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작가 서문
존 페트릭 쉔리브루클린,
뉴욕/2005년

희곡 밑바닥에 깔려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무엇이 희곡을 지속시킬까요? 여러분은 아마 내 밑바닥에 깔린 것이 무엇인지 물을 지 모르겠습니다. 내 자신은 무엇을 기초로 만들어졌을까요? 모든 사람들과 모든 희곡의 바닥에는 고요한 어떤 것이 깔려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입 밖으로 나오지 않은 어떤 것들이 맨 밑바닥에 깔려 있습니다.
현재 미국에는 뚜렷한 풍조가 있습니다. 그것은 정치적인 토크쇼나, 연예잡지 일면 기사나, 모든 종류의 예술적 비평, 종교에 관한 토론 등을 통해 명확히 드러납니다. 우리는 법정문화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연예인 문화에 살았지만 그것은 지금은 소멸되었습니다. 요즘 우리는 연예인들이 법정에 섰을 때만 관심을 가집니다. 우리는 현재 극단적인 변호, 대질, 심판, 판결의 과정을 통한 법정문화에 살고 있습니다. 토론은 논쟁이 되어버렸습니다. 의사소통은 각자의 의견만을 내세우는 경쟁이 되어버렸습니다. 공적인 발언은 추악하기 짝이 없고, 위선적으로 변해버렸습니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요? 아마 이런 일들은 우리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수다 밑바닥에 도달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아무도 그것에 대해 말하려 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에게 묻겠습니다. 불편한 토론 시에 계속 자리를 지키고 있어야 했던 적이 있었습니까? 이제 막 싫증이 나려는 자신의 삶의 방식에 관해 남에게는 좋게 이야기 한 적이 있습니까? 더 이상 확고한 믿음이 없이 교의(敎義)에 충실한 적이 있습니까? 한 여자에게 사랑한다고 얘기하고 나서 사랑한다는 믿음이 사그라지는 것을 깨닫고 어렴풋이 현기증을 느껴본 적이 있습니까? 나는 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흥미로운 순간입니다. 극작가로서, 이것은 발상의 시작이었습니다. 나는 그때 한 희곡의 일부를 감지했고 그 것은 내 삶과 시간 속에서 고요하게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나는 제목부터 시작했습니다. 의혹(Doubt).
의혹은 무엇일까요? 우리 각자는 하나의 행성과도 같습니다. 영원히 변하지 않을 것 같은 단단한 껍질로 둘러싸여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우리자신에 대해 자부하고 있습니다. 누군가 묻는다면 우리는 재빨리 현 상태를 설명해 줄 수 있습니다. 내가 많은 질문에 적합한 답을 알 듯, 여러분도 마찬가지 일겁니다. 당신의 아버지는 어떻게 생겼나요? 하느님을 믿나요? 가장 친한 친구는 누군가요? 무엇을 원하시나요? 이런 물음들에 당신의 대답은 동시대적으로 통용되는 답변이지, 물론 정답으로 생각했겠지만, 정확한 답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쉬운 답변의 밑바닥에는 또 다른 당신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설명될 수 없는 존재는 순간적으로 어디론가 움직입니다. 이 존재는 우리의 내면의식들이 갈등하다 지쳐버릴 때 비로소 일체의 설명 없이 드러납니다.
이 때 의혹(자주 초기에는 약점으로 여겨지는)이 모든 것을 변화시킵니다. 자신이 불안정하다고 느낄 때, 어렵게 쌓아온 지식들이 순식간에 눈 앞에서 물거품이 되어버릴 때, 사람은 자신의 발전가능성에 위기를 느끼게 됩니다. 인간의 외피와 내면의 핵 사이의 미묘하면서도 극단적인 화해 양상은 때때로 실수라고 생각되기도 합니다. 마치 길을 잃고 나서야 비로소 잘못 왔다는 생각이 들 때처럼. 그러나 이런 현상은 단지 익숙함을 원하는 마음 때문입니다. 의혹만이 현시점으로 재도약하는 기회입니다.
희곡. 나는 이야기의 배경을 1964년으로 잡았습니다. 이 시기는 나뿐 아니라 전 세계가 어떤 광대한 사춘기를 겪고 있던 시기였습니다. 묵은 관념들이 여전히 행동, 옷차림, 윤리성, 세계관을 지배하고 있었고, 생동감 있던 이전의 원초적인 표현조차 가면처럼 굳어져 버렸습니다. 나는 브롱스에 있는 ‘자비의 수녀회(원작:The Sisters of Charity)’가 운영하는 가톨릭 학교에 다녔습니다. 수녀들은 검은 색 옷을 입고, 지옥이 있다고 믿고, 남성 성직자들에게 복종하며 우리를 가르쳤습니다. 우리를 뭉치게 했던 신앙심은 종교의 틀을 벗어나 모두가 알 수 있는 꿈, 바로 현실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그 사실을 몰랐어도 사회적 계약관계가 있었기에 그대로 지낼 수 밖에 없었습니다. 우리는 모두 똑같은 것을 믿었을 것이고, 정말 그랬습니다.
