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느 맹인학교, 이 학교 학생들은 돈 빠블로 선생의 지도 아래서 자신들이 맹인이란 사실을 전혀 인식하지 못할 만큼 명랑하게 생활하고 있다. 그들은 보통 사람들처럼 지팡이 없이 걸어다니고(이것은 걸어다니다가 걸려 넘어지지 않도록 교실 가운데에 아무 것도 놓지 않고, 모든 집기는 제자리에 놓았기 때문) 공부하고, 운동하고, 서로 사랑하며 행복하게 산다. 그러던 어느 날 이그나시오라는 새로운 학생이 들어온다.
이그나시오는 이곳에 들어오자마자 자신들이 정상인이라고 믿는 그들과 갈등을 일으키고, 떠나지 않게 그를 달래려는 후아나에게 자신이 머무른다면 이곳에 전쟁을 일으키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그 말대로, 며칠이 지나자 이그나시오를 따르는 학생들이 점점 늘어나게 된다. 이그나시오는 학생들에게 그들이 믿는 바와 달리 그들은 정상인과 다르며, 앞을 보지 못하기에 정상인들이 보는 것을 볼 수 없다는 사실을 계속 주지시킨다. 그리고 그들이 지팡이 없이도 잘 다닐 수 있다는 것은 단지 가구들이 항상 제자리에 있기 때문에 생긴 착각일 뿐이라며, 가구의 위치가 바뀌면 (혹은 학교 밖으로 나가면)지팡이 없이는 다닐 수 없다는 것을 그들에게 직접 보여준다. 그런 가운데 학교의 모범생이었던 까를로스는 자신의 지위가 흔들리고, 사랑하는 후아나마저 이그나시오에게 끌리는 모습을 보이자 사사건건 이그나시오와 충돌한다. 그러던 중 돈 빠블로 선생이 학교 전체가 한 명의 학생 때문에 위기에 빠졌다며 이그나시오를 떠나게 하라고 까를로스에게 말하자, 까를로스는 밤중에 혼자 운동장에 있던 이그나시오를 죽여 마치 사고로 죽은 것처럼 꾸민다. 하지만 돈 빠블로의 부인이고 시력을 지닌 도냐 뻬삐따가 그 광경을 목격한다. 까를로스는 자신의 범죄를 부정하며, 이그나시오는 독선으로 인해 화를 자초했을 뿐이라고 한다. 하지만 혼자 남겨지자, 까를로스는 창 밖을 바라보며 이그나시오가 했던 ‘지금도 별들은 빛나고 있겠지..’ 란 말을 되새기며 주저앉는다.

이 연극은 작가가 스페인 내전에서 독재정권에 대항해 싸우다가 체포되어 사형을 언도받은 뒤에 가석방으로 풀려난 시기에 쓰여졌던 것이다.
겉보기엔 평화롭고 이상적인 것 같은 맹인 학교. 그러나 그 학생들은 큰 착각을 하고 있다. 학교 안에서 아무 걱정 없이 정상인같은 생활을 할 수 있다는 것 때문에 자신들이 정상인과 다름없다고 여기고 있는 것이다. 그들을 그렇게 만든 것은 돈 빠블로 선생이다. 그 자신도 맹인인 돈 빠블로는 맹인들의 편의를 위해 힘쓰는 것 같지만, 그들이 졸업하고 나서 세상으로 나섰을 때 어떻게 살아야 할 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연극 후반에 이그나시오를 쫒아내야 한다는 그의 말에서 알 수 있듯이 그에게 중요한 것은 오직 학교 안에서의 평화와 질서와 행복이다. 돈 빠블로는 그 자신도 빛(정의)를 보지 못하면서 빛이 없어도 편하게 살 수 있는 방법을 학생들에게 주입시키는 독재정권을 상징한다.
한편, 이그나시오는 학생들이 어떤 상태에 빠져있는지를 간파하고 그들에게 빛이 없다는 것을 상기시켜 착각에서 벗어날 것을 주장하는 혁명가다. 이그나시오의 이미지는 여러 모로 예수와 비슷하다. 이그나시오의 대사인 ‘나는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이 아니라 전쟁을 가져다줄 것이다’는 신약성서에 있는 예수의 말과 비슷하며, 까를로스는 이그나시오를 ‘불완전한(맞나?) 구세주’라고 부르기도 했다. 이그나시오가 등장하면서 학생들은 두 패로 갈리게 된다. 돈 빠블로를 추종하는 세력은 자신들이 지금 누리고 있는 행복(억압된 체제 속에서의 제한된, 혹은 강요된 행복)을 지키려 하고, 이그나시오를 따르는 세력은 현실을 직시하고 그들에게 없는 빛(정의)를 간접적으로나마 찾으려 한다. 하지만 그 싸움은 이그나시오가 죽음으로서 일단락되고 학교는 다시 어둠 속으로 빠져든다. 하지만 그 당사자였던 까를로스는 이그나시오의 죽음을 애도하며, 빛이 존재하고 그들이 빛을 볼 수 없다는 것이 사실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이는 일시적으로 정의가 차단되더라도 정의가 엄연히 존재한다는 사실만은 없앨 수 없으며, 정의가 도래할 때까지 끝없는 싸움이 계속될 것임을 암시한다.

