 간 현정에게 고개를 돌린다. 희서는 이제 낮은 산만 간다. 산에 미친 현정에게 버림받은, 적어도 그렇게 느낀 기훈과 희서는 연인 사이가 된다. 안나푸르나에 간 현정과 선주. 몸이 불편한 선주는 베이스에서 지원을 맡고 현정은 안나푸르나에 오르기 시작한다. 현정은 무선기로 선주에게 말한다. "여기 정말 아름다워. 뭐라고 말을 못하겠어. 온통 하얀 세상이 가혹할 정도로 아름다워." 눈발이 날리고, 소리가 커지더니 돌연 사방이 어둠에 묻힌다. 안나푸르나의 아름다움을 가져갈 수도, 놓고 갈 수 없었던 현정은 그렇게 산 자체가 된다. 현정이 산이 된 그 곳, 안나푸르나에 이번에는 희서가 간다. 선주는 여전히 안나푸르나에 머물러 있는 참이다. 등반 중 쓰러지는 희서. 현정이 나타나서 말한다. '너는 돌아가야 해!' 에필로그에서 기훈은 말한다. 산에 미친 3명의 여자가 있었다. 한 명은 산에서 내려오지 않고 있다. 한 명은 산을 올랐다 내렸다 하고 있다. 그리고 한 명은 아예 산이 되었다. 어려서부터 산에 오를 수밖에 없었던 현정. 산이 곧 엄마였던 현정. 산을 오르기 위해 모든 것을 포기했던 현정. 그녀는 아예 산이 되었다. "같이" 산에 가는 것이 중요했던 희서. 지금은 산을 올랐다 내렸다 하고 있다.
불의의 사고로 산에의 꿈을 접어야 했던 선주. 여전히 산에서 내려오지 않고 있다.
안나푸르나는 우리나라의 대표적 여성 산악인이었던 지현옥, 남난희씨를 모델로 한 연극이다. 이야기 전개를 위해 가상인물 1명을 설정했다. 실존인물을 날실로, 실존사건을 씨실로 엮어나갔다. 극중 현정이 지현옥씨를 모델로 한 인물이고, 희서는 남난희씨, 선주는 가공인물이다. 지현옥씨는 한국여성 최초로 에베레스트를 오른 인물이다. 그리고 안나푸르나에서 죽었다. 남난희씨는 홀로 백두대간을 종주하며 그 이름을 높였다.
사실은 여기까지. 그 이후는 픽션이다. 지현옥씨가 에베레스트에 간 것은 1993년. 남난희씨가 백두대간을 종주한 것은 1984년. 극에서처럼 지현옥씨가 혼자 해외원정을 간 탓에 남난희씨가 홀로 백두대간을 종주한 것은 아니다. 그리고 남난희씨는 안나푸르나를 가지 않았다. 남난희씨가 간 곳은 다른 산이다.
세 명의 여자. '산'이 중요했던 여자. '같이'가 중요했던 여자. '꿈'을 접어야 했던 여자.
사람은 저마다 다른 이유로 저마다의 삶을 선택한다. 저마다의 이유로 현정일 수도, 희서일 수도, 선주일 수도 있다. '같이' 꿈꾸며, 즐겁게, 저 높은 곳을 바랄 수 있으면 인생은 그야말로 행복하리라. 그러나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이 인생. 혼자라도 갈 수밖에 없는 현정은 추락해야 한다. 혼자가 되자 목표치를 낮춘 희수는 여전히 낮은 산을 오르내려야 한다.
타의로 포기를 강요당한 선주는 여전히 꿈 주변을 배회할 수밖에 없다.
어떤 태도가 바람직한 걸까? 현정의 '굵고 짧게'? 희수의 '가늘고 길게'? 단언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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