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년 남자 이안(Ian)과 젊은 여성 케이트(Cate)가 리즈의 한 고급 호텔 방에 들어서는 것으로 극이 시작된다. 이안의 어투는 불쾌하고, 혐오스러울 정도이나 비난되지 않으며 관객에게 도덕적 지침을 마련해주지 않는다. 그러한 불안감이 계속 전개되며 밤 사이 이안이 케이트를 강간한 것이 드러난다. 곧 이어 군인이 등장하고, 극의 양식은 파편화되기 시작한다. 대사는 점점 더 부식되고, 침묵이 채운다. 장면이 점점 파편화되면서 이안의 이미지들, 삶은 파괴되고 원소화된다. 인간이란 흐느끼고, 똥싸고, 고독하고, 파괴되고, 죽어가고 마지막 순간에야 위안을 얻는 존재로 던져진다. 케인의 호텔 방의 강간과 전쟁의 파괴가 연관이 있다고 웅변하고 있으나 평자들에 의해 유치한 쇼크에 머무는 장난으로 혹평을 받았다.

<Blasted>는 숱한 종류의 전쟁으로 황폐해진 현재란 시점을 굴절렌즈로 찌그러뜨리고 공격적으로 죽죽- 찢어 조각낸다. 영국 중부지방의 어느 호텔에 한 남자와 한 소녀가 잠시 단절적인 대화를 나누는가 싶더니 마치 강간과도 같은 광포한 섹스가 시작된다. 잠시 후 국적 모를 한 병사가 난입해 남자를 강간하고 남자의 두 눈을 뽑아 낸다. 소녀는 병사를 쏴 죽인다. 남자는 소녀가 데리고 와 침대 밑에 놔둔 죽은 갓난 아이를 꺼내 그 살을 뜯어먹으며 허기를 채운다. 불분명한 시간과 공간 속, 그러나 상황은 너무도 분명하다. 내전 속에 내던져진 섬약한 인간들. 누가 적이고 누가 아군인지 분간할 수도 없고, 또 굳이 알아야 할 필요도 없다. 혼란의 와중에 인간의 기본적인 가치도, 위엄도, 도덕도, 논리도, 질서도 모두 상실해간다. 누가 이 전쟁을 시작했고 왜 그것이 계속되는지 알고 싶었던 시점은 이미 지난 지 오래다. 언제 끝날지 궁금하지도 않고 굳이 끝나길 기다리지도 않는다. 존재하기 위한 조건인 것 같은 전쟁에 얹혀, 그것에 달라붙어 기생하고 있는 것뿐이다. 그리고 동물적인 생존본능과 성적 욕구만이 남아 살아있음을 입증한다.

무대 중앙에 놓여진 핏빛 시트와 커버가 뒤덮인 커다란 침대가 유독 시선을 끈다. 죽음의 아수라장 속에서도 불끈거리는 욕망의 화장터. 무대 오른 편에선 공연내내 피아노가 생으로 연주된다. 때로는 애끓는 신음 같은, 때로는 저주 실은 주문 같은 천둥소리를 내는 연주에 휩쓸려 무대 위 인물들의 물리적 상황과 심리적 황폐함이 극장 공간을 숨막히게 조여온다. 안짱다리의 키 작은 일본 소녀와 서구적 몸매의 일본 남자. 이 기묘한 병치를 더욱 생소하게 거드는 건 우리 귀에 익숙치 않은 일본말보다는 인간의 체취가 제거된 그들의 표정과 제스츄어, 그들의 움직임이다. 가면을 쓴 얼굴이 지어낼 법한 고개짓과, 어른과 아이의 어느 지점에서 만들어졌을 법한 걸음걸이와 움직임, 비일상적이면서도 그렇다고 허구적이지도 않은 표정을 곧잘 지어내던 소녀 역의 여배우의 분위기가 묘하다. 아무런 죄의식이나 양심의 가책없이 폭력과 살기가 행해지는 현장의 한 복판엔, 언발란스한 마네킨 같은 인간의 그림자만 움찔댄다.
흘러넘치는 풍요와 활기를 가장한 수선스러운 세상 곳곳에서 빈발하고 있는 살육과 학살의 현장을 우리는 TV를 통해 강 건너 불구경하듯 태무심히 듣거나 보고 지나친다. 인간으로서 지녀야 할 인간애도 연민도 기억하지 못하고 오직 들떠 술렁대는 세상 다른 편의 기운에 젖어 따로히 둥지를 틀고 사는 사람들. 연극보다 더욱 그로테스크한 현실을 작가는 첨단의 테크놀로지를 총동원한 공포영화보다도 더욱 섬뜩하게 그려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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