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부로 극을 중간부터 시작한 의미를 알 수가 없었다. 분명 세익스피어가가지는 의미가 있다고 생각을 한다. 극의 완성도가 좀 떨어진다고 할 수는 있지만 사랑과 전쟁이라는 두 가지 주제 중 어느 하나도 가슴에 와 닫지 않았다.‘트로일러스와 크레시타’는 배반의 연극이라고 한다. 세익스피어가 쓴 수많은 작품 중 4대 비극기에 쓰여진 희극으로 끝이 개운하지 않은 극이 있다고 한다. ‘All's Well That End's Well’, ‘Measure for Measure’, 그리고 ‘Troilus and Cressid’이 그 세 작품이다.
이 작품 역시 독특하고 아주 색다른데, 첫 번째 문제는 도대체 이 작품이 희극이냐 비극이냐 하는 것이다. 아니, 그 둘 중 하나로 분류하기에도 어딘가 찜찜한 구석이 많은 작품이라서 희극적 비극, 비극적 희극, 기분 나쁜 코미디, 허무한 비극... 별별 현대연극에나 어울릴 별명들이 다 붙었다. 셰익스피어가 일부러 모든 장르를 다 무시한 작품으로 쓴 것인지, 아니면 인생과 세상이란 것이 얼마나 복잡한 것인지 보여주려고 마음먹고 유명인의 한심한 면, 영웅들의 바보 같은 면, 사랑의 불확실성 등에 포커스를 맞춰서 만든 작품인지 알 수 없다.
처음 나왔을 때는 이 작품을 단순하게 역사극으로 치더니 2절본으로 출판된 때는 비극으로 분류됐으나 요즘은 이 작품을 '메져 포 메져'(Measure for Measure), '끝이 좋으면 모두 좋다'(All's Well That Ends Well)와 함께 블랙코미디 혹은 문제극으로 분류한다. 다시 말해서 이 세 작품은 '뜻대로 하세요'나 '윈저의 아줌마들'과는 전혀 다른 괴상한 코미디들이다.

'트로일러스와 크레시다'는 '햄릿'(1601년) 직후인 1602년 근처에 쓴 것으로 그해 겨울에 공연되었을 것이라고 하는데 공연에 대한 기록은 어디에도 없다. 그리고 어떤 이유에선지 다른 비극작품들이 다 출판된 다음인 6년 뒤에야 출판되었다. 이런 것을 분석한 비평가들은 이 작품이 단 한번 공연되었거나 아니면 아예 공연이 되지 못했을 것이라 주장한다. 그리고 그 이유는 아마 셰익스피어가 당시 궁정의 어떤 인물이나 유명한 극작가를 이 작품 속의 어떤 인물로 풍자했기 때문으로 짐작한다. 아무려나, 모두 이 작품이 가진 골치 아픈 문제점을 입증하는 일화들이다.
이 작품의 첫 번째 소스는 호머(Homer)의 일리아드(Illiad)다. 이 유명한 고대 그리스 서사시는 영국에서 이미 15세기에 윌리엄 캑스턴(Caxton)의 번역판이 나왔고, 트로이 전쟁에 관한 이야기도 여러 가지가 나왔다. 두 번째 소스는 중세 이탈리아 작가 보카치오((Giovanni Boccaccio 1313-1375)가 쓴 '일 필로스트라토'(Il Filostrato)다. 1338년경에 쓴 것으로 추정되는 이 작품은 8행의 짧은 영웅시로 '일리아드' 속에 나오는 트로일로스와 믿을 수 없는 여자 크리세이다의 이야기를 중세 스타일로 표현한 것이다. 그런데 이것을 14세기에 초서(Chauser)가 다시 서사시 '트로일러스와 크레시다'로 쓰면서, 변심한 여인 크레시다를 동정적으로 바꿔서 표현했다. 이런 작품들도 역시 셰익스피어 시대의 사람들에게는 잘 알려진 얘기였다. 그러니 당시 관객들은 트로이 전쟁이라던가 헥토르의 죽음 그리고 크레시다의 변심 등을 잘 알고있었다. 이렇게 참고할 작품이 많아서 그랬는지 이 작품은 길이도 아주 길어서, 대사는 무려 3496줄이나 되고 셰익스피어 작품 중 세 번째로 긴 작품이다.

