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이 오르면 사장이 장부정리를 하는데, 그는 슈퍼마켓 사장으로 행세하지만,
실은 장물아비를 겸하고 있고, 포주 아내와 살고 있다.
그 사이엔 대학에 다니는 미선이라는 아내의 딸이 있는데,
그들은 이 딸을 돈많은 노인에게 시집보내어 유산을 빼돌리려 한다.
그러나 미선은 상사라는 별명을 가진 사장의 부하와 결혼하고 싶어한다.
이미 상사와 깊은 관계를 맺은 수자라는 창녀가 그 사이에 끼어들어
상사를 독차지하고 싶은 마음에 사장과 그 부인하고 결탁하나, 결국 이용당하고 만다.
똘만은 미선과 상사 사이가 좋게 되도록 돕고자 하나,
세상 물정에 아직 어두워 사장과 그 부인의 농간에 놀아난다.
결국 돈밖에 모르는 사장과 그 부인으로 인해 미선은 애를 지우고,
수자 덕분에 도망쳤다가 미선과의 결혼을 가능케 해주려는 똘만의 온정으로
오히려 다시 붙들려 사형 당하게 된 상사를 찾아간다.
‘나중’에 아이와 함께 셋이서 다시 만나자는 상사에게
미선은 ‘금방’ 다같이 만날 수 있을 거라고 대꾸한다.
자살을 뒤늦게 감지한 상사의 ‘바보야, 죽지마아’하는 절규로 막이 내린다.
원작과 같은 막판 뒤집기는 없다.
이 작품은 브레히트의 ‘서푼짜리 오페라’의 원작이기도 한 영국 극작가 존 게이의 ‘거지 오페라’(The Beggar’s Opera)를 바탕으로 한다. 1728년 초연한 ‘거지 오페라’는 당시 영국 사회에 대한 신랄한 풍자와 더불어 런던 하층민의 삶을 익살스레 묘사해 18세기 최고의 히트작이자 웨스트엔드 뮤지컬의 기원이 된 작품이다.
이 노래극은 한 마디로 기존 오페라관으로부터의 탈피를 시도한 결과로서, 그 성과의 찬반이 엇갈리는 결과를 낳았다고는 하나, 민족음악 문화관련 예술양식의 창조를 위한 새로운 시도라는 점에서 높은 평가를 받아 마땅하다. 일단 오페라 무대에 오르면 출연자의 연기력, 음악성, 예술관, 사회관 등은 둘째 문제가 된다. 기존의 오페라관에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음질과 음량을 가수의 선행 조건으로 취급한다는 것이다. 음악성은 아무리 뛰어나고 아무리 좋은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고 해도 일단 미성을 갖고 있지 않으면 오페라 무대에 서지 못하게 하는 것이 기존의 오페라 관이다. 미성이든 탁성이든 간에 소리는 음악에 있어서 매체에 불과하다. 매체는 예술을 통해서 무엇을 나타내려고 하는, 그 ‘무엇’의 수단에 불과하다. ‘무엇’을 둘째 문제로 치고 수단이 매체를 우선 순위에 있어서 앞세운다는 데에 문제가 없지 않을 수 없다. 효과적 측면에서 좋은 매체와 나쁜 매체가 없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 좋고 나쁨을 정하는 당사자는 언제나 개인이라기보다 음악 양식이라든가 음악 문화이다. 서양오페라와 한국의 판소리에서 좋은 소리를 원하는 것은 마찬가지이나, 좋은 소리로 뽑아 놓은 소리의 질이 서양 오페라와 판소리의 경우 전혀 달라지는 이유도 좋고 나쁨의 개념정의적 차원에서 그 준거가 다르기 때문임은 말할 나위가 없다. … 미성은 어차피 문화가 정해주는 것이라는 말은 미성의 개념이 상대적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특정 시대와 특정 지역적 공간에서 특정 기간동안 수용되다가 마는 미성 개념의 노예가 되어서 수많은 한국의 성악도가 쓰러져 가는 것을 그냥 보고 있을 수 없다는 이유도 이유이겠지만, 예술양식의 내적 의미에서도 새로운 매체와 양식 창조의 의미는 언제나 값어치 있는 것이라고 되어 있다. 서울에 있는 1천 5백 여명의 성악도가 가진 보통 목소리가 새로운 음악극을 위한 매체 역할을 충분히 할 수 있다면, 아니 그렇게 될 수 있는 새로운 노래극 형식이 창조될 수 있다면, 성악도의 구제도 구제이겠지만, 지구상에 새로운 예술 양식의 창조가 이루어진다는 의미에서도 그 뜻의 깊음은 대단한 것이 아닐 수 없다. 한국 음악극연구소가 하고 있는 일이 바로 이러한 것이며, 이번 공연은 바로 이러한 시도라는 점에서 높이 평가 받아 마땅하다. 물론 현 단계에서 이번 공연이 완전히 성공했다는 것은 아니다. 입맛 돋구는 개별적 악곡이 없다는 것도 아니나, 음악이 극의 시녀 역할을 하고 있다는 느낌으로부터 탈피할 수 있는 방안의 창조가 시급하다는 생각이며, 노래극을 통해서 전달하려는 메시지에 좀 더 문제성이 있어야 하겠다는 생각이다. (<음악동아>, 이강숙, 1987년 12월호, '새로운 예술양식의 창조에 기여')
