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막
눈먼 오이디푸스와 안티고네가 테바이 교외에, 아마도 키타이론산으로 가는 길목에 있다. 오이디푸스는 다시금 죄책감과 자신이 오염되어 있다는 느낌에 괴로워한다. 그는 딸의 충실함을 칭찬하지만, 이제 자기가 죽을 수 있도록 떠나기를 요구한다. 그는 스스로 눈을 찌른 것으로 충분히 죗값을 치렀다고 생각지 않는다. 안티고네는 아버지에게 고난에 맞서 용기있게 살아가라고 촉구한다. 그는 결코 죽을죄를 지은 것이 아니며, 나아가 아예 죄가 없다고 선언한다. 오이디푸스는 법적으로 따지면 자신에게 죄가 없지만, 그래도 자기 행위의 결과가 너무 끔찍하다고 토로한다. 그가 다시금 이렇게 괴로워하는 이유는 자기 아들 둘이 곧 전쟁을 시작하리라는 소식이 들려서다. 특히 외국으로 추방된 폴리네이케스가 외국군 대를 이끌고 모국과 자기 시민을 공격한다는 것은 이들이 자기의 자손임을 '입증'하는 행동이다. 하지만 안티고네는 오빠들 사이의 이 분쟁이야말로 오이디푸스가 살아야 하는 이유라 주장한다. 아버지는 자식들의 광적인 행동을 막아야 하기 때문이다. 오이디푸스는 아들들은 자신을 전혀 존중하지 않으니 다 쓸데없는 짓이다, 그들이 더 큰 죄를 짓는 걸 보기 전에 죽겠다고 우긴다. 안티고네는 아버지 앞에 쓰러져 눈물로 탄원한다. 그러자 오이디푸스가 마음을 바꿔서, 딸을 위해 살겠노라고 양보한다.
제2막
테바이로부터 도착한 전령이 두 젊은이 사이의 분쟁을 조정해 달라고 오이디푸스에게 청한다. 하지만 오이디푸스는 격한 어조로, 두 자식이 자기들 아버지에게 걸맞은 짓을 하길 기원한다. 그는 가파른 곳 동굴 속이나 빽빽 한 덤불에 숨어서 두 아들 사이의 다툼이 어떻게 되는지 듣겠노라고 선언한다.
제3막
작품의 후반부는 이오카스테의 탄식으로 시작한다. 전반부가 오이디푸스의 격한 외침으로 시작한 것과 유사하다. 후반부의 배경은 테바이 성벽 위, 또는 왕궁의 지붕 위로 보인다. 이오카스테는 거기서 전장을 내다보고 있다. 그녀는, 자기 손으로 자식을 찢어 죽였던 아가베가 자기보다 차라리 더 행복했다고 탄식한다. 아가베는 본인이 죄를 짓긴 했지만 적어도 그녀의 자식은 무고했는데, 이오카스테는 본인의 죄에 더하여 죄 많은 아들 들까지 낳았기 때문이다. 그때 시종이 다가와 두 군대의 전말이 서로 다가가고 있으며 발발 서 먼지가 일어나고 있다고 전하면서, 더 늦기 전에 두 아들 사이를 중재하라고 권고한다. 안티고네 역시 어머니를 재촉한다. 이오카스테는 두 군대 사이로 들어가겠노라고 한다. 두 아들이 군대를 전진시키려면 먼저 그녀를 죽여야 할 것이다. 이어서 시종이, 이오카스테가 달려가 두 군대를 정지시키는 장면을 자세히 묘사한다. 이것은 보통 비극작품에서 전령이 사건을 보고하는 장면을 바꾼 것이다. 그러한 보고는 대개 어미 사건이 일어난 후에 이루어지는데 여기서는 사건이 진행되는 것과 동시에 보고가 이뤄진다. 이는 사건을 좀 더 생생하게 전달할 뿐만 아니라, 곧 일어날 배경 전환을 쉽게 만들어 주는 효과가 있다.
