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수 해변가에는 순대국 전문 음식점인 '소나무 집'이 있고, 그 식당은
미모의 50대 진여인이 발랄한 여종업원 은지와 더불어 운영하고 있다.
노래도, 춤도 잘추는 진여인이지만 실제의 그녀는 정체불명으로 알려져 있을
뿐만 아니라 취객들 사이에는 아예 난공불락의 여인으로 소문나 있기도 하다.
재벌급에 속하는 한성그룹의 이진모 회장 비서실 직원인 구민석이 그 가게에
나타난다. 그리고 그는 손님을 가장해서 진 여인의 신상을 파악해보려 하지만
그녀의 무거운 입은 좀체 열리지 않는다. 잠시 후, 그 식당 안으로 30대의
박애리가 들어서는데, 그녀는 미국유학을 마치고 초근에 귀국한 다음,
무용 발표회까지 마친 바 있는 현대무용가이다. 박애리는 낯선이의 전화를
받았기에 거기로 찾아왔다며 진 여인에게 자기 생모가 아니냐고 묻기까지 한다.
식당 안에는 묘한 의혹의 그림자만 짙어지게 된다.
이윽고 쫓기다 못한 듯 진여인이 그 식당을 벗어나면서 눈물을 흘리고,
구비서는 여러 가지 정황으로 미루어 이회장과 진여인의 과거가 범상치
않았다는 사실을 유추함과 동시에 어쩌면 박애리에게 전화를 걸었던 낯선이가
한성그룹의 비서실장 일지도 모른다는 추측까지 하기에 이른다.
구민석 비서와 박애리가 '소나무집'에서 다시 만나게 된다.
구비서의 집요한 추적에의한 진여인의 어두운 과거가 어느 정도 밝혀진다.
5.16쿠데타 직후, 춘천에는 늙은 기생 월화가 운영하는 비밀 요정이 있었고,
그 요정에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지닌 춘천지구 정보사령관 이진모 중령이
단골손님으로 출입하고 있었다. 그 당시 진여인(진우희)은 여고 3년생으로
강원도를 대표하는 무용수였는데 월화의 딸인 그녀의 춤추는 모습에
이진모 중령이 넋을 빼앗기곤 했으며 급기야 그들은 함께 밤을 새우기까지
했고, 그 결과 박애리가 태어나게 되었던 것이다.
그 후, 진여인은 이진모 중령을 피해 가출을 했고.....
그리고 30여 년이 흐른 뒤 '소나무 집'에 이 회장이 찾아온다.
작가의 말 - 김영무
헤아려보니 그간 공연된 나의 희곡 작품이 20여편을 넘어섰다. 그런데 다시 살펴보니 여자를 타이틀롤로 내세운 작품은 전혀 없었다. 따라서 나에게는 이 작품의 주인공을 여자로 설정. 작품화 한 처음 케이스가 된다. 남자들이 단돈 만원만 들고 가 한 그릇의 순대국과 소주 한병씩 까면서 언제나 쉽게 만나볼 수 있는 여인 진우희. 현대연극의 주인공들이 대게 그러하듯 여수 바닷가에서 순대국집을 경영하는 여자 주인공 진우희는 겉으로 보기에는 도무지 연극의 주인공이 될만한 깜냥이 못 된다. 굳이 갈등의 요소를 찾자면 마음이 헤프지 않아 끈질기게 추근대는 취객들의 애간장을 무지 태우는 정도, 어쩌다 순대국 아줌마로 살아가지만 날개쪽지 암만 아파도 잡목가지 위에는 절대로 앉지 않는다는 두루미를 가슴에 품고자 애쓰기도 하고, 저 멀리 수평선을 멍하게 바라다보며 가끔은 남몰래 아련한 꿈을 그리기도 하는 평범한 50대 여인. 이윽고 그녀의 과거가 점차 밝혀지면서 피붙이 딸이 나타나지만 그녀는 매몰차게 외면만 하려 들고 그녀는 혼자 꼬깃꼬깃 비극적인 사연들을 씹어 삼키며 30여년을 살아왔기에 어느 덧 체념과 단념 등이 생리화로 굳어버렸던 것이다. 그도 모자라 드디어는 그녀에게 결정적인 가해(?)를 한 바 있는 이진모 회장이 등장한다. 바야흐로 진여인이 선택할 수 있는 행동은 두 갈래로 나누어진다. 이진모 라는 그 가해자에게 증오나 원한의 감정을 폭팔하는 방향과 가해자 이진모의 비논리적인 해명과 애정을 감싸않는 방향, 진여인은 다시금 눈물을 머금으며 후자를 택한다. 흘러간 강물은 되돌릴 수 없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소나무집 여인'을 멀리서 바라보니 한국의 연극인들 초상과도 흡사하다는 느낌이 들기도 했다. 엄청난 파워에 떠밀려 기를 펴지 못하고 근근히 살아오면서도 꿈을 잃지 않는 모습에다 결국은 아픈 현실들을 포용할 수 밖에 없는 역설의 미학하며 그렇다면 이상의 줄거리를 어떤 양식의 그릇에 담으면 좋을까? 나는 애초부터 담담한 분위기 극으로 한폭의 수채화로 그리고자 했다. 관객과 함께 조용히 이른바 인생의 의미를 곱씹어보는 재미를 공유코자 한 것이다. 관연 어떤 결과로 나타날지는 아직 아무도 모를 일이지만....
