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희곡

레오니트 안드레예프 '스토리친 교수'

clint 2016. 4. 18. 10:33

 

 

 

 

 

 

 

 

문학적 격동기였던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를 러시아에서는 은세기라고 규정한다.

이 시기의 예술과 문학은 모순적이고도 다의적인 당대의 시대상을 그려낼 수 있는 새로운 방법을 열정적으로 찾고 있었는데, 레오니트 안드레예프 또한 이러한 목적을 가지고 작품 활동을 해 가던 선구적 작가들 중 하나였다그는 자신의 논저 연극에 관한 서한들에서 사실주의극과 조건 극에 빠져 있던 당시 연극에 일단의 개혁이 필요하다고 역설하면서, 삶 자체가 외적인 행동으로부터 점점 더 내면 깊은 곳으로 옮겨 가고 있음을 언급한다. 안드레예프는 이를 표현하기 위한 수단은 전통적인 심리극이 아니라 '범심론 사상에 따라 개혁된' 심리극, 즉 범심론 극이 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펼쳤다. 범심론 극은 당시 유행하고 있었던 '드러나는 기분을 표현하고자 하는 극이 아니라, ’숨어 있는, 전체적인 기분을 나타낼 수 있는 극이었다이에 따라 안드레예프는 철학용어인 범심론'을 문학 이론에 도입하게 된다. 범심론에 따르면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항상 개별적인 실체로서 형상화되어 있으며, 각각의 실체 안에는 온 우주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또한 우주는 그 실체 안에서 그저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그 실체와 함께 발전을 이루어 나간다. 이는 동학의 인내천사상과도 닮아 있는데, 범심론에서 특히 강조하고 있는 점은 아무리 하찮은 것이라 할지라도 이 세상에 생명이 없거나 피상적인 것은 없다는 것이다. 레오니트 안드레예프는 이러한 철학적 범심론을 연구해 최초로 문학 이론에 도입한 작가이며, 이런 맥락에서 안드레예프를 범심론극의 창시자로 볼 수 있다.

안드레예프 작품세계에서 범심론이 형성되고 발전해나간 것은 1890년대에서 1900년대 사이의 일이다. 그러나 안드레예프가 의식적으로 자신이 정립한 문학 이론으로서의 범심론을 완성해 가고 도입했던 것은 1910년대 일로, 이 시기에 집필된 범심론 희곡으로는 <예카테리나 이바노브나>, <생각>, <따귀맞는 이>, <개의 왈츠> 그리고 <스토리친 교수>가 있다.

 

 

 

<스토리친 교수> 에서 범심론은 주인공 스토리친이 찾아다니고 있는 불멸성으로 표현된다. 스토리친 교수는 자신을 사랑하는 공녀 류드밀라 파블로브나에게 말한다.

당신이 시집가게 되면. , , 언젠간 가시겠지요. 그때는 당신을 사랑하게 된 그 사람의 이름으로, 제 사랑의 이름으로, 제 평생의 이름으로 저는 당신께 고할 것입니다. 불멸의 것을 지키시라고 말입니다. 기억하십시오. 불명성이 있을 때만 여성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낳을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음 때는사람의 아이들이 태어날 뿐이지요..”

스토리친은 아내가 이러한 불멸성을 가진 여인이 되기를 바라며 그 어떤 강의보다 더 많은 열정과 애정을 담아 그녀를 가르쳤다. 그러나 그 결과 그가 얻게 된 것은 바람난 아내와 강탈당한 재산, 그리고 아내의 정부를 닮은 막내아들이었다. 자신을 향한 공녀의 사랑을 알면서도, 그리고 자신 또한 공녀를 사랑하면서도, 스토리 친은 아내와의 신뢰를 깨뜨릴 만한 행동은 절대로 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가 절친한 친구인 텔레마호프와 아내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자신의 사상과 아픈 기억까지 모조리 다 뱉어낼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공녀 앞에서였다. 스토리친은 아름다운 삶, 불멸성을 가진 삶을 해칠 수 있는 거짓이란 존재하지 않기를 무의식적으로 원하고 있었으며, 그렇기에 그러한 거짓을 발견하게 된 순간 분노보다는 자책감과 자괴감에 빠져 버린다. 스토리친은 아내가 아름다움과 불멸성을 가진 여인이 되기를 원했지만, ‘화장이 매우 짙으며' 졸라맨 코르셋 때문에 '숨소리가 거친' 아내는 책에만 빠져 있는 고고한 남편보다 자신을 함부로 대하는 '비열한' 사비치에게 더욱 의존하는 여자가 된다. 하지만 이러한 아내의 외도에 궁극적인 책임이 있는 것은 '넘쳐흐를 만큼' 쌓인 책들 속에서 아름다움과 불멸성만을 추구하느라 사랑받고 싶고 위로받고 싶어 히는 아내를 외로움과 고통 속에 내버려 두었던 스토리친 자신이었다하지만 스토리친은 아내의 이러한 고통과 외로움을 이해하지는 못한다. 자신을 함부로 대하더라도 힘든 순간마다 옆에 있어 주었던 비열한에게 더욱 마음을 내줄 수밖에 없었던 그녀의 고통과 외로움을 말이다. 스토리친을 괴롭히는 것은 정결한 여인이었던, 자신에게 진정한 친구가 되어주었던 아내가 그러한 옛 모습을 잃어버렸다는 사실뿐이었다.

