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희곡

마쓰다 마사타카 '침묵과 빛'

clint 2015. 12. 2. 17:21

 

 

 

 

옛날부터 기독교 신앙이 토착화하여 지금도 사람들의 삶 속에 숨쉬고 있는 작은 섬.

그 중심이라 할 수 있는 교회는 태풍으로 예배당의 지붕이 날아간 상태이다.

세습 사제와 별채에 살고 있는 외지 남자가 수리를 하고 있지만, 언제 완성될 지는

알 수 없다. 해녀들이 외지 남자에게 모여든다. 바다가 번쩍이더니 앞바다에서

수상한 배가 총격을 받아 침몰되고, 새가 바다를 건너 영혼을 나른다….

고향에서의 삶을 부정하고 섬을 떠났던 사제의 여동생이 20년 만에 귀향한다.

그녀는 지금 황태자 일가를 노렸다는 자폭 테러의 그룹에 이름이 올라 쫓기는 몸이다.

해변에서는 상어 떼가 떠오르고 뱃속에서 사람의 형태를 한 것이 나오자

죽은 사람들의 혼이 귀환했다고 한다. 섬에서는 숭어를 먹고 죽거나 신의 침묵과

자기불신으로 고민하다 목을 매는 등, 남자들의 죽음이 잇따른다.

신은 존재하고, 빛은 곧 믿음이라며 고집스럽게 교회를 지키려는 사제.

그런 오빠와 여동생은 지난 추억을 실마리로 깊은 정을 느끼며 서로 마주보지만,

여동생은 누군가가 무언가를 하지 않으면 세상은 변하지 않는다며 마치 홀린 듯

혁명전사가 되려고 외지 남자와 떠난다. 어느 틈엔가 운석과 같은 커다란 돌이

사제관에 놓여 움직이지 않는다. 떠나간 남자 대신 해녀들의 밤을 즐겁게 해달라고

사제에게 속삭이는 여자.

 

 

 

현대인의 대다수가 뿌리 없이 떠도는 부평초라는 말이 있는데, 마쓰다 마사타카(松田正隆)에게는 확고하면서 변하지 않는 근원지=나가사키(長崎)현이 있다. 그는 원래 친근한 서민들의 일상을 담담하게 묘사한 작품을 써 왔는데, 어느 시점부터인가 지역 특유의 정신에 속박된 복잡한 인간관계에 착안해 그 얽매임을 집요하게 추구하기 시작한다. 이러한 작품에서는 고향에 돌아온 인물이 등장함으로써 특정 지역의 오래된 풍습과 현대의 번잡함이 교차한다. 그 귀향이 야기하는 충격으로 인해 마음 깊은 곳에 잠재하는 어두운 영역의 정념이 부상하여 꺼림칙하고 두렵게 소용돌이친다. 그런 의미에서 마쓰다의 최근 작품은 일종의 ‘귀향극’이라 할 수 있다. 동시에 이것은 마쓰다 자신이 작가로서의 뿌리에 대해 정면에서 추궁하는 귀향의 도정이기도 한데, 그 과정에서 갈등하는 작가의 자세는 진지하고 용기 있게 보인다. <침묵과 빛>도 그 연장이다.

무수히 많은 화제가 맺어지지 않은 채 2시간도 안 되는 작품 속에 담겨 있다. 그리고 그에 호응하듯 전개되지 않는 짧은 장면들이 툭툭 끊어진 채 나열되어 있다. 이런 점에서 말하자면 극 구조를 짜는데 능숙한 마쓰다의 작품같지 않다. 그러나 작가는 단일하게 전개되는 드라마의 구조를 부수고 특수한 섬이라는 공간 그 자체를 주인공으로 자리잡게 했다. 그 곳에서 모순된 현대를 살아가는 남녀, 남매, 이웃이 충돌하게 되는데, 지역의 풍습과 특성 때문에 그들의 이야기는 갑자기 전설처럼 되어 버린다. 거기에 생생한 현실감을 부여하는 것이 마쓰다 특유의 사투리로 짜여진 대사이다.
분가쿠자(文学座) 공연(다카세 히사오 高瀬久男 연출)의 첫인상은 대사가 특정 지역의 감촉을 불러일으키지 못했다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 배우들이 역을 꼼꼼하게 해석하고 몰입한 것은 느낄 수 있지만, 그것을 너무 도시적인 감각으로 이해했고 육체적으로도 가냘프다. 사제역의 세키 데루오(関輝雄)는 확실히 수동적으로 살아가는 지역민의 한 전형이긴 하지만, 수동적이라는 것이 살아가는데 있어서 대담함으로 통하는 면을 표현했다면 좋지 않았을까. 여동생 역의 야마모토 신코(山本深紅)도 장기간 고향을 버리고 테러리스트가 된 강인함과는 다른, 그 지역의 뜨겁고 풍성하게 농익은 피를 느끼게 해주는 데까지는 이르지 못했다. 별채 남자 다카하시 가쓰아키(高橋克明)도 외지 사람이긴 하지만 그곳 여자들의 인기를 독차지하는 만큼 그 남자다움은 토지의 일부가 되어도 좋았을 것이다. 작가의 의도를 살리지 않으면 안 되는 작품인 만큼, 그리고 분가쿠자의 배우들에게 기대가 컸던 만큼 약간은 부족한 느낌이 드는 무대였다.