돌이켜 보면, 그 당시 그런 학교들은 영생의 집단 같았습니다. 모두가 어른이자 아이들이었습니다. 우리는 마치 동물들처럼 모여서 온기를 나누고 서로를 보호했습니다. 결과적으로 우리를 해하려는 사람들에게 우린 너무나도 나약한 존재가 되어버렸습니다. 믿음이 삶의 도리로 지켜져야 할 때, 약탈자들이 난동을 피웠습니다. 교회의 추문이 널리 퍼질 때마다 그 사냥꾼들은 대목을 만난 듯 약탈을 일삼았습니다. 그때 목자들은 겉으로 보기엔 노력하는 듯 했으나, 결국 관습화 된 미덕을 지키기 위해 진정한 선을 희생시켜야 했습니다.
나는 그때의 교훈을 결코 잊은 적이 없지만 그렇다고 충분히 배웠다고도 생각하지 않습니다. 나는 아직도 공감할 수 있는 확신, 안전을 예측하는 것, 최선책을 잘 아는 사람들로부터 얻어지는 안정감을 갈망합니다. 하지만 선현들이 훌륭한 삶의 독살스러운 필수 가치로 여겨온 지혜‐ 의혹‐ 에 의해 나는 이끌려 왔습니다.
쌓아온 믿음이 무너지기 시작하지만 아직 위선이 그 안으로 채 들어오지 않았을 때, 자의식이 흔들리지만 자아는 여전히 그 자리에 있을 때와 같은 힘든 시기들이 있습니다. 이 순간은 가장 위험하고 중요하지만 계속 지켜져야 합니다. 이 상황이 변화되는 시점은 바로 의심하는 순간입니다. 내가 새롭게 거듭나거나 거짓말을 해야 할 때와 같은 그런 중요한 순간인 것입니다.
의심은 확신 할 때보다 더 많은 용기와 에너지가 요구됩니다. 왜냐하면 확신이 잠시 멈추어 있을 때, 의혹은 끊임없이 치고 들어오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격렬한 몸부림입니다. 여러분은 내 희곡을 감상한 후 불분명하다고 느낄 것입니다. 무엇인가 확실하기를 원할 것 입니다. 그 느낌을 경멸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불확실성을 완전하게 알아내야만 하는 세상 속에 살아가길 배워왔습니다. 마지막 말은 없습니다. 그것은 우리시대의 수다 밑바닥에 깔려 있는 침묵입니다.

유명한 미국 대통령 존 F. 케네디가 암살당한 지 1년 밖에 되지 않은 1964년 뉴욕 브롱크스의 성 니콜라스 가톨릭 학교. 이 학교에는 자유분방하고 모든 이에게 불편부당한 사랑을 주고 싶은 플린 신부가 주임 신부로 근무하고 있다. 플린 신부는 언제나 「마음은 태양(To Sir With Love)」의 흑인 교사 ‘마크 새커리’나 「죽은 시인의 사회(Dead Poets Society)」에서의 ‘키딩’ 선생님이다.
반면 플린 신부 못지 않은 카리스마와 규율 집착적인 수녀가 있었으니 교장인 알로이시스 수녀가 그녀다. 전형적인 가톨릭 학교인 만큼 이곳의 분위기는 엄숙하다. 재기발랄한 20대의 제임스 수녀도 알로이시스 수녀의 위압감에 밀려 딱딱한 수업을 진행한다. 어느날 제임스 수녀는 플린 신부가 복사(服事-미사 때나 혼인 성사, 성체 성사 등에서 집전하는 사제를 도와 시중드는 일)하는 흑인 학생의 사물함에 속옷을 집어넣는 것을 목격하고, 그 학생이 플린 신부와 면담한 뒤 술 냄새를 풍기자 이를 알로이시스 수녀에게 보고한다. 평소 점잔해야 할 학교 분위기와는 사뭇 다른 행동을 하는 플린 신부(이를 테면 학생들과 격의 없이 지내거나 볼펜으로 메모를 하는 것 등)를 못마땅하게 여긴 알로이시스 수녀는 플린 신부와 복사 학생의 관계를 동성애로 판단하고, 플린 신부에게 죄를 고백할 것과 학교를 떠날 것을 요구한다. 플린 신부에 이에 당당히 대응한다. 자신은 자유스러운 학교 분위기와 변화를 수용하는 사제, 비록 흑인이라도 편안히 포용해주는 것을 원하기 때문이다. 특히 플린 신부는 미사에서의 강론을 통해 정당한 근거 없이 한 개인을 죄인으로 몰고가는 알로이시스 수녀를 비난하기까지 한다. 이제 두 사람의 관계는 최악으로 치닫는다. 알로이시스 수녀는 흑인 학생의 어머니를 불러 이를 알리고, 흑인 학생에게 동성애적인 성향이 있음을 파악했음에도 모든 책임은 플린 신부에게로 돌린다. 그리고 하지도 않은 거짓말을 해대며 플린 신부를 궁지로 몰아넣는다. 굴릴 게 하나도 없던 플린 신부에게도 약점은 있다. 바로 전임지에서 사제로서는 바람직하지 않은 전례를 범했기 때문. 결국 플린 신부가 다른 성당과 부속학교의 주임 신부로 발령(일종의 승진)으로 두 사람의 싸움은 끝이 난다. 그렇지만 알로이시스 수녀나 플린 신부는 모두다 똑같이 종교적 믿음에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입은 후 오래다. 이는 두 사람 사이에서 혼란을 느꼈던 그 순진한 제임스 수녀도 마찬가지다.


