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희곡

김희창 '고려인 떡쇠'

clint 2024. 9. 9. 21:28



 

 

고구려말 국세가 기울면서 외세의 침입이 잦고 민심은 흉흉한데

왜구를 치러간다고 속이고 군사를 일으켜 왕위를 노리는

사또 이숭 일당과 주체의식이 확고하고 자유의지를 지닌 한 고려인 떡쇠가

결국은 맞부딪치게 된다. 이숭은 떡쇠의 칼에 목숨을 잃고

떡쇠는 군졸들의 칼에 무수히 찔리고 베여 참혹한 죽음을 당하고 만다.

그 어지러운 틈을 이용하여 왕을 자칭하고 나선 이숭의 부하 방가이는

떡쇠의 시체를 장거리에 내걸고 백성들에게 돌을 던지라고 명한다.

그러나 사면에서 날아오는 돌은 모두 떡쇠가 아닌 방가이를 향하고 있었다.

귀화한 여진족 찌몽은 떡쇠를 사모한다. 끝까지 그를 지키려 하나

실패하자 그녀도 자신의 칼로 자결한다.

 

 

극단 민예극장의 창립 대공연 <고려인 떡쇠>는 고려시대 함길도를 배경으로 한 시대극.

그러나 왕실이나 정치적 표면에 나타난 눈에 띄는 인물을 주인공으로 한 것이 아니라 역사의 흐름 속에 저변을 차지하고 있는 백성들 쪽에 초점을 맞춰 거기서 현대 정신으로 이어지는 백성의 외침을 부각시키려한 노력이 보이는 작품이었다. 관이 버린 땅을 백성은 포기할 수 없었고 권력이 지키기를 그만둘 때도 내 땅을 손으로 지키려 했다는 고려 사람들의 이야기를 크게 부각시켜보려는 강한 주제 의식을 엿볼 수 있었다. 그러나 떡쇠를 앞장세운 백성들을 크게 그리기 위해서인지 국가 권력의 대표라 할 수 잇는 사또 이숭을 비롯한 벼슬아치 주변 인물이 만담처럼 맥이 빠졌고 주제를 뒷받침할 수 있는 상황이 어설픈 느낌을 준다. 무대 평면을 고정시켜 놓고 배경으로 간단히 장면을 바꿔 나가는 무대 장치와 그 평면 및 등·퇴장구를 다채롭게 이용한 연출의 조합으로 자칫 허술해질지도 모를 극 진행을 탄탄하게 이끌어가는데 성공했다. 떡쇠 역을 맡은 최불암의 좀 억압된 듯하나 침착했던 연기와 성실감이 보이는 연기진들의 자세가 힘을 보태주고 있다. (일간스포츠 1973 12 8, 구히서)

 

 

고려인 떡쇠
김희창작 허규 연출 1973년 12월 6일~10일 예술극장 공연회수 10회 동원관객 5,355 명


극단 민예극장이 예술극장에서 공연한 <고려인 떡쇠>는 時代的인 갭에도 불구하고 드물게 현실적인 작품세계를 보여줬다. 이 연극이 작품 구성으로써 목적하고 있는 풍자성은 시대를 초월한 것이었으며 오랜만에 몰리에르의 웃음 아닌 우리 자신 (어쩌면 양반 풍자의 전통을 지닌 마당극적)의 웃음을 끌어냈다고 할 수 있다. 이 작품은 권력층과 民衆과의 관계를 고려시대 변방인 두만강변인 어느 고을에서 벌어진 사건을 통해 묘사한다. 民衆이 정신적으로 순종할 수 없는 권력이란 무력한 것이며 웃음거리밖에 안된다는 평범한 논리와 그 논리를 거역하는 일단의 권력층의 현실을 건강한 構成, 건강한 풍자정신으로 그려낸 作家 김희창씨의 작가정신이 흠씬 젖은 극이었다, 억압하고 명령할 뿐인 권력 앞에서 믿을 것이라곤 자신밖엔 없다고 느낄 때 민중의 생존의지는 오히려 강렬해지고 통치하는 권력은 그 의지의 장애가 될 뿐임을 드러낸다. 금년에 창조된 人物가운데 독창적인 극중 주인공의 하나로써 이 연극에 나오는 李崇사또를 들 수 있다. 반역을 부하들에게 설득할 말을 찾으며 망설일 때, 그의 부하 한명이 "역적질을 하잔 말입니까?" 반문하자 "그래 그거다"라고 말하는 李崇이란 인물을 렌즈로 해서 관객은 정의가 없는 권력이란 허구가 남루하며 가난하나 진실된 민중에 의해 하나하나 허물어짐을 본다. 그것은 마치 겉모양은 우람하나 토대가 약한 썩은 집이 무너져 내린 느끼는 쾌감과도 같다. 뿌리를 거부(조정을 배반하는 일)한다는 것은 날카로운 비교이며 아이러니를 느끼지 않고는 못 배긴다. 연출은 이 작품의 진가를 劇化하는데 미흡하며 연기도 장면전환, 극적 모멘트의 소화에 좀더 충실했으 면하는 아쉬움은 있다. 그러너 나 작품은 창작극 빈곤의 우리 극단의 레파토리에 중요 한 한 타이틀을 첨가해 주었다. (조선일보 朴漠植)

 

작가 김희창(좌)와 허규 연출가(우)

 

 

 

김희창 (1908~1998) 1908년 서울 출생. 1929년 경성방송에서 발표한 최초의 본격적 라디오 드라마 <노차부(老車夫)>로 첫 출발을 하고 이어 1939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희곡 부문에 <방군>으로 당선되었다. 희곡작가로서 보다는 방송 극작가로 더 알려졌으며, 1973년 국민훈장 모란장을 수상하였다. 주요작품으로는 라디오 드라마 <깊은 산속에서는> <로멘스 빠빠> <또순이>, TV드라마 <기러기 가족> <유랑극단> 등 방송사에 기록이 될 만한 작품을 집필하였고 2001년 한국방송영상산업진흥원이 선정한 명예의전당에 이름을 올렸다. 대표작품 <고려인 떡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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