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희곡

카릴 처칠 '버킹엄셔에 비치는 빛'

clint 2016. 4. 30. 12:44

 

 

 

 

 

 

버킹엄셔에 비치는 빛. 작가서문

 

이 잘난 구두쇠 놈들아 저희들은 형제들에게서 땅과 가축을 전부 훔쳤으면서, 너희놈들은 도둑질했다는 이유로 사람을 목메다는 구나.” - 버킹엄셔에 보다 많은 빛이 비치길, 디거 팜플렛1649.

밀레니엄에 대한 혁명적인 신념이 중세 내내 계속되었고 내전의 시기 동안 영국에서 강력하게 터져 나왔다. 군인들은 그리스도가 오셔서 지상에 천국을 세우리라는 신념 아래 왕과 싸웠다. 그러나 그 대신 수립되었던 것은 권위주의적인 의회와 아일랜드 양민 대학살과 자본주의의 발전이었다. 왕이 패배 당했던 그 얼마간 동안은 무슨 일이든 가능해 보였으며, 이 작품은 자신들의 삶을 수중에 넣은 민중들의 놀라운 흥분과, 그들을 이끌었던

자들이 소유재산이 파괴되지 않고는 자유란 얻어질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그들의 점차적인 배신을 보여준다. 푸트니 논쟁에서 크롬웰과 어튼은 소유 재산 문제를 놓고 논쟁을 벌였으며, 제라르 윈스텐리는 디거스가 공유지를 점령하도록 이끌었다: "만인 공동체가 수립될 때까지는 만인의 자유란 있을 수 없다.” 레블러와 디거스는 군대에 의해 진압되었고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가 오셔서 그들이 이루지 못했던 것을 해주시리라는 밀레니엄에 대한 남아있는 믿음에 필사적으로 매달렸다.

이 작품의 마지막 긴 장면은 랜터스지의 회의로 이들의 경제적 성적 자유에 대한 완전히 경도된 무정부주의적 신념은 왕정복고 이전의 혁명적 기운의 마지막 필사적인 분출이었다.

학교에서 가르쳐지는 단순한 '왕당파와 의회당원'의 역사는 그들의 복잡한 목표와 갈등을 의회의 좌파들에게 숨긴다. 우리는 오늘날의 민주주의로 나아가는 하나의 단계에 관해 듣지 일어나지 않았던 혁명에 대해서는 듣지 못하며, 찰스와 크롬웰에 관해 듣지만 자신들의 삶을 변화시켜보고자 시도했던 수천 명의 남녀에 관해서는 듣지 못한다. 어느 누구도 그리스도가 지상에 천국을 이루시리라고 기대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그들의 목소리는 놀라울 정도로 우리에게 가깝다. - 카릴 처칠 1978.

 

 

 

 

번역자 후기 - 홍유미

 

카릴 처칠(Caryl Churchill)은 현대 영국 극계를 대표할 만한 굵직한 여성 작가이다. 단지 여성인 작가로서 주목받는 차원이 아니라 그는 진지한 성찰과 문제의식을 지닌 위대한 작가이다. 처칠은 진정 평등한 세상을 추구하며, 사상과 기법 면에서 끊임없는 실험을 통해 상투적인 가치관을 허물고 우리의 인식의 폭과 깊이를 더하는 것을 가능하게 해준다. 처칠의 작품은 역사와 정치와 계급과 성이 총체적으로 얽혀서 문제를 제기한다. 어느 하나도 따로 분리되어 나올 수 없다. 특히 그의 작품 가운데 역사를 담은 작품들은 과거의 역사 서술에 대한 과감한 교정 작업이며, 처칠의 새로운 역사 쓰기의 의미는 그가 주목하는 시대의 영국의 역사 쓰기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현재에서 새로이 과거를 재해석하는 방법이며 현재와 미래를 변혁시키는 문제이기도 하다.