「다우트」에서 우리가 또 한가지 주목할 점은 바로 ‘근거 없는 험담’의 위험함이다.
플린 신부에 대한 알로이시스 수녀의 험담이 타당하건, 그렇지 않건 특정인에 대한 비합리적인 재단은 그 자체로서 큰 죄악이다. 그러한 죄악을 플린 신부는 베갯 속에 있는 깃털의 흩날림으로 비유한다. 베개를 칼로 난도질하면 그 속에 있는 수많은 깃털이 바람에 흩날린다. 방향도 사방팔방이다. 허나 그 모든 깃털을 다시 베개 속으로 주워담을 수는 없다. 남에 대한 험담도 마찬가지다. 일단 퍼뜨리게 되면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되지만, 그를 다시 환원시키기에는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럼에 따라 남에 대한 근거 없는 험담과 폄하는 죄악이다.
「다우트」가 돋보이는 것은 탄탄한 스토리에 있다. 이 모든 것을 '존 패트릭 쉐인리(John Patrick Shanley)'란 사람이 다 해냈다. 알려진 바에 따르면 「다우트」는 2006년말 연극에 먼저 오름으로써 세인의 관심을 받았다. 이 연극은 퓰리처상과 토니상을 수상했다고 한다. '존 패트릭 쉐인리'는 「얼라이브(Alive: The Miracle Of The Andes)」, 「콩고(Congo)」 등에서 메가폰을 잡은 바 있다. 그래도 그의 출세작은 87년작 「문스트럭(Moonstruck)」일 것이다. 그는 탄탄한 제작 및 각본가, 감독으로서의 자신의 능력을 마음껏 발휘했다고 본다. 또 하나의 미덕은 출연 배우일 것이다. 말이 필요없는 '메릴 스트립(Meryl Streep)', '필립 세이모어 호프만(Philip Seymour Hoffman)', '에이미 아담스(Amy Adams)'란 3명의 배우는 영화를 이끌어가는 3축으로서 그 비중과 역할에 한 치의 소홀함이 없었다. 다만 '필립 세이모어 호프만'을 볼 때마다 그에게는 중후한 성직자나 예술가보다는 무엇이 몰두한 끝에 반쯤 정신나간(?) 사람이나 악한이 더 어울릴 듯 싶다. 즉 「콜드 마운틴(Cold Mountain)」에서의 타락한 목사나, 「미션 임파서블3((Mission Impossible III)」에서의 악당처럼 말이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에베소서 제3장 17절의 말씀이다. 믿음이 있어야 그리스도가 사제는 물론 신도와 함께 한다. 그러나 그 믿음은 배다른 형제나 다름없는 의심으로 표변(豹變)한 뒤 연약한 인간들을 공격한다. 그리고 그 공격 끝에 남는 것은 서로에 대한 불신의 확장과 자기 자신의 믿음에 대한 회의다. 그래서 믿음의 또다른 이름은 의심이다. 플린 신부는 다우트에서 이같은 말을 한다. 한 선원이 배가 난파된 후 구명보트에 의지한 채 망망대해를 떠다닌다. 20일이 지나면서 그 선원은 조금씩 자신이 구원될 것인지에 대한 회의를 품기 시작한다. ‘내가 맞게 가고 있는 건가? 집으로 가는 방향이 맞는 건가? 아니면 완전히 길을 잃고, 끔찍한 죽음을 향해 가고 있는 건가? 자신이 보았던 별자리가... 혹시 절박한 상황 속에서 착각해서 본 건 아니었을까?’ 믿음에 대한 불안은 항상 자리한다. 그 믿음을 더욱 확고히하는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의심이다. 그러나 그 의심이 지나치면 믿음은 영영 사라진다. 그리고 남는 것은 영광 뿐인 상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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