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희곡

김상수 '화사첩'

clint 2025. 5. 15. 19:40

 

 

이 연극의 이야기는 동북아시아의 어느 한 나라. 
지금으로부터 100년에서 150여년쯤의 중국, 또는 조선을 배경으로, 
서른 살의 국왕 '모본'이 다스리고 있으나 왕은 국정을 팽개친 채 
배, 탱크 등의 장난감으로 장난에 몰두하고 있는 왕국에 대한 이야기다. 
실제로 이 나라를 움직이고 있는 권력은 3대째 섭정을 이어가고 있는 
대왕대비 자운이다. 오랑캐에 둘러싸여 있는 이 나라는 강대국인 잉글랜드와 
동맹을 맺고 있으며 현재 잉글랜드와 불평등한 통상협정을 막 맺었다. 
어느 날 국왕 모본은 관공서의 표준어를 '잉글리쉬'로 바꾸고, 국사교육을 
폐지한다는 칙령을 발표한다. 대왕대비 자운의 권력을 전복시키려는 
왕비 화희는 대신들과 함께 대비의 권력에 대한 역모를 꾀한다. 
이들의 역모를 눈치 챈 대비 자운은 화희의 왕비 자리를 폐하고, 
후궁 경을 간택할 계획을 세운다. 그러나, 화희를 비롯한 역모세력은 
자운의 움직임을 간파하고 후궁 경을 살해하려 한다. 후궁 경의 처치계획은 
미수에 그치고 후궁 경은 외딴 무인도로 유폐된다. 

 

 


궁궐에서 권력을 둘러싼 암투가 벌어지는 사이, 오랑캐가 침입한다. 
자운은 왕을 대신하여 회의를 소집하나 예부대신, 대학자, 통상협상 대사 등, 
주요 대신들은 동맹국 잉글랜드의 군사지원에 의지하려 하고, 통상협상도 
이전에 서둘러 추진했다. 오랑캐와 싸우기 위해 자국의 전시작전지휘권도 
잉글랜드에 이양하려 한다. 오직 겸재 장군만이 통상협정과 전작권 이양에 
반대하나 뜻을 이루지 못한다.
왕비 화희를 비롯한 역모세력은 대비 권력을 폐하고 꼭두각시 국왕 모본의 
친정체제를 구축하기 위해 옥새를 찾으려 하나, 대비 자운의 완강한 반격에 
부딪친다. 결국 권력을 쥔 대비 자운은 반역을 꾀한 대신들을 능지처참시키고 
화희를 수감시키며 역모를 완전히 진압한다. 그러나 오랑캐가 침입하면서 
이 나라는 다시 혼란에 휩싸인다. 오랑캐에 의해 성이 함락되는 순간, 
자운은 훗날을 위해 대피하고 겸재장군은 오랑캐에 맞서 장렬하게 전사한다.
왕궁을 탈출한 자운은 도피 끝에 바다에 닿았으나 왕조를 제대로 책임지지 
못한 것에 대해 자책한다. 하지만 대비 자운은 왕국에 대한 자신의 책임과 
자신의 운명을 자각하고 다시 왕궁으로 돌아갈 결심을 한다. 
“가자, 이제 돌아갈 때가 됐다. 가자!"



화사첩은 가상의 왕국에서 벌어지는 궁중암투를 다루고 있다. 
하지만 이 작품의 초점은 궁중내의 권력투쟁이 아니다. 
이 작품의 스토리와 구조, 이미지가 전하는 것은 다층적이며 복합적이다. 
이 작품의 스토리는 표층의 차원에서 하나의 절대권력과 그에 도전하는 
또 다른 권력 사이의 대립과 갈등으로 드러나고 있지만, 심층의 차원에서 
그것은 권력의 존재방식에 대한 물음을 담고 있다. 
어떠한 권력이어야 선(善)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혹은 국가권력은 어떻게 존재하고 작동되어야 하는가에 대한 물음이다. 
또한 우리시대의 쟁점들을 작품 내에 배치함으로써 지금 여기 이곳에서의 
권력에 대한 풍자와 비판도 아울러 담고 있다. 
그런 점에서 이 작품은 현재의 한국사회에 대한 알레고리이자 우의적 
풍자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시대의 연극이 부박한 벗기기와 
가벼운 농담으로 스스로의 예술적 권위를 추락시키고 있다는 점을 고려할 때, 
이 작품이 전하는 메시지는 의외로 묵직하다. 연극은 현실과 삶에 대한 
진지한 물음을 제기함으로써 관객에게 깊이 있는 성찰과 반성할 수 있는 
자리를 제공한다. 그럼으로써 이 작품은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오락거리로 
전락한 연극에 대해, 이 유구한 역사를 지닌 예술양식인 연극에 대해 
발원적인 물음도 제기한다.

 

 

 

김상수 작가의 글 중에서

섭정하던 대왕대비가 왕궁이 오랑캐에 함락되고 탈출 도피 끝에 바다에 닿았다. 몸종으로 따르는 조미에게 의탁할 수밖에 없는 현실에서 만나지는 인간적인 조건들에 새삼 눈을 뜨고, 대왕대비 자운은 몸은 비록 지쳤지만 바닷가에 핀 꽃들이 있는 자연 앞에서는 자유로워진다. 이곳은 모든 것이 평화롭고 모든 것이 받아들여지고 모든 것이 믿기고 모든 것이 타당하고 진실하기 때문이다. 왕조사직을 지키기 위한 간계와 무참한 살인들, 심지어 핏줄인 손주까지 죽음으로 내몬 섭정의 일대기에 대한 깊은 회오, 인공의 세계인 왕조를 구축하기 위한 삶과 비로소 하나의 자연으로 인간으로 눈을 뜨는 현실, 그리고 꿈결에서 만나진 흰옷 입은 백성들과 조우, 왕조를 제대로 책임지지 못한 것에 대해 자책, 하지만 대비 자운은 왕국에 대한 자신의 책임과 자신의 운명을 자각하면서 백상들의 안내로 다시 왕궁으로 돌아갈 결심을 한다. 여기서 나는, 꿈속에서 백성들을 만나는 대왕대비의 진술을 썼는데, 백성들 몰골이 처참하고, 언변도 어눌한데 대비에게 호소를 한다. 결국, '궁궐로 가자'는 것은 이 인물의 의지가 아니라. 백성들의 힘이다. 그것이 대비를 궁으로 끌고 가도록 하는 것이다. 대비가 궁궐로 가도록 하는 힘, 이것이 민초들에게 있다. 백성들, 지금으로 치면 국민들이 비록 벙어리처럼 하소연하는 힘이 대비를 궁궐로 이끄는 것이고, 이것은 그녀의 능력을 넘어서서 권력의 근거가 어디에 있는 것인가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김상수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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