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무지가 되어버린 핵폭탄 폭발 이후의 가상 도시...
종이주머니를 뒤집어 쓴 두 명의 등장인물이 살아남아 만나는데
이들이 산 이유가 종이주머니를 뒤집어쓰고 있기 때문이다.
남자는 고교 물리선생... 그의 제자 중에 똑똑한 누군가가 폭탄을 만들었다고 한다.
여자는 미스 유럽... 예쁘다는데 그녀의 ... 아니 서로의 얼굴을 볼 수 없다.
그들은 서로 의지하고 호감을 느끼며 사랑하게 되나 서로 키스조차 할 수 없다.
종이를 벗으면 방사선 때문에 죽을지 모르는 두려움 때문이다.
이들은 사랑할 수 있을까?
작가는 지구를 파멸시킬 수 있는 인간의 능력이 오늘날 우리들 시대에 중요한 논쟁이 될 수가 있다고 생각하고 거기에 대하여 개인적으로 우리는 무언가를 하며 또는 무언가를 할 수 있는가, 라고 묻고 있다. 특히 작가는 현대인이 그들 사생활 밖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에 대하여 알려고 하거나 관심을 두지 않고 타인들이 너무 빈번하게 살인 행위를 하도록 방관만 해왔음을 주목하고 있다. 이 극에서 그의 두 등장인물인 미(美)와 지력(무기력한 미와 쓸모없는 지력)은 알지 못하거나 알려고도 하지 않는 사림들이기 때문에 최후의 재난을 겪은 유일한 생존자로 남는다. 그러면 그들은 그 재난에 대한 책임을 질 수 있었는지? 실제로 인류를 원자화 시킨 장본인이 피직(物理라는 뜻을 가진)의 옛날 제자였다는 것이 암시되어 있다. "그렇지만 난 내 학생들에 대한 책임은 없습니다.” 라고 피직은 성급히 변명한다. 허나 그건 말할 것도 없이 큰 문제인 것이다. 우리들 중에 누가 책임이 없단 말인가?
그러나 이 극 속에는 아이러닉한 뒤틀림이 있다. 표면적으로 보아 두 사람이 살아남은 것은 훌륭한 관리라기보다는 행운이었다고 할 수 있으며 또한 그들이 머리 위에 쓰고 있는 종이 주머니는 무지(無知) - 그로 하여금 책임을 두려워하게 만드는 것과 그녀를 전적으로 남의 결정에 의존케 만드는 것에 대한 - 를 상징하는 각 타입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무엇보다도 이들의 종이 주머니가 그들의 생명을 구할 수 있다는 사실은 최대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감상적이고 코믹한 난국에 이르러서 두 등장인물은 약간의 용기와 약간의 지혜를 배워 또다시 그들의 삶을 출발하려는 듯이 보인다. 그러나 시기가 너무 늦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과 그들이 종이 주머니를 벗을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을 던져 준다. 작가가 던져준 이러한 의문은 안타깝게도 미지수로 남아 있다. 왜냐하면 결국 작가도 다름 아닌 우리들 자신에 관해서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에...
데이빗 캠프턴(1924~2006)
영국의 새로운 극작가 중에서 가장 최근에 알려진 작가이다. 캠프턴 은 대략 평론가들로부터 "위협의 희극" (Comedy of menace)를 주로 써내는 작가로서 주목받고 있다고 하겠는데 이러한 작가의 경향을 두드러지게 보여주는 작품으로 「도착된 시야」(The Lunatic View, 1957)를 들 수 있다. 네 개의 단막물로서 이루어진 이 작품은 비교적 전통적인 연극형식을 고수하민서 그 나름의 위협 희극을 완성하고 있으며「그럼....」(Then ...)은 이 네 개의 소품 중에서 가장 완벽한 것이다. 일반적으로 위협희극이라고 하면 핀터의 「방」「생일파티」로 비롯되는 작품을 기술하기 위해서 생겨난 것으로 알고 있는데 캠프턴의 경우에 있어서 위협희극의 개념은 핀터의 그것과는 아주 상반된 일면을 갖고 있다. 작품의 형식적 구성면에서 본다면 캠프턴은 단막극의 자유로운 형식을 취하고 어떤 절정적인 사건을 추구하며 또한 논리적인 대사를 추구하는 대신에 불투명한 느낌을 강조하는 대사를 구하는 점에서 핀터와 유사성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한마디로 핀터와 다른 것은 그가 과도하다고 할 정도로 사회적 양심이라는 문제를 작품 속에서 주장하고 있는 점이다. 작가의 사회적 발언과 결부시켜 부조리의 연극을 그 나름대로 분석하는 중에 그는 다음과 같이 그의 작가적 의도를 표명하고 있다. '내 생각으로 부조리의 연극은 독버섯 균처럼 퍼지는 자기만족에 대항하는 하나의 무기이다. 그리고 자기만족이라는 무기는 비둘기장과 같은 것이며 이 비둘기장이라는 개념은 하나도 해로울 게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성능이 좋은 폭탄을 갖고 있으니까) 그러나 부조리가 최고로 판을 침에 따라 인간존재의 밑바탕이 흔들릴 때 자기만족 하기란 어렵다. 말할 것도 없이 이미 이름을 부친대로 부조리의 연극은 비둘기장 그 자체를 부셔버리는 위험에 처해 있다.' 그러므로 핀터의 위협희극에 있어서 위험이 개인적인 안전에 대한 외부 세계의 끊임없는 공포에서 온다고 한다면 켐프톤의 그것에 있어서 위협은 폭탄이 갖고 있는 공포인 것이 명백하다. 그의 사회적 관심은 전기한 작품 외에도「낭떠러지에서의 조망」(A View from the Brink) 「4분 경고」(Four Minute Warning) 「귀여운 자매」(Little Brother, Little Sister),「역전의 용사 돌아오다」(Soldier from the Wars Returning) 등의 작품 속에서 현대사회의 정치적 분쟁, 사회적 편견, 핵전쟁이라는 문제들로서 진지하게 표명되어 있다.
이 작품은 국내에 공연 기록이 없다. 극단 광장에서 공연하려고 준비했다가 공연이 안 된 작품인 것 같다. 아마도 1970년대 이런 작품(핵 위협 내지는 배우가 종이 봉지를 뒤집어 쓰고)을 공연하는 것이 관객이나 하고자 하는 배우도 드물었을 시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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