 

 

 

 

작품 해설-송선호
1990년 교토(京都)를 근거지로 활동을 시작하여 현재 일본의 대표적인 희곡작가로 평가받고 있는 마쓰다 마사타카(松田正隆)씨는 나가사키(長崎) 지방의 독특한 언어와 정서를 바탕으로 평범한 사람들의 삶을 정밀하게 묘사한 희곡을 발표해 왔다.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삼남매의 애틋한 정을 그린《비탈 위에 있는 집(坂の上の家)》(1994), 아내의 죽음을 통해 성찰에 이르는 과정을 담담하게 묘사한《바다와 양산(海と日傘)》(1996), 서민들의 애환과 짙은 상실감을 다룬《여름날 모래 위(夏の砂の上)》(1999), 이들 일련의 작품들은 식탁을 겸한 탁상을 가운데 두고 이루어지는 이른바 ‘거실 연극’이며, 조용한 ‘일상극’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최근에 발표된 마쓰다씨의 희곡은 ‘일상극’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다. 이전의 작품이 주로 현재의 삶을 의미 있게 만들어 주는 ‘과거’에 대한 기억을 서정적으로 다루었다면, 최근의 작품에서는 ‘현재’를 살아가는 인간의 문제를 정면에서 바라보고 그 근원에 다가서려는 의도가 분명하게 드러난다. 이러한 주제를 구체화하는 과정에서 마쓰다씨는 1999년 작《꽃의 형체(花のかたち)》이후 현재까지 지속적으로 ‘가쿠레 기리시탄(カクレキリシタン)’이라는 일본의 독특한 기독교와 그 신자들의 삶을 소재로 채택하고 있는데, 이번에 소개되는 2002년 작 《침묵과 빛(沈黙と光)》도 그 중 한 작품에 속한다.
규슈(九州) 북서쪽에 있는 작은 섬 고에바루(コエバル)는 신앙촌이다. 바닷가 갑(岬)에 있던 교회 예배당은 2년 전 태풍으로 날아가 버리고 지금은 사제관만 남아있다. 사제 고지(コウジ)는 이 섬으로 흘러들어 온 사내 사에키(サエキ)와 함께 바닷가의 돌을 주워 예배당을 다시 세우려 한다. 왼쪽 팔이 의수(義手)인 사에키는 마을 해녀들의 성적 욕구를 해소해 주는 섹스 상대이기도 하다. 어느 날 중학교 때 섬을 떠났던 사에키의 여동생 나오코(ナオコ)가 사제관을 찾아온다. 신앙을 버리고 이 곳을 떠나 테러리스트가 된 그녀는 갓 태어난 황태자비의 아기를 죽이려는 자폭테러단의 음모에 가담했다가 실패한 후, 쫓기는 몸이 되어 20년 만에 고향에 숨어든 것이다. 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나오코는 고지와 언쟁을 벌인다. 그녀는 지금 이 순간에도 세상 곳곳에서 많은 사람들이 고통 받고 서로 싸우며 죽어가고 있는데, 이 섬에서 교회를 재건하는 일 따위가 무슨 의미가 있냐고 따져 묻는다. 고지는 세상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신을 믿는 것이 아니며 신은 그런 것 때문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며 반박한다. 나오코는 신이든 천황이든 인간과 다른 특별한 존재가 있다는 것은 용서할 수 없으며 그러한 신성화와 모든 차별을 없애기 위해 음모에 가담했다고 말한다. 그 때 해녀들이 바닷가에 상어와 고래 떼가 나타났음을 알린다. 상어의 배를 가르자 그 안에서 사람들이 나온다. 어떤 사람은 죽은 사람들이 물고기가 되어 돌아온 것이라고 하고, 또 다른 사람들은 행방불명됐던 어부들의 귀환이라고도 한다. 상어의 뱃속에서 나온 시체들이 모두 사제관으로 옮겨지고 그곳에서 의식을 치른 뒤 화장된다. 사무소 직원 가타오카(カタオカ)는 고지를 찾아와 나오코를 넘겨달라며 협박하고 돌아간다. 나오코는 사에키의 도움을 받아 배를 타고 섬을 빠져나간다. 바다를 건너 육지로 가서 테러리스트 훈련을 받기 위해 떠난 것이다. 그 날 하늘에서 돌이 비처럼 쏟아져 내리고 사제관 지붕 위에 임시로 달아 놓았던 안젤루스의 종이 울린다. 그리고 염세주의에 빠져 방황하던 분교 교감 우라타(ウラタ)는 결국 자살하고 만다. 새벽녘 사제관 거실에 커다란 돌이 놓여있다. 고지도 사제관을 찾아온 요시노도 그 돌이 어디서 온 것인지 알 수 없다. 요시노는 이제까지 해녀들이 사제 대신 사에키와 정을 통해 왔는데 이제 사에키가 없으니 사제가 자신들을 상대해줘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고지는 바닥에 놓인 돌을 치우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을 뿐이다.

