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희곡

김풍년 '그물'

clint 2024. 11. 20. 16:09

 

 

<그물>은 심청을 인당수로 데려가는 남경장사 선인들의 배 위에서 시작된다. 
두 명의 배우가 등장해 말을 얹는다. “만 이랑 푸른 파도 위”라는 말에 

구부러진 합판의 옆 곡선은 돛을 단 배가 된다. 입으로 만들어내는 바닷바람과 

철썩대는 파도소리에 배는 앞으로 나아간다. 두 명의 배우가 두 장의 합판과 

몇 가지 소도구로 만들어내는 이야기에 빠져들다 보면 익숙한 장면들이 

하나둘 떠오른다. 합판 위에 올라 그 가장자리 너머로는 바닥이 안 보이는 

검은 물인 양 내려다보는 심청과 합판의 끄트머리가 노인 양 끼익, 끼익 

입소리를 내며 젓는 남경장사 선인. 스테인리스 대야의 챙챙거리는 소리는 

인당수에 도착해 때가 됐다며 심청을 몰아세우는 굿 소리다. 

죽음이 다가오는 소리와 흔들리는 뱃전에 심청이 휘청거린다. 

물속으로 뛰어내린 심청이었던 배우의 몸은, 

그 자리에서 한 박자 늦게 그를 잡으려 손을 내민 선인이 된다.
더 나아갈 것 같은 연극은 심청이 인당수에 뛰어든 시점에서 멈춘다.
얼마 전의 상황이다. 청이 아버지는 늦어지는 딸을 마중 나갔다 개울물에 빠진다. 

때마침 목숨을 구해준 몽은사 화주승에게 공양미 삼백석을 시주하기로 약속한다.

여기서 갈등은 시작된다. 청이는 공양미 삼백석이 도대체 무엇인지 생각한다. 

 

 


 <그물>에서 심청은 애초에 죽을 계획이 없다. 왜 죽어야 하는가. 처음부터 그건 선택지에도 없다. 그렇다고 화주승의 말 한마디로 생겨난 공양미 삼백 석을 동냥으로 해결하고 싶지도 않다. 하지만 가만히 아무것도 안 하겠다는 심보는 아니다. 내가 이리 뛰고 저리 뛰어서 세상을 바꿀 수 없다면 나를 바꾸지 않음으로써 세상이 내 주위로 구부러지고 휘게 해야지 하는 결단이다. 물의 방향이 바뀌는 울돌목은 바다가 운다고 해서 울돌목이다. 그건 “물의 방향을 바꾸려고 애쓰며” 우는 소리이다. 
천라지망, 하늘도 땅도 그를 가두는 그물이다. 이런 상황에서 심청은 그물을 찢는다. 심학규가 방 안에 앉아서 짜 내려간 그물을 남경장수 선인들에게 주며 자신이 인당수에 빠진 뒤에 던져 달라고 한다. ‘제갈공명이 인제 대신 사람 머리 모양의 만두를 던졌듯’ 사람을 바쳤으면 됐지, 바친 사람을 다시 구하지 말라는 법은 없다. 그렇게 심청은 자진해서 바다 속을 두 쪽으로 찢고 내려간다. <그물>의 심청은 판소리 <심청전>의 이야기를 그대로 따라갈 생각이 없는 것처럼 이야기를 구부리고 비틀고 반으로 찢어버린다. 인당수로 향한 배에서 시작된 이야기는 남경장사 선인들이 던진 그물을 잡고 인당수에서 나온 심청이 새로운 항해를 떠나는 곳에서 끝난다. 

 

 

 


