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이 오르면
성삼문과 신숙주의 다를 바 없는 평온한 가정이 대비돼 나타난다.
국화꽃이 떨어질까 걱정하고 새로 피어난 꽃송이에 행복해하는 삼문의 아내,
떨어진 국화꽃잎을 바라보며 불안한 시각으로 바라보는 신숙주,
삶을 평온한 자세로 영위하고 있는 성삼문의 평범한 일상이 보여지며
여기서부터 예감하지 못하는 성삼문에 비하여 예견하고 고민하는 신숙주의
모습이 부각되면서 이들의 각기 다른 삶의 길이 보여진다.
세종의 관심 속에 두터운 우정을 나누던 두 사람은 수양대군의 계유정난을
계기로 각자 다른 길로 들어서게 되는 것이다.
세조의 왕위찬탈을 수용하고 살아남아서 현실 속에서 부정과 싸우며 정의를
차츰 실현시키는 것이 현명한 것이라는 신숙주와
신하의 의무로서 인간의 의무로서 자기의 양심에 따라 칼날 앞에서도 단호히
아니라고 거절할 줄 아는 것이 정의이며 진정한 승리하고 말하는 성삼문.
여기에 피의 숙청을 거듭하면서도 인간적인 고뇌와 갈등에 괴로워하는 세조.....
고통의 시절에서 야망을 품고 자신의 목표를 향해 무섭게 나아가는 한명회.....
이들 각각의 당위성에 따라 사건이 진행된다.
세조의 왕위찬탈의 찬반으로 서로 다른 길을 선택하게 된 두 학자의 갈등은
깊어만 가고, 선왕의 영혼을 마주하며 괴로워하고 아내에게서조차 떳떳한
죽음을 강요받으면서도 자신이 선택한 길을 가는 신숙주는 결국 아내의
자결소식을 듣게 되는데.......
이는 성삼문 일가의 불행하나 화합된 죽음과 대조를 이루며 인간의 선택에
대한 절대적인 고독을 보여준다.
성삼문의 아내가 보여주던 화목하고 사소한 일상의 행복과
시체가 피의 산을 이룬 혁명이 대조되는 것이다.
새롭고도 역설적인 역사의 재해석 계유정란을 배경으로 '사육신 거사'의 해석과
각 인물들을 통해 역사의 당위성과 정의를 오늘의 시각으로 가늠. 선악의 이분법적
사고를 배제하며, 사소한 일상의 행복과 시체가 피의 산을 이룬 혁명이 대조된다.
서로 다른 길을 선택하는 과정의 주장과 주장의 대등한 평형원칙의 극 구성은
각각의 설득력을 지니며 냉혹한 이 작품의 질서를 발견케 한다.
누구의 삶이 옳다고 판단하는 것은 보는 사람들의 기호가 되어 인간의 선택에 대한
절대적인 고독을 보여준다.
이 연극의 등장 인물들은 성삼문과 신숙주, 그리고 그들의 아내, 수양대군, 한명회 등 한 시대를 풍미하며 각자의 길을 찾아 갈등했던 인물들이다. 흔히 성삼문은 옳다고 믿는 일을 위해 목숨까지 바친 절개의 상징으로, 그리고 신숙주는 쉽게 상해 버리는 숙주나물에 비교될 정도로 변절자의 상징으로 여겨지고 있다. 그러나 이 연극에서는 수양대군과 단종 사이에서 두 사람이 가지는 위치와 관계를 통해 두 사람이 겪었을 것으로 짐작되는 인간적인 갈등을 표현하면서 동시에 인물에 대한 재평가를 시도한다. 여기에 피의 숙청을 거듭하면서도 인간적인 갈등에 괴로워하는 세조와 자신의 야망을 향해 질주했던 한명회의 이야기가 촘촘히 엮여 들어간다. 인물들의 갈등과 선택은 김상열이 즐겨 사용했던 희비극 연출법을 통해 마치 관객이 한 판의 놀이마당을 구경하는 것처럼 몰입하게 한다.
작가의 글 - 김상열
이 작품은 장 아누이의 <안티고네>를 보고 뭔가 느낀 것이 있어 우리도 우리의 문제를 歴史 속에서 찾아내어 우리의 言語로서 한번 해봄직도 하지 않겠는가 하는 어줍잖은 사명감에서 시작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 못생긴 作品은 공연의 기회를 얻지 못하고 이리저리 구박을 당하다가 그도 그럴 것이 재주 없는 필치의 소산이려니 하고 어딘가에 쳐박아 두었는데 거의 잊혀질 즈음에 어디선가 희곡을 公募한다기에 이백만원의 賞도 그럴싸하고 해서 서랍을 뒤적거리다가 우연히 손에 걸려들었다. 겸손한 얘기가 아니라 당선될 자신도 별로 없고 공연될 가망도 희박하여 다시 내동댕이치려다 다시 읽어보니, 부모가 불구의 자식한테 더 큰 연민의 情이 쏠린다고 하듯이 왠지 정이 들고 가련해서 밑져야 본전이란 마음으로 出家를 시켰다. 말이 너무 많다는 심사위원들의 심사평과 함께 겨우 턱걸이를 하여 가작의 영광을 얻어, 가뭄에 소나기 만난듯이 외상술값 갚는데 상금이 요긴하게 쓰여져 그런대로 재수있는 78년이구나 하고 기뻐하던 참이었다. 그러나 가작은 出版 公演도 지원이 되지 않는다는 公募 방침 때문에 出家시켰던 녀석은 상금만 달랑 들고 귀가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그러던 차, 연극協会의 배려로서 月刊 「한국연극」에 作品이 실리는 행운을 얻었고 대한민국연극제 계획이 문예진흥원에서 발표되자, 혹시나 어느 극단에서 연락 오지 않나 하고 内心 기다렸으나 깜깜무소식. 결국 活字로 끝나는구나 하고 포기하고 있던 참에 이 작품을 쓴 이후 최고의 기쁨을 맛보게 되었으니, 극단 작업의 吉明一 兄이 날 찾아야 이번 演劇祭에 「길」을 가지고 하고 싶으며 자신은 이 作品에 감동을 받았다는 것이었다. 자기 자식 칭찬받아 싫은 부모 없듯이 내 작품을 좋게 읽어준 내 「作業」의 同志들에게 오히려 내가 감동하여 公演許諾을 즉각 해주었다. 作品의 수준이야 어떠튼 간에 나와 이 時代를 공감하며 사는 친구들이 있다는 게 더할 나위없이 기쁜 일이었다. 戯曲에서의 말은 압축되고 생략되며 그것이 다양성을 지닌 象徵의 알맹이가 되야 한다는 것도 알면서 굳이 고집스럽게 말을 길게 늘어놓은 것은 아직은 말(言語)의 연극을 해야 한다고 스스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2천 년 동안 말의 文化圈속에서 살아온 사람들은 이제 당연히 言語을 变質시키고 심지어 言語를 생략할 수도 있지만, 이제 70년 남짓 어설프고 나이 어린 우리 연극은 더 말을 많이 해야 하지 않겠는가. 말에 진절머리를 느끼고 회의를 느껴야 할만큼 우리가 언제 말을 하여 보았는가? 아니면 전혀 할 말이 없다는 것일까? 아직도 할 말이 많고, 말할 수 있다는 작은 용기를 줄 여러분들에게 감사를 드리며 우리 演劇 風土 안에 가짜와 진짜가 명확히 구분되는 때가 분명히 다가온다는 사실을 나의 연극친구들과 함께 다시 다짐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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