처칠의 작품 가운데 최고의 여성들(Top Girls), 비네가 탐(Vinegar Tom) 등은 한국에서도 이제는 그의 대표작으로 널리 알려져 있고 번역도 되었으며 공연도 된 바 있다. 그러나 두 작품에 못지않게 처칠의 기본적인 극 세계를 보여주는 주요 작품인 버킹엄셔에 비치는 빛은 처칠에 관한 논의에 있어 필수적인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아직 한국에서는 번역조차 시도되지 않았다. 그 점에서는 이번에 현대영미드라마학회 영한 대역 작업의 일환으로 본 작품의 번역 해설서가 만들어지게 된 것은 참으로 의의가 깊다 하겠다.

 

비교적 처칠의 초기작에 해당하는 버킹엄셔에 비치는 빛은 특히 처칠의 역사의식과 그의 극작 행위의 의미를 잘 드러내 보여주는 수작이다. 본 작품이 이해하기에 그리 쉬운 작품은 결코 아니다. 작품이 담고 있는 시대적 상황에 대한 배경 지식이 필요하며, 그것을 처칠이 어떤 식으로 극화해내고 있는가에 주목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 작품에서도 예외 없이 처칠은 역사의 영웅적 인물 뒤의 무명의 인물과 민중들의 삶에 주목한다. 그는 이전의 역사 서술이 만들어낸 씨실에 그 역사책이 소홀히 했던 날실을 얽으며 새로이 엮어낸 역사를 보여준다. 그의 작품을 통해 이 날실을 구경해 보는 것만으로도 이 작품 읽기의 의의는 충분하다 하겠다.

 

 

 

창작 배경 : 다시 쓰는 역사

처칠의 버킹엄셔에 비치는 빛1640년대의 영국을 배경으로 혁명이라는 커다란 역사적 사건을 역사 서술에서는 외면되었던 가난한 민중과 여성의 시각에서 재조명하는 작품이다. 역사책 속에서 거명되지 않았으나 혁명을 가져오는 실제적인 역할을 담당했던 민중들을 역사 속에 편입시키는 작업에 관심을 가졌던 처칠은 애초에는 십자군에 관한 것을 쓰려했다가 관심이 십자군에서부터 17세기로 옮겨졌다 한다. 이 작품의 역사적 배경이 된 시대는 정치적 측면, 종교적 측면, 경제적 측면에서 동시에 많은 변화의 와중에 놓여있던 시기였다. 찰스 1세의 절대 권력의 횡포와 의회의 대립이 극단으로 치달아, 국왕이 의회를 해산시키는가 하면, 국왕파와 의회파로 나뉘어 끊임없이 정치적 논쟁이 벌어지고 종교적 영역에서는 국교회와 청교도간의 종교적 논쟁도 거세고 제 각각의 종교단체가 출현한 시기였다. 왕당파에 대립한 의회파에는 국왕으로부터 탄압받던 청교도들이 대거 가세하여 국왕의 폭정에 전면적인 혁명을 선언하고 1642년 결국 영국 내전이 발발하기에 이른다. 이 내전에서 크롬웰이 이끈 혁명군의 승리로 의회파가 집권하고 크롬웰은 공화국 (Commonwealth) 시대를 염으로써, 절대 왕정이 붕괴하고 의회의 시대가 열린다. 크롬웰은 1649년 찰스 1세를 내란의 주동자로 지목하여 처형하기에 이르는데, 찰스 1세의 처형은 신성시 여겨온 어떠한 체제나 권력도 절대적인 진리나 가치로 신봉될 수 없음을 보여주는 역사적 사건이었다. 크롬웰이 이끈 공화국 정부는 1660년 다시 왕정복고가 이루어지기까지 18년 간 영국을 집권하고 막을 내린다. 처칠 연구가인 커즌에 의하면 '1640년대의 영국은 전례 없는 변화의 시기''왕권의 전복은 모든 권위의 형태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으로, 평범한 남녀들이 자신의 삶의 방향을 바꾸고자 시도했고 사회를 혁신적으로 재구성하는 것이 가능해 보였던 시기'였다. 처칠은 이런 중요한 역사적 변혁기를 작품의 소재로 하면서 자신의 작업이 역사 속에서 무시되어온 민중들의 관점에서 역사적 사실을 재조명하는 것이다.

