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희곡

박해림 '전설의 리틀 농구단'

clint 2024. 6. 21. 22:10

 

 

승패는 상관없어 우리만 있으면 돼. 

내가 원하는 건 농구하는 지금
잘하는 거라곤 하나도 없고 늘 혼자인 수현은 
이 세상에 자기를 이해해 줄 사람이 하나도 없다. 
친구들의 괴롭힘을 피해 학교 주위를 맴돌다 
불이 다 꺼진 어두운 교실 창문 밖으로 몸을 던진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자신의 주위로 모여드는 친구들. 
승우, 다인, 지훈이라고 소개한 이들.
잠깐만, 너네 누구야?!
우리? 이 학교를 떠도는 귀신.
15년 동안 남고를 떠도는 귀신들은 일거수일투족 수현을 쫓아다니며 
소원을 들어달라고 한다.
"좋아요. 어차피 죽고 싶은 몸이었으니 원하는 대로 해보세요."
종우가 코치로 있는 폐지 직전의 구청 농구단으로 
수현을 데리고 간 귀신들.
구청 배 리틀 농구 대회에 참가하기 위한 
그들의 고군분투 훈련기가 시작된다.



귀신들의 작전에 떠난 속초 전지훈련에서 초코파이와 더블 비얀코를 가지고 
매년 여름 바닷가를 찾는 다인의 아빠를 만나기도 한다. 
친선경기를 이기고 돌아온 학교에서 '선생님은 농구 왜 하세요?'라는 
수현의 물음에 종우는 '덩크슛'이라는 넘버로 답한다.
'전설의 리틀 농구단'으로 종우와 귀신들의 사연이 드러난다. 
전설의 리틀 농구단이었던 넷은 친선경기를 하러 속초 바다에 갔다. 
물에 빠진 초등학생을 구하겠다고 승우와 지훈이가 바다에 뛰어들었고, 
수영을 못하는 종우에게 호루라기를 건네고 다인이까지 들어간 
바다에선 아무도 나오지 못했다.
혼자만 살아남았다는 죄책감에 살고 있는 종우에게 친구들은
'농구 한 판이면 땡!'이라며 종우와 마지막 농구 한판을 마치고 성불한다.

 



작가의 글 - 박해림
이 작품을 썼던 무렵이 2014년 8월입니다.
당시 모두는 어떤 공통의 아픔을 가지고 있었고, 저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갑자기 벌어진 일에 우리 모두는 허망했고, 슬픔을 견디기가 너무 힘들어서 아무 일도 할 수 없었습니다. 도처에 깔린 저마다의 아픔의 순간들에 감히 그 슬픔을 어루만질 겨를이 없이 또 다른 상실들로 뒤덮여야 하는 그런 삶. 당시 2003년 중학생이었던 제 친구는 한 순간의 사고로 친구들을 모두 잃었습니다. 대구 지하철 참사에서 혼자 살아남은 친구의 아픔을 저는 감히 알지 못합니다. 살아남은 몫을 위해서, 살아내야 하는 삶을 위해서 더 열심히 두 눈을 감고 살았다 합니다. 그런 그에게 다시 친구들을 만나면 어떻게 할 거냐고 묻자 오랫동안 생각하더니 대답했습니다. 글쎄, 무슨 말을 할 게 있을까. 너무 오래 지나버렸잖아. 15년이 흘렀는데... 그냥 농구나 하면 좋을 것 같아. 그때처럼
삶이 어떤 것인지 저는 아직 잘 모릅니다. 허나 삶을 위해 이야기하고 싶었습니다.
죽은 사람을 기억하는 저마다의 방식이 있지만 살아남은 사람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우리는 잘 알지 못합니다. 일본에서는 사고를 겪은 지역의 사람들을 위해, 그들의 아픔을 치유하는 과정으로 쓰이는 어느 한 공연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감히 주제넘게도 이 공연이 그런 삶을 위한 공연이 되길 바라는 마음에서 시작했습니다. 이 공연을 다시 준비하게 된 반년 사이에 갑자기 전 세계적으로 몰아닥친 이 예기치 못한 전염병으로 우리 모두는 힘든 시간을 겪고 있습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우리는 자연스레 집에 머물게 되는 날이 많아지고, 가족과 함께 보내는 시간이 늘어나고, 일이 아닌 취미를 찾게 된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깨끗한 하늘을 보고, 누군가를 좀 더 그리워하는 시간들이 많아졌습니다. 지난겨울부터 시작된 우리의 거리가 사람과 사람 사이에 존재해야 할 삶의 거리를 생각할 수 있었던 시간들이었습니다. 물론, 이 시기에 공연은 어떻게 존재해야 할 것인가도 마찬가지겠지요. 마스크 너머의 공감과 함성을 상상하고, 다시 만나고 함께 숨쉴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지 이렇게 공연을 할 수 있는 지금이 감사할 뿐입니다. 부디 오늘 하루 이 코트 위에서 우리가 함께 숨 쉴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위안이 되는 일인지 느끼셨다면 작가로서 영광일 테지요. 이 농구한판에 수많은 그리움과 슬픔을 다 털어버릴 수 있기를 바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