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희곡

F. 뒤렌마트 정진수 번안 '마춘자 여사의 귀향'

clint 2024. 12. 26. 12:45

 

 

극심한 불황으로 거의 파탄지경에 이르른 상태인 도시에 이곳 출신인 
세계적 갑부 마춘자여사 가 고향을 찾는다는 소식이 전해진다. 
모든 사람이 그녀를 환영하러 역으로 나가 기다린다. 
말할 것도 없이 혹시라도 그녀가 고향을 되살릴 수 있는 자금을 지원해줄
지도 모른다는 기대감 때문. 마침내 도착한 그녀는 사람들이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어마어마한, 상상을 초월한 거부였다. 
거기다 검은 표범 한 마리와 빈 관(棺)하나를 대동한다.
환영만찬에서 마여사는 어마어마한 거금을 이 도시에 지원하기로 약속하는데, 
시민들에게 이 제안은 상상을 초월한 유혹이다. 다만 그 대가로 
소녀시절 그녀의 애인이었던 오태환을 죽여 그 시체를 넘겨달라는 것이다. 
오태환은 옛날 자기의 아이를 밴 소녀 마춘자를 차버리고 딴 여자와 결혼했을 
뿐만 아니라 마춘자가 그 사실을 읍의 재판정에 청원하고 고발하자 
재판에서 엉터리, 증인을 내세워 마춘자를 파렴치한 거짓말쟁이로 만들어
마을에서 내쫓았다는 것. 어린 나이에 임신한 채 마을을 쫓겨난 마춘자는 
처참한 방황생활을 하게 되고 어린 딸은 얼마 뒤 죽고 말았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동요하고 시장은 비인간적이라는 이유로 그 제안을 거부한다. 
그러나 여자는 여유 있는 웃음과 함께, "기다리겠다"는 말 한마디만 던진다. 
그 후 도시의 분위기는 점차 달라지기 시작한다.
일용할 양식조차 궁하던 사람들이 갑자기 외상으로 고급물품을 구입하고, 
모든 사람들이 사치스런 생활을 누리려든다.
남자는 살해의 위협을 느끼고 경찰에게 여자를 살인교사죄로 처벌할 것을 
요구하지만 경찰은 남자의 말이 근거 없다는 이유로 무시해 버린다. 
성당의 신부에게 하소연해보지만 신부 역시 영혼의 죄를 씻고 천국을 
준비하라는 따위의 선문답으로 남자의 두려움을 외면한다.
한편 여자가 가져온 빈 관- 아마도 남자의 시체를 담아갈- 은 매일매일 
여자의 하인들에 의해 치장되기 시작하고, 여자는 데리고 온 검은표범을 
풀어 마을 사람들로 하여금 사냥에 나서도록 한다. 
남자는 도시를 탈출하기 위해 몰래 역으로 나가지만 어느새 알고 달려온 
시민들이 남자를 가로막고 떠나지 못하게 한다. 
남자는 벗어날 길이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자기의 죄와 그 대가를 
받아들이기로 마음먹는다.
한편 시장은 이 기회를 이용해 명예롭게 자기들이 목적을 달성할 방법을 
강구하는데, 그건 바로 전국의 매스컴이 중계하는 가운데 시의회를 열어 
여자가 고향을 위해 거액을 기부하기로 하고 그 대가로 사소한 정의를 
요구했다는 사실을 공표하는 것이다. 
마침내 시의회가 열리게 되고...

 



번안의 글 - 정진수
이 작품은 독일의 대표적인 현대 극작가 프리드리히 뒤렌마트의 노부인의 방문을 내가 예전에 한국을 무대로 번안한 작품인데 이번에 전주 공연에 맞추어 약간 다시 개작을 하였다. 원작은 독일의 나치스가 집권하여 인류의 대재앙을 불러온데 대한 지식인의 반성문 같은 작품이다. 나치스 세력이 부상하여 마침내 독일을 지배하고 세계사적 불행을 초래하도록 허용한 것은 독일시민들의 무책임한 방관 때문이었다는 것이 작가의 메시지이다. 이 같은 메시지는 오늘날 우리나라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선거라는 민주적 절차를 통해서 집권을 허용했으면 그 정권의 실패에 대하여 국민 개개인도 공동의 책임을 면할 수 없을 것이다. 이 작품은 이 같은 무거운 주제를 담고 있지만 연출을 하면서 나는 이 작품을 풍자적 희극 쪽으로 몰아가서 관객들이 보다 편안하게 볼 수 있도록 만들려고 했다.  