판이 열리자마자 사나워진 바다 한가운데 어지러운 배 위에서 선원들이 심청에게 어서 바다로 뛰어들라고 재촉한다. 심청 인당수에 빠지는 모습을 내레이터는 '찢었다'고 표현한다. 이야기는 심청이 바다 표면을 찢으며 인당수에 뛰어드는 데에서 시작해서 여러 번 바다를 찢고 들어간 후 과거로 돌아가기를 반복한다. 바닷속에서 죽음을 목전에 둔 심청이 마치 주마등 장면을 하나씩 마주하는 듯하다. 짧은 상연 시간에도 불구하고 반복 장면이 많아 지루하게 느껴지는 것은 아쉽지만 심청이 바다를 찢을 때마다 우리는 조금씩 새로워지는 심청이야기를 만나게 된다. 곽씨 부인이 죽기 전 어린 시절부터 함께 자란 동무인 귀덕 어멈에게 갓난아기를 부탁하는 장면, 심청이 몽은사 화주승을 찾아가는 길에 고민하는 장면 등 화자가 전달하려는 장면을 마치 따로 떼어낸 듯이 크게 확장해서 자세히 보여주는 것은 전통 판소리를 닮았다. 이뿐만 아니라 모든 사건이 시각적 움직임보다는 배우 한 명의 말 속에서 이루어지지만 눈앞에 그려지는 듯 생생하게 전달되는 점도 판소리를 닮았다. 서사문학과 연극이 갈마들며 강하게 장면 속으로 관객을 끌어들이는 판소리 말이다. <그물>에서는 전체 사건의 흐름보다는 내레이터의 안내를 받아 바로 도달한 특정한 장면의 순간순간이 확대된다. 서사문학의 자세한 묘사보다는 연극적인 생생한 표현과 일상적이라서 더욱 진심을 울리는 대화가 장면을 꾸미고 있다. 그래서 <심청가> 속에 늘 있던 그 효녀, 그 어리석은 아버지가 아니라, 한층 더 살아있는 인물들을 만날 수 있다. 사람뿐 아니라 동식물과 사물까지도 살아있는 듯이 묘사된다. 심지어 그물도 마치 등장인물처럼 거동한다. 내레이터가 "그 그물 거동 봐라"하며 입을 떼어 장면을 묘사하면 그물이 주체가 되어 심청을 구하러 바다 밑으로 퍼져나가는 모습이 눈앞에 보이는 듯하다. 말의 생생함은 적절한 순간에 딱 적절한 만큼의 움직임으로 판소리의 발림처럼 관객의 상상력을 폭발시킨다. 눈앞에 그려지는 듯한 말의 묘미를 잘 살리면서도 장단과 소리가 없는 대신 발림이 강화된 새로운 양식의 판이 흥미롭다.  
판소리 원작에서 초반에 나오는 곽씨 부인의 죽음은 부인을 잃고 홀로 아이를 키워야 하는 심봉사의 애처로움이 더욱 두드러지도록 짜인 반면에, <그물>에서는 곽씨 부인의 현명함과 동네 아낙들 사이의 연대가 잘 드러난다. 특히 곽씨 부인과 어린 시절부터 동무였던 귀덕 어멈은 심봉사를 등쳐먹는 악녀의 대명사인 뺑덕어멈(을 대신해서 활달하고 강인한 여성으로서 새로운 씬스틸러로 자리 잡는다. 곽씨 부인이 죽기 전에 심봉사가 아니라 귀덕 어멈에게 심청을 부탁하면서, 효녀를 키워낸 아버지 심봉사의 중요성은 다소 축소된다. 그리고 심청이 진짜 주인공이 되어 전면에 나선다. 
 심청을 모르는 한국인은 없을 테지만, 우리는 효녀 심청은 알아도 인간 심청의 목소리를 제대로 들어본 적은 없었다. 효라는 개념이 똘똘 뭉친 효의 화신, 효의 인간화가 바로 심청이다. <심청가>에서는 어떤 고민의 흔적도 없이 아버지를 위해 목숨을 내놓는 효녀의 모습은 보이지만 인간 심청의 마음이나 의지가 담긴 목소리를 듣기는 어렵다. 심청이 목소리를 내는 것은 자신이 아닌 아버지를 생각할 때뿐이다. 아름다운 '추월만정'에서 심청은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마음을 토로하지만 그리움에 사무친 절절함보다는 황후로서의 쓸쓸한 고독과 우아한 기품이 더 크게 느껴지기도 한다. 과연 심청의 뇌구조 안에 아버지 외에 다른 것이 들어있을까 싶다. 이 기계적 캐릭터의 딱딱함을 상쇄하는 것은 심봉사의 인간적 어리석음이나 뺑덕이네의 세속적 욕망이다. 그래서 제목은 <심청가>일지언정 심청보다는 심봉사나 뺑덕이네의 목소리가 더 크게 들리곤 했다. 특히 모녀를 잃은 심봉사의 슬픔과 인간적 어리석음 등은 꽤나 입체적이다. 
채만식이 1936년에 개작한 희곡의 제목이 심봉사인 것이나, 펭덕이네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뺑파전>이 창극과 마당놀이로 만들어져 오랫동안 대중의 큰 사랑을 받았던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채만식의 희곡에서 결국 심청은 돌아오지 못하고 심봉사는 눈을 떴다가 심청이 돌아오지 않은 것을 알고 스스로 눈을 찔러 다시 멀게 한다. 이후 최인훈의 <달아 달아 밝은 달아>(1979)와 오태석의 <심청이는 왜 두 번 인당수에 몸을 던졌는가>(1990)에서도 심청이야기는 원작과 달리 희망을 잃고 좌절하는 이야기로 다시 만들어진다. 하늘의 질서가 결국 잘못을 바로잡아 주리라던 전통사회의 믿음이 깨진 이후 현대의 비극 영웅 심청은 고난을 반복할 뿐 승리하지 못한다. 한편 여러 개작 중에 공옥진의 1인 창무극 <심청전>에서 심청의 목소리는 귀 기울여 들어볼 만한데, 어린 심청은 술래잡기하다가 문득 잠시만 눈을 감아도 이렇게 답답한데 일평생 눈을 감고 있는 아버지는 어떠한가 생각하며 심봉사의 고통을 깨닫는다. 그리고 심청이 인당수로 팔려가는 대목, 공옥진 자신이 어린 나이에 아버지의 징용을 빼려고 일본에 팔려갔던 일화에 비춰 심청의 희생이 터무니없는 일이 아님을 역설한다. 
<그물>에서 심청 역시 아버지를 위해 팔려가는 신세를 적극적으로 선택하는 효녀지만, 그 선택을 하기까지 심청이 무엇을 느꼈는지 뭘 하고자 했는지, 그의 의지가 드러난다. 효녀로 행동하는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심청이 자신을 짓누르는 현실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고 있다는 것이 중요하다. 안 그래도 힘든 삶인데 개울사건 이후 두 부녀는 하늘에도 땅에도 그물이 쳐진 듯 하늘로 솟아날 수도 땅으로 꺼질 수도 없는, 어디 도망갈 구석이 전혀 없죽는다는 것이 무엇인지도 아는 의젓한 인물로 형상화된다. 따라서 청은 스스로 살길을 구한다. 우선은 몽은사를 직접 찾아가서 화주승을 설득하고 다른 방법을 마련하려고 한다(결국 포기하지만, 몽은사 가는 길에 심청이 고사리, 뱃새, 화살나무에게 이야기하는 장면은 다정하고 늘 우리 가까이 있던 자연과 애니미즘, 곧 현대 사회가 회복해야 할 정신을 보여준다.) 귀덕 어멈은 공양미를 모으기 위해 직접 팔을 걷어붙이고 결국 십시일반 삼백석을 모으는데 성공하지만, 심청은 이를 거절하고 인당수로 떠난다. 그러나 결코 자신의 목숨을 가벼이 여겨서 그런 것이 아니라 아버지도 구하고 자신도 구할 방법을 찾았기 때문이다. 심청은 선원들에게 부탁해서 자신이 빠진 바다에 심봉사가 짠 그물을 던지도록 하고 그 그물이 심청을 구한다. 
심청이 그물을 잡고 스스로를 구한 후, 그 뒤야 누가 알리 더질더질~ 내레이터도 관객도 그걸로 족하다. 심봉사의 눈이 떠지는 기적은 중요하지 않다. <그물>은 현대에 들어 다른 개작 작품들이 포기했던 기적을 만들어낸다. 심청은 삶을 포기하지 않고 아버지와 자신을 위해 깊이 고민한 끝에 기적 같은 묘수를 둔다. 그야말로, 찢었다! (연극평론가 이진주)