트로이 전쟁은 고대 그리스 역사에서 중요한 사건이었다. 중동의 왕자가 지중해 친선방문 길에 그리스에 들렀다가 아름다운 퍼스트 레이디 아닌 스파르타 왕비와 눈이 맞아서 함께 달아났다. 이에 화가 난 그리스는 연합군을 편성하여 중동으로 쳐들어갔다. 이것이 트로이 전쟁이다. 좀 자세히 설명하자면 트로이의 장동건으로 불리던 미남 왕자 파리스가 스파르타의 왕비 헬렌을 꼬셔서 함께 이스탄불(트로이)로 달아나자, 졸지에 마누라를 뺏긴 스파르타의 왕 미넬라우스는 형인 아가멤논에게 탄원했다. 그렇지 않아도 트로이가 평소에 주석과 구리 등의 무역에 방해를 하면서 그리스 청동기 시대의 발전을 막기 때문에 틈만 나면 '손 좀 보려고' 벼르던 차에, 껀수가 생긴 그리스는 모든 도시국가에서 차출한 연합군을 편성하여 트로이로 쳐들어갔다.
그리스 팀의 스타플레이어는 아킬레스였고 트로이 군의 주전은 헥토르였다. 양 팀은 무려 10년간을 싸웠다. 아니, 실제로 싸운 것은 별로 길지 않았다. 그리스 연합군이 싸우려고 먼길을 왔는데도 트로이 군은 환영행사는커녕 성문을 잠근 채 코빼기도 비치지 않고 안에서 배꼽춤이나 즐기고 있었다. 그러니 그리스 군은 할 일 없이 성문 앞 비치에 파라솔과 텐트를 치고 일광욕이나 하는 수밖에 없었다. 가끔 근육이 쑤시고 몸이 근질거리는 그리스 군바리가 트로이 성에 대고 욕을 퍼부으면 누군가 나와서 싸움이 벌어지기도 했지만 그건 1년에 한 번 있을까말까 드문 일이었다. 그래서 결국 세월이 10년이나 흘러도 전혀 전투에 진전이 없으니까 그리스군의 오디시우스라는 전략가가 목마작전을 쓰고, 승리한 그리스 군은 트로이를 완전히 파괴해버린다. 이 이야기를 다룬 호머의 '일리아드'가 아킬레스와 헥토르를 주인공으로 하는 영웅의 서사시고, 초서의 '크로일러스와 크레시다'가 사랑의 서사시라면, 셰익스피어의 작품은 그와 정반대 쪽을 택하여 '반 영웅주의'를 그렸다. 그래서 두 나라 군대의 싸움, 양쪽 내부의 갈등, 사랑의 배신, 껍질뿐인 영웅주의, 명예의 허무함 등을 다루어 '반전주의', '인간 존재의 가벼움', '인생의 허무함' 등 현대적인 주제가 가득하다.
등장인물들도 맘에 안 들고 답답하다. 트로이 여자 크레시다(Cressida)는 트로이 왕 프리암의 아들 트로일러스(Troilus)와 사랑을 약속한 사이다. 그러나 크레시다의 아버지가 트로이를 배신하고 그리스 쪽으로 넘어가서 딸까지 데려오려고 하자, 크레시다는 (요즘 여자들이 군대 간 애인을 내던지듯) 트로일러스를 팽개치고 그 대신 자기를 호위하러 온 그리스 병사 디오메데스(Diomedes)를 좋아한다. 그리스의 전설적인 영웅 아킬레스(Achilles)도 성미 급하고 잘 토라지는 자기중심적 인물로 묘사되었고 그리스 연합군 총사령관 아가멤논 왕은 멍청한 수다쟁이, 그리스의 장애인 테르시테스(Thersites)는 다른 사람들의 행동에 대해 헐뜯는 말만 하고, 판다루스(Pandarus)는 연인들 사이를 오가는 음탕한 꼴로 상대가 타락하는 것을 즐긴다. 이런 인물들이 모두 도덕적으로 타락하고 정치적으로 분열되는 곳에서 이 작품은 끝난다.
스토리와 인물들이 이 꼴이니 희극으로 분류하기에는 희망적인 엔딩이 없고, 비극으로 분류하기에는 등장인물들의 고상함이나 행동 의도가 엉망이다. 유명한 시인 사무엘 타일러 콜릿지(Samuel Taylor Coleridge)는 '셰익스피어는 어느 작품보다도 이 작품에서 등장인물들에게 가혹했다'고 평했다.