 



유럽은 세계 제2차 대전 후에 경제적인 발전으로 물질만능의 새로운 시대 물결에 휩싸이게 되는데, 이 시기에 뒤렌마트는 <노부인의 방문>을 썼다. 그리고 물질 만능은 현대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의 공식 명칭처럼 되었다. 물질주의란 건강, 부, 향락 등 물질적인 것이 생의 전부요 목적이라고 믿는 가치관을 뜻하는 것이다. 따라서 정신보다는 육체 중심의 인생관으로, 마치 정신은 육체에서 부차적으로 생긴 것으로 생각하여 오직 향락만을 얻으려고 노력한다. 뒤렌마트의 <노부인의 방문>은 물질주의 시대를 잘 반영한 작품으로 가난하고 보잘것없던 도시 귈렌이 마지막에는 화려한 도시로 변모해 간다. 가난은 굶주린 컬렌 시민들에게 물질에 대한 욕망을 갖게 하고, 물질 앞에서 그들의 인간적 약점을 드러내며 마침내는 전체 도시가 부패하게 된다. 처음에 그들은 십 억의 대가로 「일」(번안극에선 오태환)을 죽이려하는 노부인의 부당한 제안을 거절할 결심을 굳게 지니고 있었다. 그들은 「일」을 죽이려는 의도에서가 아니라 모든 「일」이 잘 되리라 생각하고 빚을 지게 된다. 그러나 차츰 그들의 태도는 변하여, 「일」이 과거에 지은 죄에 대해 분노하며 살인을 준비하게 된다. 물질적인 욕심 때문에 돈이 도덕에 우선하며, 그들의 돈에 대한 욕심은 한 인간의 운명을 좌우하게 된다. 마침내 노부인이 「일」에게 복수하는 행위는 그녀가 정의를 실현하는 것으로 정당화되고 「일」의 죽음은 기쁨으로 인한 죽음으로 언론에 보도되며, 가족 조차도 돈 때문에 「일」을 배반하는 약점을 드러낸다. 거대한 부를 소유한 노부인은 운명의 여신처럼 귈렌에 나타나서, 심지어 자선가로 행세하면서 자신의 부를 가지고 컬렌 시민들과 「일」의 운명에 영향을 미친다. 귈렌의 모든 사람들-시장, 의사, 선생, 신부 조차도 도덕성의 타락을 결코 막지 못하며 그들 모두 악을 이기기에는 너무도 약하다. 

 