 

자신의 극작 행위가 역사를 다시 쓰는 작업임을 분명히 공표하고 인지한 가운데, 이 작품은 처칠이 197653주간의 워크숍 동안 연출가 막스 스타포드 클릭tMax Stafford-Clark)과 배우들과 함께 즉흥극을 통해 공동 작업한 결과물이다. 처칠은 가난한 평민들과 여성 인물들 등 소외계층을 중요하게 담고 혁명의 뒷면의 이모저모를 에피소드 기법으로 보여

줌으로써, 각 장면들은 조그마한 개별적 사건이지만 혁명이라는 커다란 흐름의 세부적 파편들로 장치한다. 또한 처칠은 6명의 배우가 25명의 역할을 담당하게 하여 한 인물을 한 배우가 연기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장면에서는 다른 배우가 그 역을 맡아 여러 배우가 한 인물을 연기하게 만든다. 이 경우 자연스럽게 그 인물이라는 개인 자체에 초점이 가기보다는 벌어지는 사건이 중심이 되고 각 인물은 큰 흐름과 사건을 보여주기 위한 도구의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이와 같이하며 처칠은 조그마하지만 세부적인 부분들이 모두 연결되어 혁명이라는 하나의 큰 역사적 사건을 드러내도록 하고 있다.

 

 

 

작품구성

버킹엄셔에 비치는 빛의 전체 구성은 2막과 에필로그라는 큰 골격 아래에 21개의 에피소드적인 짧은 장면들로 이루어져있다. 이 골격은 혁명 전, 혁명이 진행되는 동안, 그리고 혁명 이후라는 시간적 진행 구조와 같이 간다. 12개의 장면으로 구성된 1막에서 혁명 전에 경직된 사회 구조와 질서 속에서 힘겨워하고 숨막혀하는 인물들의 상황을 파편적으로 보여준 다음, 이들이 혁명을 만들어 가는 움직임을 시작하는 모습, 그리고 그들의 혁명에 대한 기대감과 그로 인한 홍분을 담아낸다. 그 다음 단계로 1막 마지막 장면에서 혁명의 지도자들로 참가하는 이들의 논쟁 장면을 담고 이후 2막에서 그토록

큰 기대감을 자아냈던 혁명이 기대를 저버린 모습을 보여준다. 변화된 세상을 기대하고 혁명에 동참했던 이들에게 남겨진 것은 그 전과 동일한 가난과 배고픔으로 얼룩진 현실이다. 세상은 변화한 것이 없다. 변혁기를 맞아 자신의 삶의 변화를 도모했던 사람들이 사회를 새로이 만들 가능성과 희망을 뒤쫓았으나, 그 혁명 이후의 현실에 대한 환멸감으로 작품은 마감한다.

처칠은 이 작품 속에서 여러 가지 역사적 사료와 자료를 이용하고 있으며, 등장인물들 역시 역사 서술에서 거명된 인물들을 이용한다. 디거스의 팜플렛이나, 레블러의 규준, 민중합의서, 푸트니 논쟁 등등 역사적 기록물을 이용하고 크롬웰, 어튼 등 푸트니 논쟁에 참여하는 인물들 뿐 아니라 코브는 아비에제 코프(Abiezer Coppe) 혹은 코브(Cobbe)라는 랜터에 기반을 둔 인물이며, 클랙스톤 역시 로렌스 클락슨(Laurence Clarkson) 혹은 클랙스톤

(Claxton)이라는 실제 역사적 인물에 기반을 두었다. 또한 처칠은 이들과 나란히 브라더톤, 호스킨스 여인1, 2와 같이 역사 서술 속에서 등장한 바 없었던 숨겨진 인물들을 공존시켜 그 시대를 함께 했던 일반 민초들의 삶을 보여준다.