수십 년간 한 사람의 사랑을 마음 깊은 곳에 간직하고 살다가 수십 년 후 다 늙어 만나는 두 사람의 사랑... 하지만 한 사람은 사랑이 아닌 증오를 간직하고 있었다. 유년시절 두 사람의 사이에는 아기가 태어나고, 여인은 그 아이를 원하지 않았다. 그 아기는 태어나자 마자 다른 사람의 손에 의해서 키워졌고, 그 여인을 사랑한 남자는 그 여인의 아기를 낳은 사실조차 모르고... 여인은 남자에게서 도망을 치기위해서 사라졌고, 남자는 여인을 찾기 위해서 군복까지 벗었다. 하지만 여인은 남자가 자신을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 그저 자신을 한 남자의 노리개 정도로 알고 있었다. 남자는 그 여인에게서 아기가 태어난 줄 몰랐다. 아기의 존재...
세월이 흘러 우연히 TV에서 본 여인의 무용... 남자는 그 무용에서 항상 마음속 깊은 곳에 간직한 자신의 사랑을 보았고...
이 극은 이런 식으로 시작을 하게 되는 것이다. 수십 년간 한 여인만을 간직하며 기다려온 남자. 그리고 그런 남자의 사랑을 몰랐던 여인... 하지만 그 여인도 그 남자를 사랑하고 있었던 건 아닐까?
소나무집은 순대국밥 집이다. 여수 바닷가 옆에 위치한 달빛이 하늘에 걸려 있고, 달빛에 반짝이는 바다 앞에 단아하고 옛정취가 풍기는 집 한재가 지조와 한세월 풍파를 의미했을 커다란 소나무와 함께 위치하고 있다. '소나무집'이란 간판이 달린 집안에선 순대국밥을 한다. 노래와 춤을 갈취 뭇남성들에게 인기가 많은 50대 여인이 여수까지 흘러와서 세월을 보낸다. 손 대국 한그릇과 소주한잔이면 여인을 향한 짝사랑의 안타까운 노래가 흘러나오고, 생모를 찾게 된 그간의 설움이 배어나온다. 얼큰하고 곰삭은 순대국 한 그릇과 소주 한잔, 옛 노래가락으로 아주 먼 어렸을적 추억이 떠올려진다. 소나무집 여인의 순대국에는 한많은 사연과 추억이 얽혀있는 것이다. 30여년의 세월 '산나리 꽃'처럼 혼자 피었다가 혼자 지는 소나무집 여인의 한은 또 얼마나 깊었을까? 그녀의 삶의 방식은 외면과 부정이었을 텐데, 그런 고통을 갈매기가 대신 울어주며, 파도가 쓸어줄 수 있었을까? '굴속의 토끼는 타의에 의해 결코 굴밖으로 나오지 않는다'는 이회장의 비서 말처럼 소나무집 여인은 쉽게 그 집을 나올 수가 없었을 것이다. 자신의 한이 순대국밥에 더욱더욱 곰삭아 익혀졌을 터이다. (유령회원이란 관객의 공연 감상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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