제4막
이오카스테가 아들들을 설득하려 애쓰지만 아들들은 서로 상대를 경계하여 먼저 무장을 내려놓질 못한다. 그래도 결국 양쪽이 무기를 치우게 되고, 이오카스테는 먼저 폴리네이케스에게로 향한다. 그의 망명, 그리고 어머니로서 아들의 결혼을 챙기지 못한 것을 탄식하고 아들이 이제 침략자로서 자신을 두렵게 함을 슬퍼한다. 이어서 그가 고국에 끼칠 파괴의 참상을 자세히 묘사하며, 군대를 철수시키라고 호소한다 하지만 아들은 거부한다. 그렇게 되면 자신은 영원한 자세로 가에서 종속적 위치에 놓이리라는 것이다. 그러자 어머니는 아닌 다른 곳에 새로운 왕국을 세우는 게 어떠냐고 제안한 스 왜 자기 형제는 전혀 죗값을 치르지 않게 되는지 반문한다. 어머니는 에테 오클레스도 대가를 치르게 될 거라고 말한다. 테바이 통치자 중에 불행을 당하지 않은 사람이 없다면서. 특히 에테오클레스는 신성한 기 때문에 더욱 그렇게 되리라는 것이다.
에테오클레스가 이런 예상을 비웃자. 어머니가 나무라지만 아들은 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권력을 차지하는 게 좋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작품이 중단된다. 미완성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나. 그렇지 않다는 학자들도 있다. 즉, 이 마지막 부분은 에테오클레스와 어머니 사이의 대화여서, 그는 권력을 넘겨 의사가 없다는 것이 분명해졌으며, 플리네이케스가 어머니의 호소를 받아들일지는 불확실한 채로 작품이 끝난다는 것이다.
이 작품은 크게 두 줄기의 이야기를 다룬다. 전반부는, 테바이 왕 오이디푸스가 자신이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했음을 스스로 밝혀내고 눈이 멀어 세상을 떠도는 것이 주된 내용이다. 후반부는, 그의 두 아들이 왕권을 놓고 전쟁을 벌이는 와중에 이오카스테가 그들을 화해시키려 애쓰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포이니케 여인들〉이란 제목은 E사본 전통에서 사용해온 제목이고, A사본 전통에서는 <테바이스>라는 제목을 사용한다. 하지만 에우리피데스의 작품과 비교하거나, 스타티우스의 서사시 <테바이스>와 구별하는 데 있어 <포이니케 여인들>이 더 나은 제목인 듯하다. 이 작품은 세네카 비극 중 특히 그 운율상 특징으로 보아 마지막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이 작품은 오이디푸스의 방랑을 그의 두 아들 사이의 권력투쟁과 묶어 소개하면서, 특히 오이디푸스와 이오카스테의 역할을 강조한다. 이처럼 전통적 소재를 새로운 방식으로 이용하는 것 또한 작가의 원숙기 작품임을 보여준다. 또 하나 이 작품이 마지막 것이라고 추정하는 이유는, 이 작품이 미완성 상태이기 때문이다. 일단 합창단의 노래가 없고, 막도 4막에 그쳐서, 전체 분량이 664행으로 다른 작품의 60% 정도이다. 그래서 학자들은, 세네카가 이미 <오이디푸스>에서 전통적 내용을 한번 다루었기 때문에 이번에는 새로운 문학적 실험을 시도한 것인데, 네 로와의 관계가 악화되어 궁정을 떠나면서(서기 62년) 작업이 중단된 것이 아닌지 추정한다. 극의 내용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뉜다. 전체 4막 중 앞의 두 막은 방랑중인 오이디푸스가 아들들의 분쟁을 예견하고 고심하는 장면이다. 뒤의 두 막은 이오카스테가 두 아들 사이를 조정하려 애쓰는 내용이다.