 

 

 

새로운 세상에 대한 꿈

처칠은 버킹엄셔에 비치는 빛을 이사이서가 보여주는 세상의 혼돈으로 시작한다. 땅이 깨어지고 흔들리는 공포의 상황에서 '함정''올무'가 양쪽에 있어 어느 쪽으로 피하든 어려움에 처하게 마련이고 달아나기란 불가능한 악몽의 상황을 전하는 이사야서의 구절은 바로 이 작품이 담고 있는 와해와 혼돈의 격동의 시기의 분위기를 그대로 전달해준다. 천지가 요동하는 상황에서 작품의 인물들은 개개인의 비전들을 가지고 있다 그 꿈들은 정치적 비전, 종교적 비전 등 새로운 세상을 추구하는 일환으로 계급과 부의 평등의 문제와 관련된 평등한 사회, 만민공동체에 대한 꿈과 연관되는 비전이다. 세상의 혼돈과 불공평함과 고통이 해결될 수 있는 세상에 대한 꿈은 그리스도의 재림을 통한 새로운 세상에 대한 비전으로 나타나고 구체적으로 디거스의 꿈, 레불러들의 꿈, 랜터들의 꿈들로 표출된다. 모두 이 땅에서의 계급질서에 기반 한 불평등한 현실을 대체하려는 대안적 꿈들이다. 진정

평등한 사회, 재림하신 그리스도와 더불어 모두가 흰 옷을 입고 행복을 누릴 수 있는 세상, 즉 밀레니엄에 대한 비전인 것이다. 현재의 불공평한 계급 사회 질서 속에서 고통당하는 모습은 먼저 하인인 클랙스톤의 상황을 통해 제시된다. “교구목사가 하인(클랙스톤)에게 이야기하다장면에서 종교적 권위를 상징하는 교구 목사와 그를 섬기는 하인 클랙스톤의 대화는 위계질서 구조를 분명히 해주는 가운데 지배당하는 자는 내세에 마주할 천국을 꿈꾸며 자신의 힘겨운 현실을 그대로 받아들여야함이 강조되고 있다. 가난한 민중들에게는 주어진 고통이 그들의 삶의 조건임을 그대로 수긍해야함이 목사의 입을 통해 되풀이 강조된다. 목사는 고통당하고 눈물 홀리는 것이 바로 천국에 이르는 길이라는 식으로 주입하여 자신들의 지배와 억압을 정당화시킨다. 특히 목사는 이 전쟁이 발생한 이유는 사람들이 현세에서 천국을 누리고자 하기 때문이라고 설파하면서 이 장면에서 와인을 마시고 오렌지를 먹고 있는 반면, 하인인 클랙스톤은 묻는 말에 수긍하는 답변이나 하며 그가 던져주는 오렌지 하나를 특별히 베풀어주는 은혜로 감사해야 하는 상황이다. 게다가 대화 중에 언급되는 하인의 병든 아이는 빈민들의 고난과 가난을 죄 없는 이이의 병든 상황을 통해 비판적으로 바라보게 해주는 역할을 한다. 그 아기가 설사 죽는다 할지라도 그냥 수긍하고 순종하는 길 밖에 이들에게 주어진 길이란 없다는 목사의 말에서 이는 더욱

첨예하게 드러난다. 이런 상황의 클랙스톤이 꿈꾸는 새로운 세상의 비전은 바다가 없는 세상이다. 클랙스톤에게 현실은 자신을 삼켜버리고 익사시키는 바다이다. 이 바다에서는 부자와 그 대리인들인 목사, 재판관, 지주 등은 물고기처럼 헤엄치지만 가난한 사람들은 익사하는 길 밖에 없다. 클랙스톤은 자신은 그 바다에서 익사한 사람이지만 새로운 천국과 지상에서는 바다가 없을 것이므로 호흡할 수 있을 것이라고 단언한다.