 

 


이처럼 줄거리는 단순하지만 작품 속에는 고에바루 사람들의 과거와 잠재의식에서 비롯된 이야기들이 신화처럼 방대하게 펼쳐진다. 과거의 고에바루는 신이 존재하는 이상적인 땅이었을 수 있다. 그러나 사람들이 외부로 눈을 돌림과 동시에 외부의 간섭과 압력을 받게 된다. 이에 신의 말씀과 교회를 지키려고 했던 사람들은 고에바루의 독립을 주장하며 저항했다. 그러나 본토에 의해 저항 세력은 진압되고 현재 고에바루는 신이 사라져 가는 섬이 된 것이다. 사람들은 교회에 나오지 않고 세례마저 거부한다. 이제 섬사람들에게 절대적이었던 신앙뿐만 아니라 본토를 상대로 봉기를 일으켰던 역사적인 사건도 그들의 기억 속에서 함께 희미해진다. 다만 봉기를 주도했던 사제 집안의 딸 나오코와 고에바루의 역사를 인식하고 있는 교감 우라타가 사제 고지와 갈등을 일으킬 뿐이다.
섬에서는 현실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일들이 연이어 발생한다. 밤중에 어둠 속에서 새가 날아다니고, 사람을 삼킨 상어와 고래 떼가 무더기로 해안에 몰려오는가 하면 하늘에서는 돌이 비처럼 쏟아져 내린다. 이 모든 이변은 신에게서 점점 멀어져 가는 땅에서 일어나는 ‘기적’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정작 해녀들은 고에바루의 기적이 ‘귀찮은 기적’ 뿐이라고 말한다. 고지 역시 “일어나지 않아도 될 때만 기적이 일어난다” 고 뇌까린다. 즉 신이 보여주는 권능과 불가사의한 힘이 여기서는 아무 의미도 없는 일인 것이다. 경이로워야 할 신은 더 이상 어디에도 없다. 마지막 장면에서는 도대체 어디서 왔는지 알 수 없는 거대한 돌이 사제관 한 가운데 놓여 있다. 이를 대하는 고지의 태도는 대단히 상징적이며 깊은 인상을 남긴다. 돌을 치우려는 고지에게 해녀 요시노는 떠나간 사에키 대신 사제가 오늘 밤부터 해녀들을 즐겁게 해주기 위해 뛰어다녀야 한다는 사실을 상기시켜 준다. 고지는 기적이든 뭐든 상관없으니 돌을 옮길 수 있게 도와달라고 말한다. 그냥 놔두면 밥도 못 먹는다며 웃옷을 벗고 돌을 옮기려고 끙끙거린다.
어쩌면 현실로 받아들이기 힘든 원시적인 기운이 지배하는 외딴 섬의 이야기 같지만, 여동생 나오코의 말을 통해 이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과 밀접하게 연결된다. 신이 존재한다면, 이 세상은 왜 이렇게 불평등하며 신의 이름을 걸고 사람을 죽이는 행위가 멈추지 않는가. 공연에 앞서 마쓰다씨는 “현대라는 시대에 신 따위는 없다고 생각했는데, 아직도 인류는 저마다의 신을 섬기고, 저마다의 형편에 맞게 정의를 내세우며 전쟁을 일삼고 있으니, 신은 아직 확실하게 존재하는가 보다”

 

 

 

 

마쓰다 마사타카(松田正隆)
1962년 나가사키(長崎)현 출생. 리쓰메이칸(立命館)대학교 문학부 졸업.
90년 교토(京都)에서 시공(時空)극장을 결성, 97년 해산할 때까지 극작과 연출 담당.
90년대 중반부터 나가사키 사투리로 서민들의 일상을 세밀하게 묘사한 작품을 발표해 주목을 받기 시작. 94년《비탈 위에 있는 집(坂の上の家)》으로 OMS희곡상, 96년《바다와 양산(海と日傘)》으로 기시다(岸田)희곡상, 99년《여름날 모래 위(夏の砂の上)》로 요미우리(読売)문학상 수상.  그 후《꽃의 형체(花のかたち)》(99),《기라라자카(雲母坂)》(01),《침묵과 빛(沈黙と光)》(02),《눈물의 계곡. 은하의 언덕(涙の谷. 銀河の丘)》(03) 등 원시적이고 종교적 색채가 짙은 작품을 지속적으로 발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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