줄거리
맨 처음의 프롤로그에서는 작품의 배경을 설명한다. 파리스가 미넬라우스의 아내 헬렌과 눈이 맞아서 '납치'한 때문에 그리스는 군대를 편성하여 배를 타고 트로이에 왔고 그렇게 시작된 전쟁은 지금 (7년째) 진행중이다.
전쟁도 매일 하다보면 일상사가 되어 무심하게 되는 건지, 그리스 군에게 포위된 트로이 성내에서는 사랑타령이 벌어진다. 파리스의 동생 트로일러스 왕자가 잘 생긴 여자 크레시다를 사랑하는 것이다. (이 여자의 아버지 칼카스는 트로이의 사제였지만 그리스 군으로 망명한 변절자다.) 크레시다도 트로일러스를 사랑한다. 그러나 겉으로는 전혀 그런 티를 내지 않는다. 트로일러스는 자신의 마음을 여자에게 전해달라고 크레시다의 삼촌인 판다루스에게 부탁한다. 판다루스는 도와준답시고 너무 과장하여 트로일러스를 칭찬한다. 그러나 크레시다는 아주 까다롭다. '남자들은 쉽게 얻기 힘든 여자를 더 좋아한다'는 진리를 어디선가 배운 모양이다.
한편 트로이 성밖의 그리스 군 진영에서는 격렬한 토론이 진행중이다. 7년이 되도록 지겹게 질질 끄는 이 전쟁을 어떻게 빨리 끝낼 것이냐 하는 것이 회의의 주제다. '트로이가 강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 군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 율리시즈의 주장이다. 모두 용감하게 싸우라는 아가멤논 총사령관의 명령을 어긴 채 싸움을 거부하는 것은 계급도 질서도 모두 무시하는 꼴이며 그 때문에 그리스 군의 사기가 엉망이라는 것이다. 율리시즈가 비난하는 것은 바로 그리스의 장군 아켈레스다. 헤라클레스 더하기 란슬롯 더하기 램보 쯤 되는 용사 아킬레스가 전투는커녕 작전회의에도 참가하지 않고, 늘 거만한 꼴로 폼만 잡으면서 다른 사람을 놀리고 비웃기만 하는 것이다.
트로이 최고의 용사이자 트로일러스의 형인 헥터는 그리스 군 진영에 전령을 보냈다. 가장 쎈 놈이랑 한 판 붙고 싶다는 것이다. 그리스 최고 실력의 용사를 내보내야 한다면 당연히 아킬레스가 나가야 하는데... 율리시즈와 네스터는 이에 대해 생각이 다르다. 아킬레스가 노는 꼴이 아주 맘에 안 드니까 그 대신 에이악스를 보내자는 것이다. 그러면 아킬레스 체면도 구겨지고 또 에이악스 쯤은 소모품이니까 죽건 말건 상관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들은 조작된 추첨으로 에이악스를 뽑는다. 에이악스는 (우연하게도 헥터의 사촌형제로) 싸움 잘하는 근육질이긴 하지만 두뇌라고는 전혀 없는 꼴이다.
에이악스는 헥터의 도전에 대해 말해주지 않는 테르시테스와 말다툼을 한다. 테르시테스의 말을 들어보면 에이악스는 아킬레스를 몹시 싫어하고 있다. 그때 아킬레스와 파트로클러스가 나타나 테르시테스를 비웃으며 헥터의 도전을 에이악스에게 알려준다.
한편 트로이 성내에서는 이 전쟁을 계속할 필요가 있는가 하는 의문이 제기되어 토론이 벌어진다. 헬렌이란 여자 하나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죽고 고생하는 꼴이니, 그 헬렌을 풀어주고 전쟁을 끝내자는 것이 프리암 왕을 비롯한 대부분 사람들의 생각이다. 프리암 왕의 딸 카산드라는 헬렌을 돌려주지 않으면 무서운 폭풍이 몰려와 트로이를 불태울 것이라는 예언까지 한다. 그러나 트로일러스는 이에 반대한다. 트로이는 7년 전에 헬렌을 환영하며 받아들였고 그 때문에 이미 많은 피가 흐르고 뼈가 부서졌는데 이제 와서 그것을 뒤집고 전쟁을 포기한다는 것은 명예와 프라이드의 문제라는 것이다. 그는 멋진 말솜씨로 사람들의 마음을 돌리고 특히 크레시다를 사로잡는다. 이제껏 속마음을 감추고 있던 크레시다는 트로일러스에게 사랑을 표시하며 변치 않을 것을 맹세한다.
