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희곡

허진원 ‘미사여구 없이’

clint 2016. 7. 5. 18:04

 

 

 

 

시작하는 연인들에게 사랑은 그토록 달콤할 수밖에 없는데, 이게 시간이 지날수록 그렇지가 않다. 툭 하고 꺼내 놓은 말에 꼬리를 달고 이유를 달고 비방을 달면서 본래 대화의 취지는 연기처럼 사라진다. 줄줄이 비엔나처럼 혼탁하고 오염된 말들만 딸려 나올 뿐이다. 사랑의 본질이 보이지 않도록 그 주변을 두텁게 감싸고 있는 이 말들은 솔직히 쓸데없다.

연극 미사여구 없이는 사랑을 할 때는 토 달지 말라고, 혹은 자신을 옹호하기 위해 온갖 아름답게 꾸면 말을 내뱉지 말라고 이야기하는 것 같다. 그런 것들 때문에 가장 중요한 본질이 가려질 수 있다고 마치 당부하는 것 같다. 주인공은 대놓고 미사여구를 빼니 삐죽삐죽 서사가 보이고 묘사가 명확해 진다고 말한다. 번지르르해 보이고 쓸데없는 사랑의 외피를 벗겨내니 사랑이 명확하게 보인다는 말과 크게 다르지 않다.

 

 

 

 

 

하지만 연극을 보고 있으면 사랑을 둘러싸고 있는 비방, 아름답게 포장한 자기 합리화, 비난 등도 때론 필요하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그것들을 통해서 깨닫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말할 때는 인식하지 못했지만 날카로운 말들을 상대방 심장에 꽂고 나면 자신이 얼마나 비겁했는지 깨닫게 된다. 초라함도 느께게 된다. 이 정도 밖에 안 되는 인간이었나, 숙고하게 된다. 겹겹이 싸여있는 외피를 벗기고 나면 본질이 부끄럽게 모습을 드러낸다. ‘내가 정말 잘못했다’,‘사랑했다등의 깨달음이 바로 그런 것이다. 이런 것들이 반갑다. 미사여구 뒤에 오는 것들, 즉 미사여구가 던져주는 교훈이다.

그래서일까. 연극 미사여구없이는 제목과 달리 미사여구로 가득 차 있다. 말은 또 다른 말을 낳고, 탁구를 치듯 헐렁하게 혹은 팽팽하게 밀고 당기면서단 긴장감이 도드라진다. 이 때문에 2인극임에도 몰입도가 매우 높다. 이 극을 쓴 허진원 작가의 발칙하고 기발한 필력이 도드라지는 부분이다.

 

 

 

 

 

어쨌든 극 속 남자와 여자는 치열한 설전을 통해 극을 이끌어 나간다. 우연히 잠자리를 보내게 된 동구와 서현은 단 한마디의 말로 싸움을 시작하는데 이것이 참 기가 막히다. 잠자리를 문제로 시작한 설전은 점점 기형적으로 뒤틀리기 시작한다. 처음엔 동구의 테크닉 문제로 이어지더니 결국엔 동구가 쓰는 소설까지 비방을 받는다. 동구도 가만히 있지 않는다. 동구는 서현에게 대책 없는 페미니스트라고 지적하고 여자들도 군대를 보내야 한다고 격분한다. 전혀 관련 없는 말까지 튀어나오는 것이다말에서 말로 이어지는 이들의 접전은 점차 치열해진다. 두 개의 불덩이가 계속 튄다. 그러다 보니 사랑을 가리는 외피 역시 두꺼워 진다. 사랑의 흔적은 물론이고 두 사람이 학창시절에 공유했던 풋풋한 추억마저도 보이지 않게 된다.

 

 

 

 

 

사랑의 외피는 숙명이다. 이 세상에 남녀가 존재하는 한, 그리고 두 사람이 사랑을 하는 한 연신 생길 수밖에 없는 문제다. 극 속에서 오해를 풀지 못하고 헤어진 서현과 동구가 10년만에 만났지만 또 다른 외피를 생성해 나가는 과정만 봐도 알 수 있다. 끊임없이 미사여구를 펼쳐나가면서 진실을 드러내려고 하거나 감추려 하는 두 남녀를 통해 관객은 스스로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더 나아가 외피 속에 감춰졌던 사랑의 본질에 대해 숙고하게 된다. 적게는 20, 많게는 30년 이상 전혀 다른 생활환경에서 살아온 남녀가 살을 맞부딪히고 하나가 되는 과정은 쉽지 않다. 거기서 부터가 또 다른 인생의 시작점이자, 2의 시작점이다. 두 사람의 모난 부분이 깎여야 비로소 두 사람의 결합이 이뤄진다. 그 사이에 외피가 있어도 좋을 것 같다. 자신을 보호하려고 아름답게 포장한 미사여구로 가득 차도 좋을 것 같다. 어쩌면 미사여구 뒤에 건진 본질이 조금 더 가치 있게 다가올 수도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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