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희곡

최인훈 '놀부뎐'

clint 2016. 7. 4. 20:21

 

 

최인훈의 눈으로는 「흥부전」을 아무리 읽어 봐도 흥부가 아이를 많이 낳은 것 외에는 잘한 것이 하나도 없었던 것 같다. 오죽했으면 흥부전을 쓴 사람도 부부가 눈만 마주쳐도, 옷깃만 스쳐도 애를 낳았다고 했겠습니까. 숫자로도 스물여덟이나 아홉밖에는 더는 못 세고 마는데, 아마 50이나 60명쯤은 낳았을 거다. 그런데 흥부가 한 것은 뭐냐 하면 제비집에서 발을 헛디뎌서 떨어진 멍청한 제비를 살린 것. 물론 뱀이 올라오는 통에 놀라서 그랬다지만, 다른 제비들은 멀쩡한데 왜 그 멍청한 제비 한 마리만 떨어졌을까. 마음씨 착한 흥부는 그 멍청한 제비를 주워다가 다리를 붙들어 매준다. 깁스 해서 날려보냈더니 남양이라는 곳으로 간다. 지금으로 말하면 태국이나 버마에 해당되겠지. 거기서 박을 기른다는 소리도 좀 희한한 소리지만, 그걸 물고 여기까지 온다는 둥 최인훈 선생의 입장에서는 생각하면 할수록 믿어지지 않을 소리만 잔뜩 씌어져 있다. 박을 탔더니 거기서 밥도 나오고 무슨 돈도 나오고, 나중엔 첩도 나왔다. 사실이라는 안경을 쓰고 흥부전을 읽어보니까, 도저히 믿지 못할 소리만 잔뜩 씌어져 있었던 것. 그런데 놀부를 오늘의 눈으로 본다면 전혀 딴판이었다.

근면하고, 욕심 많고, 목표가 뚜렷한 인간형인 걸 발견한 거다. "나는 부자가 되고 말 거야!"라는 강력한 목표를 내건 인간상이었다. 아주 교훈적인 것은 게으른 자기 동생 뺨을 자기 부인으로 하여금 때리게 만든 거다. 그것도 놀부 마누라가 시동생 사람되라고 때렸지, 밥주걱 부러지라고 때렸겠습니까. 최인훈 선생은 이렇듯 사실이라는 안경을 쓰고 우리나라의 설화를 새롭게 보았다. 이런 재해석 과정을 통해 그가 내린 결론은, 흥부가 한 것은 거의 믿어지지 않을 소리고, 놀부가 한 행동은 아주 긍정적으로 봐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예전에 긍정적으로 봤던 흥부를, 아주 부정적으로 보면서 놀부전을 다시 쓴 거다. 최인훈 선생 역시 소설가이다 보니까 번역투가 아닌 판소리의 '아니리 조'를 빌어 놀부전을 썼다.

소설을 읽다 보면 저절로 얼쑤 하는 소리와 함께 어깨춤이 저절로 나오게 된다. 4.4조, 7.5조 할 것 없이 우리말의 고유한 운이 탁탁 맞아 들어가 저도 모르게 속으로 얼쑤를 연발하면서 소설을 읽게 된다. 마침 연출가 손진책이 「문학」지에 실린 소설을 읽다가, 소설로 읽고 말기에는 너무 아깝다고 느끼고서 모노 드라마로 만들었다. 그래서 손진책 씨가 놀부전을 가지고 코리아나 극장에서 모노드라마로 올렸다. 놀부전을 공연했을 때 최인훈 선생님을 모시고 왔는데, 최인훈 선생이 "나는 소설로 썼는데 직접 관객을 만나 보니까 소설가가 못 느끼는 어떤 것을 맛보게 된다"는 소감을 피력하셨다. 소설가에게는 익명 독자들만 존재하기 때문에, 그 반응을 직접적으로 느끼기가 쉽지 않다. 그런데 연극으로 만들어져, 무대에서 공연되고 있는 자기 작품과 관객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커뮤니케이션에 최인훈 선생이 반해 버린 거죠.

- 작가 이강백이 본 '놀부전'

 

 

 

부모에게 똑같은 유산을 물려 받았지만 사기꾼에게 속아 거지가 된 흥부가 갑자기 큰 부자가 됐다는 소문을 듣고 놀부가 찾아와 자초지종을 묻는다. 흥부의 ‘제비 다리와 박’이야기를 듣고 놀부는 허무맹랑한 소리라고 흥부를 추궁하고 흥부는 사실은 산에서 우연히 온갖 금은보화가 든 궤를 발견했음을 고백한다. 놀부는‘반드시 화가 생길 것이니 제자리에 갖다 놓으라’고 충고하고 흥부와 함께 궤를 지고 산으로 올라가던 중 궤의 주인인 전라감사가 매복시켜둔 관원에게 잡혀 결국 옥에 갇히는 등 흥미로운 이야기가 전개된다..

 

 

 

최인훈은 「흥부전」을 재창조해서 「놀부뎐」을 썼다. 「흥부전」이 오늘날 이렇게 재창조된 것은 거기에 시대와 지역을 넘는 지혜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흥부와 놀부는 어느 시대, 어느 지역에도 공통적으로 존재하는 두 가지 인물상을 상징한다. 흥부는 선량하고 착한 인물을 대표하고, 놀부는 탐욕스럽고 이기적인 인물을 대표한다. 다시 말해 흥부는 현세의 물질적 가치보다는 우정과 선행이라는 정신적 가치를, 놀부는 양심에 근거한 정신적 가치보다는 당장의 실리와 이해 관계를 최우선으로 하는 탐욕스러운 인물이다. 이렇게 흥부와 놀부는 선악을 대표하는 정형화된 인물이다. 「흥부전」이 고전으로 읽히고 있는 것은 시대와 지역을 뛰어넘어 항상 존재하고, 나아가 대립하고 갈등하는 이런 극단적인 두 인물군을 잘 묘사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의 미덕은 돈이다. 돈이 최고의 가치이며, 그래서 현대 사회에는 물질주의가 만연해 있다. 이런 사회에서 흥부와 같은 선한 인물은 주변적인 존재로밖에 남을 수 없다.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주인공은 혈육과 양심을 저버린 채 돈으로 자기 욕심만을 채우려는 놀부 같은 인물이다. 우리는 흥부처럼 살아야 한다고 배워 왔고 또 가르쳐 왔지만, 이 사회에서의 실제 주인공은 늘 놀부가 될 수밖에 없다. 나아가 가난하고 배운 것 없는 흥부 같은 인물은 항상 놀부로부터 게으르고 못난 놈이라고 멸시를 받은 뿐이다. 최인훈이 「흥부전」을 「놀부뎐」으로 재창조한 것도 바로 이러한 시대적 풍조를 반영한 것이다. 즉 최인훈은 「놀부뎐」을 통해, 우리가 겉으로는 도덕이나 윤리 규범을 내세우고 있지만, 실제 우리가 추구하는 것, 우리의 실제 삶에서 주인공이 되는 것은 놀부라는 것을 고전의 힘을 빌려 통렬하게 풍자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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