그런데 크레시다의 아버지 칼카스는 변절의 명수로 이미 그리스 군에 망명한 상태다. 그는 트로이 포로와 딸을 교환하려는 계획을 제안한다. 사로잡힌 트로이 장군 안테너를 크레시다와 바꾸려는 것인데 트로이 쪽에서도 이 제안에 승낙하였다. 크레시다는 트로이에서의 마지막 밤을 트로일러스와 함께 보낸다. 그때 그리스 용사 디오메데스가 여자를 데려가려고 온다. 상심한 크레시다를 트로일러스가 위로하며 자신과 트로이를 떠나야 한다고 말한다. 둘은 떨어져있어도 변치 않을 것을 맹세하며 트로일러스는 자신의 소매를, 크레시다는 장갑을 징표로 주고받는다. 여자를 디오메데스에게 넘기면서 트로일러스는 잘 지켜달라고 부탁한다. 그러나 크레시다를 본 순간 그 미모에 홀딱 반한 디오메데스는 자신의 정부로 삼겠다고 한다. 그러자 트로일러스는 전투에서 그의 목을 따겠다고 겁준다. 그런 중에도 크레시다는 디오메데스가 싫지 않은 눈치다.
그리스 진영에서는 에이악스가 헥터와 싸울 준비를 한다. 그때 디오메데스가 크레시다를 데리고 온다. 크레시다는 적군의 장군들을 놀리면서도 모든 시선이 자기에게 모이는 것이 기쁜 듯이 한 사람 한 사람에게 키스한다.

애네아스, 트로일러스, 파리스, 헬레너스가 대표선수 헥터와 함께 싸우러 온다. 헥터는 싸움에서 에이악스를 이기지만 사촌형제이기 때문에 죽이지는 않는다. 에이악스는 헥터에게 아킬레스와 함께 식사를 하자며 초대한다. 식사 후 트로일러스는 율리시즈를 통해 칼카스의 막사로 크레시다를 만나러 간다. 둘의 사이를 모르는 율리시즈는 크레시다가 디오메데스와 함께 식사했다고 알려준다.
한편 아킬레스는 다음날 싸울 헥터에게 술을 많이 마시게 할 계획이다. 그러나 트로이 군과 싸우지 않기로 한 약속을 다시 지키기로 결심한다. 헥터가 아킬레스의 막사로 가는 동안 율리시즈와 트로일러스는 디오메데스를 따라 칼카스의 막사로 간다. 그리고 크레시다와 디오메데스의 수작을 엿본다. 크레시다는 디오메데스에게 사랑을 약속했다 말았다 하며 놀리더니 나중에는 트로일러스가 징표로 준 소매를 그에게 준다. 트로일러스는 이제 크레시다가 한쪽 눈은 자기에게 있으면서도 마음은 디오메데스 쪽으로 기울고 있다는 독백을 엿듣는다. 화가 난 트로일러스는 그녀를 잊기로 하고 디오메데스를 전투에서 죽이기로 결심한다.
트로이 진영에서 헥터는 부인과 여동생 그리고 왕이 말리는 것도 듣지 않고 전투를 하겠다며 고집 부린다. 트로일러스도 싸우기로 한다. 그때 몸이 아픈 판다루스가 트로일러스에게 편지를 전한다. 크레시다가 보낸 것이다. 그러나 트로일러스는 편지를 찢어버리고 전투하러 나간다.
드디어 트로일러스와 디오메데스가 전투를 벌이고, 테르시테스는 구경하면서 놀린다. 디오메데스는 시종에게 트로일러스의 말을 끌어다가 크레시다에게 트로일러스가 죽었다는 (가짜) 증거로 보여주라고 한다.
트로일러스와 헥터가 미친 사람처럼 싸우면서 그리스 용사들을 여럿 죽이자, 아가멤논 왕은 지원을 명령한다. 파르토클러스가 죽었다는 소식에 아킬레스와 에이악스도 싸움에 나선다. 에이악스와 디오메데스가 함께 트로일러스에게 덤벼들고, 그 동안 헥터와 아킬레스도 결투를 벌인다. 그런데 아킬레스는 결투에서 헥터를 이길 수 없다고 느끼자, 헥터가 무장을 풀고 쉬는 틈에 부하들을 시켜 그를 죽인다. 그리고는 말 뒤에 시체를 매달아 트로이 성벽 앞으로 끌고 다닐 생각이다. 헥터의 죽음에 그리스 군들은 기뻐한다.