아름답고 정결한 세계를, 그리하여 불멸성을 지니고자 했던 한 인간은 그렇게 주변으로부터 기만당한 채, 그리고 스스로를 기만한 채 멸망해 간다. 그 어떤 고고한 이상도, 그 어떤 위대한 업적도 스토리친을 멸망에서 구원하지 못했다. 그가 그토록 찾아 헤맸던 불멸성은 이상이나 학문 속에 들어 있는 게 아니었던 것이다그는 자신을 바라보는 아내의 따뜻한 눈 속에서, 자신에게 달려오는 아이들의 밝은 웃음 속에서 그 불멸성을 찾았야만 했다. 그리고 이를 위해 학문적 위업을 이루는 데 온통 쏟아부었던 시간을 조금씩이라도 할애해야만 했던 것이다. 그러나 드높은 이상을 가진 한 인간은 가리개를 쓴 경주마처럼 이상만을 향해 내달렸고, 결승점에 도착해 기쁨을 누리기도 전에 자신이 완전히 혼자라는 사실을, 누군가로부터 기만당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주변인들에게 기만당했다고 생각했던 스토리친을 실제로 기만한 것은 그 자신이었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가족과 지인들의 배신보다 더 강하게 스토리친의 뺨을 후려친 기만이었던 것이다.

 

 

 

  역자와 일문일답 

- 부부에게 무슨 문제가 생긴 것인가?

옐레나가 내연 관계인 사비치와 함께 남편 몰래 공금을 횡령했다. 스토리친이 아내의 외도 사실을 알았다.

 

- 사비치가 누구인가?

스토리친 집에 드나드는 손님 중 하나다. 중학교 교사로 미남이지만 뻔뻔하고 무례하다.

 

- 옐레나는 왜 그에게 끌렸나?

그녀를 불쌍히 여기고, 그녀도 사람이란 걸 이해해 준 유일한 사람이었다. 어느새 책에만 빠져 있는 남편보다 그에게 더욱 의존하게 됐다.

 

- 남편 책임인가?

불멸성을 이상적인 아름다움으로 여긴 스토리친은 아내도 불멸성을 갖춘 여인이 되길 바랐다. 온갖 열정을 쏟아 그녀를 가르쳤다. 그런데도 그녀가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자 이상을 찾아 책과 학문에 파묻혔다.

 

- 아내의 외도를 어떻게 알게 됐나?

친구가 알려 주었다. 그는 현실을 직시하라고 충고했다. 스토리친만 빼고 모두가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 사실을 안 그의 반응은?

자괴감에 빠진다. 그는 아름다운 삶, 불멸성을 가진 삶을 해칠 수 있는 거짓이 존재하지 않기를 무의식적으로 바랐다. 하지만 자신을 둘러싼 거짓에 스스로 원인을 제공했다는 것을 깨닫고 자책한다.

 

- 그와 아내의 관계는 어떻게 달라지나?

둘 사이에 사비치가 끼어들어 무례하게 굴면서 갈등이 더욱 깊어진다. 스토리친은 술을 잔뜩 마시고 집을 나온다.

 

- 어디로 가나?

친구 집이다. 하지만 그곳도 편히 의탁할 데는 못 되었다.

 

- 무슨 일이 생기나?

사비치가 들이닥쳤다. 스토리친을 데려가겠다는 이유였다. 그는 이미 스토리친의 집안일에 깊숙이 개입해 주인 행세를 하고 있었다.

 

- 스토리친의 반응은 어땠나?

음주와 흥분으로 기력이 많이 떨어진 데다 비까지 맞은 상태였다. 원래 심장이 약했던 그에게 이 모든 상황은 받아들이기 힘든 치명적 충격이었다. 결국 쓰러졌다.

 

- 불멸성은 찾지 못한 것인가?

자신을 바라보는 아내의 따뜻한 눈과 아이들의 밝은 웃음에서 그것을 찾아야 했다. 하지만 그는 이 모든 것을 외면한 채 이상을 향해 내달렸다. 그 결과 자신이 완전히 혼자이며 누군가로부터 기만당해 왔다는 사실만 깨달았을 뿐이다.

 

- 레오니트 안드레예프는 누구인가?

은세기라 부르는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러시아에서 작품 활동을 펼친 선구적 작가다. 범심론을 문학 이론으로 완성하고 범심론극을 선보였다.

 

- 범심론극이 무엇인가?

아무리 하찮은 것이라 할지라도 생명이 없거나 피상적인 것은 없다고 한 철학적 범심론을 도입한 극이다. 당시 유행하던 드러나는 기분을 표현하기보다 숨어 있는, 전체적인 기분을 나타내려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