또한 곡물 상인인 스타가 의회를 지지하며 신병을 모집하는 장면에서도 새로운 세상에 대한 꿈이 천명된다. 스타는 그리스도가 지상에 오실 것이고 지상에서의 천국인 예루살렘을 세우실 것이니, 적그리스도를 패배시키기 위해 군대에 합세한다면 그리스도의 성도들로서 예수와 함께 수천 년을 봉치하게 될 것이라고 연설한다. 스타의 연설을 듣고 브릭스는 자신의 이름을 적어 넣어 군에 자원한다. 스타는 군에 자원한 브릭스에게 그가 색슨족임을 강조하며 그에게 정체성을 부어 넣어준다. 지배자와 정복자들의 이야기는 알려져 있지만 빈민은 대개 기록된 역사가 없었는데, 브릭스는 그들이 투쟁하는 이유가 민족적인 정체성과 관련된 것으로 파악하여 색슨족의 대의명분과 동일시함으로써 개인적 역사와 계급적 역사의식을 획득한다. 스타와 브릭스를 통해 이들의 새로운 세상에 대한 꿈은 자신의 정체성 회복과 자각의 문제와 결부되어 있음이 강조된다. 그리고 그것을 위한 전투는 서로가 적이 아니라 적그리스도와 대항하는 것이고 결국 밀레니엄을 실현시키는 문제와 결부된다. 이에 대한 최고의 희망찬 결의와 꿈은 휘트만의 시를 인용하는 부분에서 절정에 이르게 된다. 휘트만의 시는 일개의 모든 개개인에게 의미를 부여한 가운데 세상 만물 모두가 아름답고 의미 있는 것임을 노래한다. 이제 세상은 무엇이나 가능해 보이는 상황으로 비추어지는 가운데, 중요한 것은 이 작품 속의 인물들이 단순히 꿈만 꾸는 것이 아니라 꿈을 현실로 바꾸기 위한 실제적 행동을 감행한다는 점일 것이다.

코브가 갖는 비전 장면은 소재로 가져온 역사적 인물인 아비에제 코프가 쓴 불타며 날아가는 두루마리에서 나오는 말들을 그대로 이용하고 있다. 코브의 중심 비전은 하나님이 외적인 하나의 힘이 아니라 개개의 남녀 속에 존재하는 하나님 그리고 자기 긍정과 실현의 내적 수단인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선택된 소수만이 구원받을 수 있다는 종교적 입장과 달리 이제 사람들은 모두가 구원의 대상이며 하나님은 외부에 군림하는 존재로 자리하고 계신 것이 아니라 우리 속에 우리 주위의 만물 속에 함께 존재하고 계시는 분이라는 믿음 하에 그리스도의 재림의 비전을 지니고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심을 꿈꾸고 기다리는 것이다.

 

 

 

여성 문제: 역사 속의 여성들

처칠은 이 작품에서 기존의 역사 서술의 교정 작업의 일환으로 역사책 속에서는 부재하나 역사적 사건의 현장에서 공존했던 여성인물들을 창조한다. 처칠은 이 작품 속에서 크게 두 유형의 여성을 부각시켜 보여준다. 하나는 가장 핍박받는 집단으로서의 여성의 모습이고 다른 하나는 지배 질서를 전복시키는 새로운 목소리를 내는 여성의 모습이다. 여성은

가난과 성차별의 이중적 억압 속에 고통당한다. 커즌이 지적한 바대로 빈민이 위계질서 구조의 하부를 구성한다면 여성은 그 밑바닥에 있다. 처칠은 여성이 가난함의 덫뿐 아니라 여성의 불결함과 본질적 사악함이라는 전통적인 남성이 부가한 견해의 덫에 걸려 있음을 보여준다''. 이는 브라더톤을 통해 잘 그려지는데, “마가렛 브라더톤 심문 받다라는 장면은 법정이라는 공권력이 행사되는 장에서 두 명의 재판관을 등장시켜 권위의 힘을 더욱 가중시켜놓은 가운데, 마가렛 브라더톤이라는 떠돌이 여성을 심문한다. 당시 공유지를 엔클로저함으로써 땅을 떠나게 되어 집을 잃고 방랑하며 가난에 허덕이는 민중들을 대변하는 가운데, 브라더톤은 타지에 와서 구걸하는 죄로 심문을 받는데 가난한 그녀로서는 생존을 위해서는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구걸 외에는 생계 수단이 없는 그녀에게 주어지는 형은 추방령과 태형이었다. 음식을 훔친다면 그녀는 교수형 당하게 되고 구걸을 하면, 채찍질 당하게 될 것이며, 어느 쪽도 하지 않는다면 굶어 죽을 상황이다.

