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는 소설

박범신 '은교'

clint 2023. 4. 25. 17:17

 

위대한 시인이라고 칭송받던 이적요가 죽은 지 일 년이 되었다. Q변호사는 이적요의 유언대로 그가 남긴 노트를 공개하기로 한다. 그러나 막상 노트를 읽고 나자 공개를 망설인다. 노트에는 이적요가 열일곱 소녀인 한은교를 사랑했으며, 제자였던 베스트셀러 『심장』의 작가 서지우를 죽였다는 충격적인 고백이 담겨 있었던 것. 또한 『심장』을 비롯한 서지우의 작품은 전부 이적요가 썼다는 엄청난 사실까지! 이적요기념관 설립이 한창인 지금, 이 노트가 공개된다면 문단에 일대 파란이 일어날 것이 빤하다. 노트를 공개해야 하는지 고민에 빠진 Q변호사는 은교를 만나고, 놀랍게도 서지우 역시 기록을 남겼다는 사실을 듣는다. 은교에게서 서지우의 기록이 담긴 디스켓을 받은 Q변호사는, 이적요의 노트와 서지우의 디스켓을 통해 그들에게서 벌어졌던 일들을 알게 된다. 이적요는 자신의 늙음과 대비되는 은교의 젊음을 보며 관능과 아름다움을 느꼈다. 자신을 “할아부지”라고 부르며, 유리창을 뽀드득 소리 나게 닦는 은교의 발랄한 모습을 보며 자신이 경험해보지 못했던 ‘청춘’을 실감하기도 했다. 한편, 서지우는 은교를 바라보는 이적요의 눈빛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깨닫고 은교에 대한 집착이 커져갔다. 정에 넘치던 사제지간이었던 이적요와 서지우의 관계는 은교를 둘러싸고 조금씩 긴장이 흐르기 시작하고, 열등감과 질투, 모욕이 뒤섞인 채 아슬아슬하게 유지된다. 그리고 서지우가 자동차 사고로 목숨을 잃은 후, 이적요는 조금씩 생명력을 잃어갔다. 이적요는, 정말 서지우를 살해했던 걸까. 이적요는, 정말 한은교를 사랑했던 걸까.

 

영화 은교

 

작가의 말 박범신

돌아온 내 젊은 날

 

내가 미쳤다. 이 소설을 불과 한 달 반 만에 썼다. 폭풍 같은 질주였다. 창밖엔 자주 북풍이 불어재꼈고 폭설이 내렸다. 나는 우주의 어느 어둑어둑한 동굴에 혼자 들어앉아 있는 것 같았다. 내 안에서 생성된 날선 문장들이 포악스럽게 나를 앞으로 밀고 나갔다. 나는 때로 한없이 슬펐고, 때로 한없이 충만했다. 다 쓰고 났을 때, 몸안에서 뭔가가, 이를테면 내장들이 쑥 빠져나간 듯했다. 나는 쭉정이가 되어 어둔 방구석에 가만히 누웠다. 그리고 보았다. 저만치 흘러가던 나의 젊은 날이 어느새 돌아와 내 옆에 나란히 누워 있었다. 5월의 물푸레나무처럼 내가 다시 푸르러졌다고 느꼈다.

어느덧 봄이었다. 나는 햇빛 환한 봄길로 걸어 나갔다. 민들레 홀씨만큼 몸이 가벼웠다. 바람으로 천지를 흐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길 끝에 서서 막 세수하고 난 어린아이처럼 킥킥거리고 웃으면서 흥얼흥얼했다. The answer, my friend, is blowin' in the wind- 친구여, 모든 해답은 나부끼는 바람 속에 있다. 라고 나는 노래 불렀다. 놀랍게도 봄이 예민해진 내 젊은 살을 산지사방으로 부드럽게 관통했다. 행복했다.

지난 십여 년간 나를 사로잡고 있었던 낱말은 '갈망'이었다. 『촐라체』와 『고산자』, 그리고 이 소설 『은교』를, 나는 혼잣말 로 '갈망의 삼부작'이라 부른다. 『촐라체』에서는 히말라야를 배경으로 인간 의지의 수직적 한계를, 고산자에서는 역사적 시간을 통한 꿈의 수평적인 정한, 그리고 『은교』에 이르러, 비로소 실존의 현실로 돌아와 존재의 내밀한 욕망과 그 근원을 감히 탐험하고 기록했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밤에만 쓴 소설이니, 독자들도 '밤에만 읽기를 바라고 있다.

이로써, 나의 눈물겹고 뜨겁고 푸른 '갈망'의 화두를 일단 접는다. 새 소설이 나를 부르고 있다.

2010년 이른 봄 한밤에 북한산 자락에 엎디어.

 

 

2012년 영화 은교가 제작되어 상영되었으나 소설 은교를 읽은 독자들 대부분의 혹평을 받았고, 작가 박범신도 불만을 표한 것으로 알려진다. 소설에 잠겨있는 여러 복선들을 너무 평면적으로 영상화 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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