트로일러스는 아킬레스를 죽일 것을 맹세하면서도 곧 트로이가 멸망할 것을 예감한다. 그리고 판다루스는 자신이 트로일러스와 크레시다를 맺어준 것을 후회하며 자신도 두 달 뒤 병으로 죽을 것을 예상한다.

위의 줄거리 소개에서 봤듯이 이 작품은 보거나 읽기에 별로 유쾌한 작품이 아니고 좀 어렵고 복잡하다. 전쟁에 직면한 상황에서의 인간 모습을 보여주면서도 그 인물들이란 게 별로 호감이 가지 않고 동정심을 느낄 수 없는 인물들이다.
다른 비극들과 마찬가지로 이 작품의 주제도 주요 인물들의 관계와 갈등에서 나온다. 서로 사랑하는 두 사람이 전쟁의 정치 때문에 서로 헤어지게 되고 변심하는 것은 셰익스피어의 다른 어떤 비극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극심한 비관주의에 입각한 부분이다. 결국 이 작품에서 사랑이란 것은 그저 욕정의 대상 정도로 그려졌고 그와 함께 아킬레스나 에이악스 같은 용감한 영웅들의 모습도 자기만 아는 비겁한 깡패 정도로 나타난다.
작품의 구성도 좀 어려운 면이 있다. 사랑과 정치라는 두 가지 이야기가 마지막 부분 이전까지는 잘 얽혀있지 않아서 서로 겉도는 느낌이다. 게다가 셰익스피어는 클라이맥스를 부수는 수법을 써서, 어떤 장면에서 관객이 잔뜩 기대하도록 만들었다가 아주 실망시키는 일을 계속한다. 제 4막에서 헥터와 에이악스가 벌이는 결투가 그렇고 제 5막의 마지막 전투도 답답하다. 연인을 뺏긴 트로일러스는 복수를 이루지 못하고, 헥터도 멋진 상대와의 멋진 한 판을 치르는 대신 무기도 없는 상태에서 기습을 받아 죽는다. 그러면서 모든 일이 하나도 제대로 풀리지 않은 상태에서 작품은 끝난다.
물론 이 작품의 장점도 많다. 이 속에는 셰익스피어의 어느 작품보다 더 철학적인 대사가 많은데, 인물이나 스토리 속에 잘 녹아든 것이 아니라 따로 겉도는 느낌인 점이 좀 아쉽다. 특히 헬렌 때문에 시작된 이 전쟁을 계속할 필요가 있느냐 하는 논쟁에서 헥터와 트로일러스의 대사들은 (요즘 변호사들이 써먹을 만한) 아주 훌륭한 내용과 그에 어울리는 수사학을 구사하고 있으며, 체계와 질서를 중시하는 율리시즈의 대사들도 아주 지적이고 깊이가 있다. 테르시테스도 흥미롭고 또 웃기는 인물이다. 험담으로 가득한 말만 하는 그는 이 작품의 유일한 도덕주의자로 어떻게 보면 셰익스피어의 대변인으로, 영웅호걸이란 것들이 벌이는 한심한 짓거리를 비판하고 놀린다.

이 작품처럼 우리가 희곡에서 '현대적인 작품'이라고 부르는 희곡의 특징 중 하나는 작품의 등장인물과 행동이 옛날처럼 고정된 것이 아니란 것이다. 이것은 보는 관점에 따라 여러 가지로 해석될 수 있다는 의미도 되어 소위 '컨셉'(concept) 연출이 가능해진다.
컨셉 연출이란 무대를 구성할 때 어떤 시각적 혹은 상징적 스타일을 정하여 그에 맞게 작품을 만드는 표현적 연출방법으로, 1950년대 이후 연극, 무용, 오페라 등에서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즉 연출자는 (대개 디자이너와 상의하여) 이 작품에 적절하다고 생각되는 한 가지 컨셉을 정한다. 그리고 무대에서 벌어지는 모든 것을 그 컨셉에 맞추는 것이다. 이 방법은 독특한 관점을 통하여 작품의 일관성 있는 해석을 관객에게 전할 수 있다. 컨셉 연출의 시도는 대개 작품의 주제를 살리기 위해 이루어진다. 따라서 대개는 작품의 원 주제를 살리고 그에 맞게 모든 것을 바꾼다. 그러나 필요에 따라서는 작품의 재해석과 주제의 변화도 가능하다. 예를 들어, 바그너의 음악극(오페라) '니벨룽의 반지'는 오랜 동안 신과 영웅들의 이야기로 연출되었다. 그러나 바이로이트 100주년 기념으로 공연된 '반지'를 보면 음악(피에르 불레즈 지휘)과 연출(파트릭 셰로)은 철저하게 반 영웅주의를 택하여 관객의 기대를 무너뜨린다.