현실에서 한계나 불가능이라고 여겨졌던 것들이 피나는 노력과 극복하려는 의지에 의해 오랜 시간에 걸쳐 변하여 더 나은 미래를 가져오기도 한다. 하지만, 그 순간 이루어지기 요원한 것에 연연하여 주어진 현실을 암울하고 부정적으로 바라보며 이상만을 염원하는 것으로는 현실을 개선하거나 이상을 실현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단지 현실을 직시하는 것만으로 문제가 해결되는 건 아니지 않은가. 현실을 직시하는 것과 현실을 부정하는 것은 분명히 다르다. 현실을 제대로 볼 수 있다는 건, 보다 나아질 수 있는 기초일 뿐이다. 이를 바탕으로 자신에게 주어진 현실에서 받아들일 건 받아들이고 노력할 수 있는 건 노력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고서 현실을 바꾸려고 한다면, 자신이 존재하는 현실을 송두리째 뒤흔들게 될 것이다. 반면, 현실에서 이상과 배치되는 것들을 찾기만 하는 탁상공론 역시, 자신의 삶을 받아들일 수 없게 만들어, 결국 점점 벌어져만 가는 현실과 이상의 괴리 사이에서 괴로워할 수밖에 없는 불행한 삶으로 자신을 몰아넣지 않겠는가.

<타오르는 어둠 속에서>는 안토니오 부에로 바예호 (Antonio Buero Vallejo)의 초창기 작품으로, 불과 일주일만에 쓰여진 작품이라고 한다. 실명(失明)과 이의 상징적인 의미에 대해 항상 생각을 하던 그는 우연한 기회에 맹인 학교에 다니는 동생을 둔 친구와 얘기하며 생각을 구체화한다. 그는 자신이 가장 좋아하고 아끼는 작품이 바로 이 작품이라고 말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이 작품이 그의 거의 모든 작품의 기틀이 되었고, 극작품으로서의 가능성을 훨씬 더 많이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극작품을 씀으로써 인간의 가장 깊은 갈망과 불안감을 무대 위에 올리고 싶었던 그로서는 이 작품이야말로 자신의 관심거리인 인간의 한계를 극명하게 보여줄 수 있는 작품이라고 판단하였다. 이 작품은 이렇듯 시각 장애인들을 주인공으로 등장시켜 그들의 한계를 보여주고자 했지만 결국 이들은 완벽할 수 없는, 한계가 있는 모든 인간들의 모습을 대변한다. 그러므로 우리 앞에 다가오는 삶이 괴롭고 힘들지라도 현실을 외면하지 않고 진실을 찾으려고 할 때 삶의 진정한 의미를 알게 된다는 것을 이 작품은 보여주고 있다.

[작가소개]
그의 작품은 여러 가지 특징을 갖고 있다.
첫째, 부에로 바예호의 가장 큰 관심은 인간과 그들의 비극적 삶이다. 비극적 삶이란 원초적으로 한계를 지닌 인간이 그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끊임없이 투쟁하며 살아야 함을 의미한다. 다시말해 부에로 바예호는 작품들을 통해 자아 실현, 자유에 대한 열망, 사랑, 그리고 내면의 갈등 등을 보여줌으로써 삶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게 하고자 한다. 인간은 혼자 살 수 없는 결속된 존재이며, 근본적으로 한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자신이 속해 있는 사회와 부딪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그의 모든 작품에서 보여주고 있다.
둘째, 부에로 바예호는 주로 상징을 통해 독자와 관객들에게 본인의 의도를 전달하고자 한다. 그가 가장 즐겨 쓰는 상징들은 신체 장애인과 빛과 어둠의 대립이다. 신체 장애인들은 인간의 한계를 보여주고자 하는 의도에서, 빛은 희망과 진실을 찾으려고 하는 사람들이나 그들의 행동을, 어둠은 잘못된 것을 알면서도 이를 무시하고 발전 없는 편안한 삶에 안주하려는 자들을 상징한다.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장애인들은 자신의 꿈을 실현시키거나 사회의 변화를 이끌어내는 데 실패하지만, 다른 주위 사람들에게 그들의 꿈을 실현시킬 수 있도록 희망을 준다. 비록 그들의 행동이 성공하지 못하므로 비극적이지만 타인에게 확고한 희망을 갖게 하므로 그의 비극은 ‘희망적인 비극‘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말하기를 “운명에 대해 묻기 시작하는 것은 이를 이기려고 애쓰기 시작하고, 그리고 그것을 부정하는 것이다.”라고 했다. 우리 모두가 삶을 살아가는 데 싸워이길 수 있는 기회가 없지 않기 때문에 작가는 이런 상징적 요소를 통해 각자 현명하고 슬기롭게 자신의 삶을 선택하도록 유도한다. 셋째, 그는 작품의 결론을 확실하게 내리지 않는다. 독자와 관객에게 결론을 맡김으로써 그들이 다시 한번 상황을 짚어보고 생각하게 하여 그의 의도를 정확히 파악하도록 한다.
부에로 바예호의 작품은 현대 연극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새로운 시도의 작품들로서 그의 연극 인생의 여정은 지난 50년 간 스페인의 모든 갈등을 대변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삶의 의미, 특히 사회적 환경 속에서 존재론적 의미와 사회적 불평등과 불의에 대한 고발을 작품의 기저로 삼으면서도 작가 자신이 직접 결론을 돌출해내지 않고 관객 또는 독자들이 그 해답을 찾도록 유도하는 놀라운 힘을 발휘함으로써 작가의 사회적 메시지가 더욱 강하게 전달되는 효과를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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