뒤렌마트가 보여주는 세계는 귈렌에서 보듯이 악이 우세한 세계이고, 혼란에 가득찬 세계이고 개선되기 어려운 세계이다. 도덕적, 종교적, 법적 질서가 의문시 되는 세계이며, 파멸로 치닫는 세계이다. 이러한 비관적으로 나타나는 세계관은 작가의 관점 속에 그의 말세론적 기독교 사상이 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혼란한 세상에서 뒤렌마트는 용기있는 인물을 제시한다. 그는 자신의 계획과 시도가 좌절되고, 자신이 인생에 실패하였음을 인정하는 순간, 보다 높은 질서를 인식하게 되고, 심경이 변화를 일으켜 하나님의 존재를 인식하게 되는데, <노부인의 방문> 에서는 「일 (번안극에선 오태환) 」에게서 우리는 그러한 점을 찾아 볼 수 있다. 「일」은 처음에는 노부인에게 아첨해서, 도시를 위해 기부금을 얻어내고 컬렌 시장으로 출세해 보려는 희망으로 위세를 부린다. 그가 한 때 저지른 노부인에 대한 잘못은 누구나 한 번 저지르는 불장난 쯤으로 가볍게 생각한다. 그러나 노부인이 자신의 과거의 잘못을 들추어 자신에게 복수하려 하고 시민들이 그녀에게 점점 동조하게 되자, 「일」은 극도의 불안에 시달리게 된다. 그는 홀로 긴 시간을 고독 속에서, 번뇌와 고통 가운데 보내면서도 아마도 그는 자신에 대해, 인간 존재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해 보았을 것이다. 그리고는 그는 인간의 본성과 죄악에 대해 새로운 통찰력을 얻게된다. 그는 진리와 도덕에 대해서도 올바른 인식에 도달하게 되는 것이다. 마침내 그는 어리석고 편협한 인물로 부터 자신의 죄를 인식하고 고백하는 겸손한 인간으로 변하게 된다. 그는 자신을 배반하는 귈렌 시민들에게 섭섭해하지 않는다. 원망하지 않으며 저항하지도 않게 된다. 그들의 행동은 자신이 과거에 저지른 잘못에 대한 판결이라고 생각하고, 자신에 대한 정당한 행동으로 받아들인다. 그는 죽음에 대한 공포를 이겨내며 이 세상에서의 자아를 극복하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한계를 알며, 자신의 무력함을 알게된다. 그는 다른 귈렌 사람들이 인식하지 못하는, 인간의 잘못을 볼 수 있는 능력을 지니게 되어, 장래에 하나님의 심판이 있음을 또한 믿게 된다. 과거에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지금 자신들이 무슨 짓을 하는지 깨닫지 못하고 행동하는 컬렌 사람들이 후일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에 견디어 내기를 「일」은 희망한다. 그 성품이 바뀌어져,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자기 죄를 가슴 아파하며, 과거의 자신에게서 돌아서게 되었다. 이러한 변화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 하나님에 의해 인간에게 베풀어지는 은총인 것이다.

 

독일 초연 시

 

 

「일」은 혼란한 세계를 인식하고, 현실 속에 설 땅이 없음을 알고, 하나님을 긍정하는 태도를 지니고, 자신의 죄값을 받아 들이며, 영원한 구원을 바라보며 평안히 죽을 수 있다. 
그는 세상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러나 절망하지 않으며, 정의를 잃어버린 세계에서, 잃어진 세계 질서를 가슴 속에 다시 만들어 내고 수수께끼 같은 불행한 세계에서, 무모한 싸움을 싸우는 대신, 그것을 견디어 내는 용기를 지닌다. 그가 괴로움을 당하고 조소를 당하면서, 끝까지 컬렌 시민들을 원망하지 않는 모습은, 그가 도덕적인 승리를 얻은 윤리적인 인간으로 자신을 보존하고, 세상을 극복하는 모습인 것이다. 그는 하나님의 은총에 마지막 기대를 걸고, 세계를 넘어선 존재이고 죽음을 넘어선 존재라는 점에서 용기있는 인간이다. 반면 귈렌 인들은 어떠한가? 그들은 처음에 기괴한 외모에 이상한 행동을 하는 노부인을 비난하다가 그녀의 행동을 참아주다가, 다음에는 그녀에게 동정을 하고, 마침내는 부당한 요구를 하는 그녀와 한편이 되어 버린다. 그들은 자기 중심적이고 물질에 대한 소유욕이 강하다. 남의 죄는 잘 밝혀 내고 정죄하면서, 정작 자신들의 잘못을 인식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그들은 성서에서 말하는 바리새인과 같은 모습이다. 귈렌 시민들의 이러한 태도는, 인간에 대한 뒤렌마트의 기독교적 견해를 대변한다. 즉 인간은 원칙적으로 선하게 창조되었지만, 타락하여서 그냥 두면 컬렌 시민처럼 악으로 빠져 들어가는 경향을 가지고 있으며, 또한 「일」처럼 하나님에 의해 구속될 수 있는 존재인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개인의 변화 만이 현대의 세계를 개선할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인 것이다. 뒤렌마트는 <노부인의 방문>을 통해 오늘날 이 세상에서 우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를 보여주며, 개개인의 변화를 강조한다고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