사장과 그 부인의 물욕에 희생되는 미선, 상사, 수자, 똘만의 불행이 ‘먹물’들로 하여금 ‘천대와 멸시를 뒤집어 쓴 채, 그것을 피할 수도 없고 피할 엄두도 내지 못하며 하루하루 힘들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세계로 눈을 돌리게 하려는 각색·연출자 문호근의 의도에 과연 적합했을까 하는 의문이 생긴다. 또한 단순발상으로 인해 상황이 지나치게 작위적으로 설정되어 자칫 이른바 ‘신파’식의 감상주의가 과장되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한 감상성은 연기양식에도 이내 옮겨붙어 오히려 실감을 덜어버린다. 말하자면 상투성이 지나쳐 양식성을 잠식해 버린 셈인데, 연극 경험이 있는 배우쪽이 오히려 더 그러하다. 그러기에 예컨대 상사가 도망간 직후에 불리워진 ‘잡아야지, 숨어야지’하는 대목에서처럼 뮤지컬 특유의 앙상블이 실현되었을 때 관객들은 거리낌없이 박수를 보낸 것이 아닐까? 말하자면, 그것은 양식적 기대가 충족되었다는 데서 오는 순수한 반응이라고 할 수 있다. 존 게이의 원본을 우리 실정에 맞게 번안·각색한 이 공연은 애초부터 ‘먹물’의 눈으로 ‘바닥세계’를 들여다본다는 한계를 지니고 있었던 셈이다. 같은 대본은 가지고 작업해 보았던 브레히트의 <서푼짜리 오페라>도 그의 의도와는 달리 여전히 시민계층의 애호를 받는 극장 레퍼토리가 되고 말았던 것을 감안한다면, 오히려 그 한계를 보다 분명히 인식하고 작업해나가는 것이 더 나을지 모르겠다. 음악부분은 따로 언급될 것으로 알지만, 연극적 진행과도 연관이 있기에 한마디 곁들인다면, ‘사장품평가’, ’잘 돌아간다’ 등 전래적 요소를 살리려는 부분이 흐름을 차단했다는 느낌을 준다. 한국음악극이 반드시 양식적인 고착상태를 의미할 필요가 없다는 하나의 반증이 아닐까 생각되기도 한다. (<음악동아>, 김문환, 1987년 11월, '먹물의 눈으로 바닥세계를 들여다본 한계와 극복')
음악극 연구소는 1986년 12월에 문을 열고 그동안 학술 모임, 워크숍 공연, 음악극 페스티벌 등의 활동을 펼치면서 서양 오페라처럼 남의 나라 고급문화라서 거리가 멀거나 판소리처럼 전통적인 맥이 뚜렷해서 접근하기 힘든 것이 아닌 이 시대의 우리 음악극을 만든다는 소리를 외쳐왔다. <우리들의 사랑>은 그들의 그러한 노력의 1년 결산이고 그러한 외침에 동의하고 참여한 사람들이 거둔 하나의 수확이라고 할 수 있다. 오페라도 아니고, 판소리도 아니고 그냥 연극도 아니면서 그 모든 것보다 더 관객과 가까운 무대를 만들려는 이들 참여자들의 구성은 다채롭다. 연출에 문호근, 대본에 문호근·원창연, 작곡에 강준일·김철호·이건용, 안무에 박일규, 출연에 문성근·김지숙·양희경·박용수·원창연, 반주에 이은영 외 3인, 모두 연극·음악·무용계의 일을 많이 하는 사람들이고 각각 전문 분야가 다르지만 모두 독창적이고 친숙한 무대를 만든다는 점에 의욕을 가진 사람들이다. 이들이 만들어낸 노래극 <우리들의 사랑>은 18세기 영국의 존 게이가 당시 런던 귀족사회를 풍미하던 수입품인 고상한 이탈리아 오페라에 대한 반격으로 거리의 노래와 사람들을 재료로 만들어 성공을 거뒀던 <거지 같은 오페라>에서 시작됐다. 음악극연구소는 지난 3월 <거지 같은 오페라>의 워크숍 공연을 가졌고 6월에는 음악극 페스티벌 속의 한 작품으로 다시 공연을 했었다. 이 때도 그들은 ‘빙글빙글’, ‘눈물 젖은 두만강’ 등 우리 대중 가요를 극중에 삽입하는 시도를 했었다. 이번 작품의 최초의 발상은 <거지 같은 오페라>의 번안에서 나왔다. 줄거리의 번안 작업 중 아예 음악도 우리의 것으로 새로 만들자는 발상이 나온 것이다. (<주간한국>, 구히서, 1987년 11월 2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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