또 다른 유형의 여성은 호스킨스를 통해 그려지는 새로운 가치관의 선구자로서의 여성의 모습이다. 그녀는 권위의 상징인 교회라는 현장 속에서 기존의 종교에 정면 대립하면서 교회 안에서 목사에게 맞서 여성에게 금지된 사항을 깨고 실제로 말을 하는 여성이다. “호스킨스가 목사 말을 가로막다라는 장면에서 호스킨스는 교회에서 남성들만이 설교할 수 있고 성경을 해석할 권리를 가져야 한다는 견해에 반대해서 이야기한다. 호스킨스는 설교할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며 남녀 모두 가치 있는 존재라는 메시지를 줄 권리를 주장한다. 그녀는 금기를 깨고 새로운 사상을 내뱉는 혁명가이자 개혁가의 모습이다. 호스킨스는 선택받은 소수만이 구원받는다는 목사의 주장에 반대하여 하나님은 우리 모두에게 계시다는 것과 만인이 구원받을 수 있다는 주장을 펼친다. 이에 대한 목사의 반응은 강제 축출이다. 그러나 교회에서 물리적으로 쫓겨나온 호스킨스는 노상설교로 자신의 종교적 사상을 설파하며 성적 사회적 인습을 벗어난 삶을 영위한다.

처칠은 또한 가난으로 고통당하는 민초들의 모습을 자신의 아기를 버려야하는 어머니의 모습을 통해서 보여주기도 하지만, 또한 여성이 자신의 정체성을 깨닫는 모습을 제시해줌으로써 여성과 자기 인식의 문제를 부각시켜준다. “두 여자가 거울을 들여다보다.” 에서 여인 1, 2는 대저택에 들어가 노르만 문서를 태우고 물건을 집어온 이야기를 나누고 그 집에서 자신의 전체 모습을 비추어주는 거울에 관한 이야기를 나눈다. 자신을 거울에 비추어보는 행위는 객관성과 정체성 모두를 획득하기 위한 것이며'거울 속에서 그 여성은 새로운 자아가 반영되고 새로운 종류의 사회에 대한 비전이 반영되는 것을 본다.'

 

 

 

혁명 그 이후: 변혁에 대한 좌절

처칠은 1막의 마지막 장면에 실제 역사적 사건이었던 유명한 푸트니 논쟁을 설정하여, 이 장면을 통해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자들의 이해관계가 모두 동일한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이는 결국 혁명이 철저한 혁명이 되지 못하고 여전히 가난한 민중들의 억압받는 삶은 계속될 것임을 제시해준다.

164710월과 11월에 있었던 푸트니 논쟁에서 레인보러우와 와일드만, 섹스비는 자신들을 지배하는 법을 제정하는 사람들을 선출할 권리가 있어야한다고 주장하는 반면, 크롬웰, 어튼은 사유재산 권리를 찬성하고 국왕을 밀어내고 그 자리를 이을 자들이 또 다른 방식으로 사회의 하층민들을 구속할 여지가 엿보인다. 여기서 혁명이 그 사회의 모든 것을 변화시킬 철저한 변화는 되지 못함이 예시된다.

그리고 2막은 새로운 사회에 대한 꿈과 희망이 허물어지는 것을 보여준다. 세인트조지 힐에서 공유지를 집단 경작함으로써 새로운 사회를 구성하려는 디거스의 시도가 좌절되는 모습, 레블러의 봉기를 군대가 진압하는 것이 이야기된다. 그리고 함께 공동의 적을 향해 같은 민족적 정체성을 안고 전투에 임했으나 브릭스의 편지 쓰기를 스타가 저지하는 모습을 통해 결국 두 사람간의 신분적 차이에서 서로 다른 길을 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 제시된다. 또한 브릭스는 아일랜드 사람들을 반역자로 보는 스타의 견해를 거부한다. 그에게 아일랜드 사람들은 자유를 위해 투쟁하는 중이며 그 자신이 한때 군대가 영국에서 하고 있다고 믿었던 것과 동일한 것이다. 나아가 2막의 4장은 새 지주가 된 스타와 그에 빌붙고 아첨하는 교구 목사의 모습을 보여준다. 전쟁 후 스타는 전쟁 전의 지주의 재산을 차지하고 결국 사람만 바뀌었을 뿐 체세는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이다.

