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라이스커르헨이란 작은 마을의 여선생은 엘리자베트라는 어린 학생을 통해
자베트라 불리는 말하는 까마귀 이야기를 듣게 된다. 여선생은 말하는 까마귀의 존재를
믿지 못하고 엘리자베트의 집으로 찾아간다. 엘리자베트의 가족을 만난 여선생은
그녀의 어머니로부터 자베트를 처음 만났던 때의 이야기를 듣는다. 그 이야기를 들은
여선생은 자베트를 세상에 알리면 자신이 세상에 유명해질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 욕심 때문에 자베트를 만나 대화를 나누고 다른 이들에게 자베트의 존재를 믿게
하고자 사진을 찍는다. 자베트 이야기를 통해 여선생은 자베트의 세계를 이해하려하지만
오히려 그녀가 깨닫는 것은 인간에 대한 새로운 이해일 뿐이다. 다른 이들에게 자베트의
존재를 믿게 하고자 찍은 사진속에는 자베트가 나오질 않고...
어느 날부터 엘리자베트가 학교에 결석한다. 여선생은 우연히 엘리자베트 책상위에 있는
쪽지를 보고자베트의 죽음을 전해듣게 된다. 그녀가 작성한 보고서는 증거가 없다고 어느
곳에서도 실어주지 않았지만 그녀는 자베트의 이야기를 통해 삶이 행복한 전환을 했다고
고백한다. 자베트의 이야기를 알리기 위해 학교장과 공동작업을 하는 동안 싹튼 애정은
그녀 삶의 전환점이 된 것이다. 그러나 자베트와 우정을 나누고, 함께 생활하던
엘리자베트는 자베트의 죽음을 인정하지 못하고 숲속으로 자베트를 찾아다닌다.
여선생이 집으로 다시 찾아왔을 때 엘리자베트는 동물의 눈에서만 느낄 수 있는
그런 황량하고 슬픈 눈길로 여선생을 쳐다본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는 이성적 논리로 해명되지 않는 많은 일들이 존재한다.
과학과 문명이 발전할수록 인간은 눈에 보이는 것, 현실에 실재하는 것,
이론적으로 규명 가능한 것들만을 믿으려 한다. 그러나 우리가 짐작도 할 수 없을 만큼
거대한 이 우주에서 한낱 티끌만큼의 존재도 되지 못하는 인간의 능력으로 어찌
세상의 운행을 다 알 수 있을까! 보이지 않는 세계, 영적인 세계, 초현실적인 세계,
초자연적인 세계에 대한 신비로움을 망각한 현대인들은 너무나 메마르고 각박한
삶을 살아간다. 인간 같은 까마귀, 까마귀 같은 인간이 등장하는 연극이 있다.
독일 작가의 작품답게 철학적-사변적인 주제를 다루지만 매우 우화적이고
동화적인 형식에 담아내어 어렵지는 않다.

자베트는 거의 벌거벗은 몸으로 까마귀를 연기한다. 까마귀의 의상이나 분장을 하지 않고서도 그는 까마귀다운 자태와 몸짓으로 까마귀도 인간도 아닌, 매우 그로테스크한 반수반인의 존재를 표현한다. 한 옥타브 고양한 음성, 약간 쉰 듯한 목소리로 어눌하면서도 과장한 어투를 구사하는 자베트의 언어는 모호한 가운데서도 심각한 철학적 숙제들을 던져놓는다. 자베트가 인간의 언어를 배우기 시작하면서 그의 서투른 말을 통해 우리는 언어의 한계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인간은 언어를 통해 사물을 규정-인식하며 세계를 배워간다. 언어를 통해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는 세계는 불완전하고 불명확하며 불투명할 뿐이다. 그러나 언어 자체가 얼마나 불완전한 것인가? 그 제한된 언어로 인해 우리는 숱한 오해와 분쟁을 낳는다. 자베트가 처음 엘리자베트의 가족과 만났을 때는 말이 없이도 서로 충만한 행복감을 느낄 수 있었다. 특히 엘리자베트의 어린 눈을 통해 보이는 자베트는 동화 속 세계의 현현에 다름 아니다. 신비로운 존재, 꿈같은 현실, 그를 통한 시간과 공간의 초월, 직관적이고 영적인 교감 속에서 그들은 한순간 아주 행복하였다. 하지만 자베트가 인간의 언어를 배우기 시작하면서 그는 오히려 세계에서 단절과 소외를 경험한다. 그는 아무것도 정확하게 설명할 수 없고, 누구와도 완전하게 의사소통할 수 없다. 언어의 구조 속에 들어가지 못한 것들은 점차 잊어버리고 망각을 통해 숱한 상실을 체험한다. 탄생, 사랑, 죽음, 불멸 등의 단어를 배우면서 자베트는 인간이 너무나 유한한 존재라는 것을 깨닫고, 그들을 연민의 시선으로 응시하며 어느 날 홀연히 사라진다. 사람들은 자베트가 죽었다고 믿지만 어쩌면 그는 우리의 현실계를 포함한 더 커다란 어떤 세계로 돌아갔는지도 모른다.

귄터 아이히 작 <자베트>는 방송극이다. <자베트>는 패전국 독일 국민들에게,
전쟁 후, 잃고 행방불명의 생사를 모르는 친구, 친척 그리고 부모일가 친척들의
빈자리를 위로하는 방송극임과 동시에, 정치, 종교적 색채가 짙은 극이다.
'<자베트>는 엘리자베트의 줄인 말로 , 엘리자베트의 속마음 일 수 있으며 ,
그것은 절대적 존재 , 또는 신, 그리고 타아 일 수 있는 것이며, 또한 귄터 아이히 자신이
이<자베트>공연을 통해 일관되게 말하고 싶었던 "게르만 민족의 위대성" , "나치 정부" ,
"히틀러 총통" , "전쟁에서의 독일"로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변화는 스스로 행복'을 찾아 나설 때 이루어질 것이며 그것은 자신을 되돌아 볼 줄 아는
반성과 인간에 대한, 자연에 대한 관심과 이해로 시작할 것이다.
자베트가 플라타너스 나뭇가지의 파란 잎새로 달린 채 사라진다는 것은
우리들이 가지려고 하는, 집착하는 것에 대한 반성을 일깨운다. 그것은 비어있지만
정신적 충일의 상태를 말하는 것이며, 빈 마음은 있는 그대로를 볼 수 있는 시선일 것이다.
이를 위해 본질적이고 가장 중요한 것, 순수한 정신과 그를 통한 마음의 자세에 대해
환상적이면서도 동화 같지만, 준엄한 일깨움을 남기고 있다.

'외국희곡' 카테고리의 다른 글
| 도미니크 보나 '에밀아자르의 탄생' (1) | 2016.03.04 |
|---|---|
| 필리핀희곡 '노리유시를 기다리며' (1) | 2016.03.04 |
| 토르아게 브링스베드 '유리산' (1) | 2016.03.01 |
| 샘 셰퍼드 '천사의 도시' (1) | 2016.03.01 |
| 조나단 라슨 '뮤지컬 렌트' (1) | 2016.02.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