작가의 글 - 김풍년
되는 일이 없었다.
이렇게 안 될 수가 있나 싶을 정도로 다 된 밥 위로 재가 날렸다. 
보이지 않는 누군가가 내 목덜미를 잡아, 
결정적인 순간마다 저 구석으로 내던지는 기분이 들었다.
누가 그러는데, ‘천라지망(天羅地網)’이란다.
하늘 천, 그물 라, 땅 지, 그물 망
하늘에 그물이요, 땅에도 그물이다.. 
무엇을 하든 간에 그물에 갇힌 신세란다. 
눈을 떴으나 감은 것과 다름없고
두 발로 걸으나 주저앉은 것과 같으니
황주 도화동 심봉사 부녀 꼴이 예 아니더냐. 
심씨 부녀는 개울 사건 후로 ‘천라지망’에 갇힌다. 
공양미 삼백석을 기일까지 몽은사에 시주해야 한다는 부담 때문이 아니라,  
부처님과의 약속을 어길 시 앉은뱅이가 된다는 두려움 때문이 아니라, 
시력을 잃으면서 세상도 같이 잃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실감하였기 때문이 아닐까. 
청이가 아버지에게 ‘개울사건’을 처음 들었을 때는 어떻게든 해결할 수 있겠다 생각했다. 
동냥이 됐든, 천지신명의 도움이 되었든, 지금까지 그냥 그렇게 흘러갔으니. 
어느 날, 청이는 이불을 걷어찬다. 
어떤 뾰족한 수가 있는 건 아니지만
믿는 구석이 있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삶을 포기한 건 더더욱 아니지만 안해야지.
안하면? 어떤 뾰족한 수가 있느냐고? 
있긴, 있을리 만무하나, 
안해야지. 

 

김풍년 작가겸 연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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