혁명 후에도 어려운 민중들의 삶이 계속됨을 처칠은 아이를 버려야하는 여성을 통해 제시한다. "여자가 아기를 버리다.”라는 장면은 변화를 위해 혁명이 일어났으나 여전히 민중들의 삶은 가난으로 얼룩진 것임이 자신의 아기에게 젖을 먹일 수 없을 만큼 가난과 굶주림에 처한 여자가 결국 아기를 버리기로 선택하는 것을 통해 제시된다. 다음 단계로 처칠은 고기를 사러온 손님에게 분노를 삼키며 이야기하는 푸줏간 주인의 입을 통해 부자들이 여전히 배불리 매일 밤, 고기로 배를 채우는 반면, 가난한 민중들은 굶주리고

그들의 아이들은 굶어죽는 상황임을 강력히 고발한다. 나아가 다음 장면에서는 각자의 꿈을 추구하였던 자들의 시도가 잔인하게 짓밟히고 실패함이 레블러 지도자인 로키어의 장례식 장면을 묘사하는데서 극대화된다. “집회장면은 새로운 형태의 예배의 모습을 보여주는 랜터스의 집회로 희망이 마지막으로 가물가물 거리는 것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랜터스들은 이 장면에서 개개인의 소유와 사유 재산권을 거부하고 모든 것의 공유를 천명한다. 또한 각각의 개인과 만물의 내재적인 가치를 긍정하고 그 모든 것에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을 인정한다. 그들은 자아를 감금하고 억압하는 죄로부터의 자유를 선언하고 인간을 묶는 소유물로부터의 자유를 선언하고 소수만이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만인이 구원 대상이며 각자가 사랑 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 존재임을 천명한다. 아기가 태어난 날 아기를 죽였다는 자신의 죄의식에 가두어져 있는 브라더톤에게 브릭스는 아기의 죽음이 그녀의 죄가 아니라고 이야기해주고 클랙스톤은 그녀의 본질적인 선함을 지적해 주면서 하나님이 그녀에게도 또한 거하시며 그녀는 사랑스럽고 완전한 존재라고 말해준다. 그리고 모든 사람이 브라더톤을 만져줌으로써 브라더톤은 그들의 예배 의식의 중심이 되는데, 이는 자신의 가치를 회복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혁명이 실패로 끝난 이후의 모습을 보여주는 에필로그에서 인물들은 왕정복고 이후 자신들의 삶에 관해 이야기한다. 호스킨스는 그리스도께서 오셨는데 아무도 눈치 채지 못했노라고 하고 코브는 자신이 하나님이라고 주장했다가 신성모독 법안에 의해 재판에 회부된 이야기를 들려주고 브라더톤은 자신이 빵을 훔쳤으나 다른 여자가 잡혀간 이야기를 함으로써 여전히 절도로 생계를 유지하는 현실임을 보여준다. 한편, 브릭스는 많은 사람들이

먹을 수 있도록 자신이 먹는 것을 점점 포기하고 지금은 자신이 들판에서 거주하고 있으며 누가 그를 보러 오면 사람들이 가버릴 때까지 꼼짝 않고 있다고 한다. 클랙스톤은 바르바도스로 떠났으며, 그곳에서 그가 떠난 세계에 대한 소식을 이따금 듣게 된다고 한다. 자신의 가장 큰 바램은 아무것도 안보고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이라는 클랙스톤의 마지막 대사로 끝남으로써 이 작품은 희망이 모두 꺼진 상태로 끝나고 부동과 침묵의 이미지들로 끝맺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