가장 흔한 방법은 시대를 바꾸는 것이다. 많은 셰익스피어 작품들이 시대를 바꾸어 만들어졌는데, 대개는 관객들에게 작품을 더 생생하고 새롭게 느끼도록 하려는 의도다. 이 작품도 1956년 영국 연출가 타이론 거스리(Tyrone Guthrie)가 연출한 것을 보면 무대는 제 1차 대전 중의 영국을 배경으로 했다. 그래서 남자들은 군복을 입고 여자들은 드레스를 입었으며 칵테일 파티와 여성용 담배홀더 등이 등장한다. 그러니 아마 우리도 625나 남북 대립의 상황으로 바꿀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컨셉 연출은 그 작품에 대해서 관객들이 잘 알고 있을 때 새로운 해석을 보여주는 방법으로 쓰인다. 다시 말해서 정통적인 연출 작품이 있고 난 다음에 쓰는 방법이다. 이 작품의 정통적인 연출 작품으로 칠 수 있는 것은 1981년 영국 BBC TV에서 조나단 밀러(Jonathan Miller)가 만든 작품이다. TV 스튜디오에 세운 고정된 세트에서 벌어지는 이 작품은 역시 시대와 장소를 달리하면서도 정통적인 연출방법을 썼다. 그래도 작품의 주제가 워낙 현대적이라 잘 어울린다.
전쟁이란 무엇인가? 왜 싸워야 하고, 그 이유가 어떻게 정당화되는지, 양쪽이 얼마나 큰 희생을 겪어야 하고 승자와 패자의 구별이란 게 있는 건지, 사랑의 맹세란 과연 믿을 수 있는 건지... 이런 주제를 가진 작품이기 때문에 오히려 무대를 셰익스피어 시대나 고대 그리스 시대로 가져가면 주제에 비해 시대가 너무 뒤떨어지는 어색함이 나타난다.
2차 대전이 끝난 뒤 (간신히 승리한) 영국에서는 전쟁에 대한 회의론이 강하게 나타났고 그런 시기에 이 작품은 여러 가지로 무대에 올려졌으며 1954년에는 영국 작곡가 윌리엄 월튼에 의해 오페라로도 작곡되었다.

뒷 얘기
헥터가 죽으면서 셰익스피어의 '트로일러스와 크레시다'는 끝난다. 그러나 트로이 전쟁은 그 뒤로 3년 더 계속됐다. 승자도 패자도 없이 싸우는 지루한 전쟁이 10년간 계속된 것이다. 그러다가 결국 그리스 군의 율리시즈(오디시우스)가 목마작전을 폈다. 커다란 목마 하나를 남기고 그리스 군은 철수한 것처럼 보였다. 트로이 사람들은 논쟁 끝에 이 목마를 전쟁 기념품으로 성안에 끌어들이고 종전 축하 파티를 했다. 그러나 목마 속에 숨어있던 특공대가 밤중에 밖으로 나와 성문을 열었고 밖에서 대기하던 그리스 군은 성안으로 쳐들어왔다. 그리고 살인 강간 방화 약탈이 벌어지면서 트로이는 철저히 파괴되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전쟁을 끝내고 돌아간 아가멤논 왕이 아내 클라이템네스트라와 정부의 손에 살해되자, 그 복수를 하는 오레스테스와 엘렉트라의 이야기는 에이스킬로스의 3부작 '오레스테이아'에 나온다. 오디시우스(율리시즈)는 바다 신의 노여움을 사서, 아내 페넬로페가 기다리는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지중해 일대를 방황하며 여러 가지 모험을 겪는다. 이 내용이 호머의 속편 서사시 '오디세이아'다. 멸망한 트로이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애네아스의 인도로 단체 망명길에 올랐고, 북아프리카를 거쳐 이탈리아에 도착하였다. 그들이 거기서 세운 나라가 바로 로마라는 전설이 로마 건국 신화 '애네이드'에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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