이 작품에는 합창이 나오지 않는데, 혹시 <포이니케 여인들>이라는 작품 제목이 세네카 자신이 붙인 것이라면 애초에는 합창을 넣으려 구상했을 수도 있다. 장면 배경이 전반부에는 테바이 바깥 야외였다가 후반부에는 성벽과 성 앞이어서 동일한 합창단을 사용할 수 있는지의 문제가 있긴 하다. 하지만 <파이드라>에서는 아예 합창단의 성별조차 불분명하니, 이것이 큰 문제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합창단이 인물을 따라 장소를 옮겨가는 방법도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러면 애초에 세네카가 합창을 낳았었는데 사본 전승 과정에서 사라진 것인지 아니면 나중에 넣으려고 구상했다가 완성하지 못한 것인지 문제가 있다. 학자들은 대개 후자로 본다. 한편 이 작품이 미완성이 아니라 이대로 완성된 것이라는 주장은, 마지막 부분이 너무 약해서 초반부터 둘 사이의 격돌을 기다려 온 독자들의 기대를 만족시키지 못한다는 점 때문에, 많은 지지를 받진 못한다. 만일 세네카가 마지막 장면을 더 썼더라면 예 우리피데스의 작품에 나온 것처럼 두 형제의 죽음과 이오카스테의 자결이 전령에 의해 보고되었을 가능성이 높고 또 그에 대한 오이디푸스의 반응 이 그려졌을 텐데, 그러면 아직도 도시 밖에 있는 오이디푸스를 보여주기 위해 다시 한 번 장면을 전환해야 한다는 어려움이 있다. 이 작품을 둘러싼 또 하나의 쟁점은 막 구별을 어떻게 해야 하느냐는 것이다. 합창이 나오지 않기 때문에 더욱 어려운 이야기다. 앞에서는 네 부분으로 나눴지만, 일단 제2막이 너무 짧다는 문제가 있다. 제2막을 첫 부분과 합치는 것이 어떨까 싶기도 한데, 전체를 셋으로 나누자고 제안하는 학자도 제2막을 없애기보다 그 뒤 이오카스테 부분을 두 막으로 나누지 말고 하나로 묶자는 의견을 제시한다. 한편 그냥 전체를 둘 (오이디푸스 부분 -이오카스테 부분)로 나눠 보자는 의견도 있다. 하지만 오히려 더 자세히, 다섯 부분으로 나누자는 의견도 있다. 이 작품의 내용이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뉘기 때문에, 19세기에는 이 두 부 분이 서로 다른 작품에서 온 것이 아니냐는 의혹도 있었다. 하지만 점차적 앞의 제3막을 363-402행, 403-442형으로 나누자는 것이다. 이 작품이 완결된 것이라고 보는 타런트의 제안이다. 으로 이 두 부분 사이의 구조적 평행성, 단어들 사이의 호응, 주제적 대조 와 연속성 등이 밝혀지면서 그런 의혹 해소된 상태다. 작가가 작품을 이런 식으로 짠 것은, 두 아들의 파멸적 대결에 대해 부모가 각기 어떻게 반응 하는지 보여주려 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즉, 오이디푸스의 죄책감과 불경스런 분노와 대비하여, 두 아들을 화해시키려 애쓰는 이오카스테의 충실함(경건함, pietas)을 보여줌이 작가의 주된 목표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오카스테의 충실함도 아들들의 불경 앞에 무력하게 된다. 이는 전반부에서 안티고네의 충실함이 오이디푸스 앞에서 별 효력이 없는 것과 유사하다. 이 작품에서 이오카스테는 오이디푸스보다 훨씬 합리적이고 강인하게 그러졌다. 그녀 역시 죄책감에 시달리지만 그것이 그녀는 자기혐오와 자기 괴로 가지는 않는다. 둘 사이의 대조를 가장 잘 보여주는 표현이 "나는 가련다"이다. 두 인물이 같은 표현을 두 번씩 반복하지만 오이디푸스는 죽음을 찾으러 가겠다는 뜻이고 이오카스테는 두 아들 사이의 대전을 달리러 가겠다는 의미다. 또한 '달려들게 하라'도 오이디푸스는 '형제끼리 서로에게 달려들게 하라'는 뜻으로 썼지만, 이오카스테는 '모두가 나를 공격하게 하라'는 뜻으로 사용했다. 즉, 한쪽은 저주의 확장을 기원하는 반면, 다른 쪽은 스스로 책임과 희생을 떠받겠노라는 결의를 보여준다.
세네카가 <포이니케 여인들>을 썼을 때 어떤 작품을 모델로 삼았는지에 대해, 예전에는 작품 전반부는 소포클레스의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에서, 후반부는 에우리피데스의 <포이니케여인들>에서 빌려왔다는 믿음이 보편적이었다. 하지만 근래에는 세네카가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를 직접 읽지 못하고 대체적 흐름만 알고 있었다는 주장이 지지를 얻는다. 에우리피데스 <포이니케 여인들>의 영향도 유사한 표현이 별로 없다는 점에서 의심을 받고 있다. 그보다는 로마 문학작품들의 영향이 더 크지 않았나 싶은데, 공화정 말기에 활동했던 악키우스의 <포이니케 여인들>에서 전해진 일부 파편을 보면 그 작품도 직접 표현에까지 영향을 준 것 같지는 않다. 어찌 에우리피데스 모델로 삼았던 다른 로마 비극이 있었고 아키우스도 그것을 본떴을 가능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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