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대위에는 <재>와 <몸>과 <옷>이 있다.
몸은 죽어 재가 되어야하는데 그들은 옷을 통해 불멸을 꿈꾼다.
하여 <재>와 <몸>사이에 <옷>이라는 인간의 이야기가 놓인다.
<재>
재는 구체적으로는 사람을 화장하고 남은 재일 수 있으며,
더 이상 변할 수 없는 마지막 상태의 물질로 무대 위에 놓여 진다.
<몸>
몸은 사람을 말한다. 그들은 무대에서 유기물로서의 종말에 대해 슬퍼하며
'곡'을 한다. 그들의 죽은 자에 대한 슬픔은 죽음에 대한 공포와 거부,
그리고 불멸에 대한 추구이다.
<옷>
옷은 인간에게 권력과, 그리고 不死의 영혼을 불어 넣는다.
문명은 옷을 입은 인간에 의해 시작되었고 불멸을 지향하며 완성되어 간다.
옷은 인간이 갖는 불멸에 대한 욕망이며 의지이다.
<이병복의 옷>
맨살의 배우는 옷을 입고 나서야 자기의 역을 갖게 된다.
이병복의 옷은 배우들의 운명을 결정하며 무대에 남는 것은
그들이 벗어 놓은 옷이다.
옷을 벗고 그들은 사라진다. 버려진 옷, 버려진 몸. 죽어간 역할들.
이 공연은 이병복이 참여한 피의 결혼, 억척어멈. 왕자 호동, 햄릿 등에
등장했던 옷을 텍스트로 삼는다.
<시간, 공간, 이미지>
시간은 필름이 편집되듯 잘려지고 지나치게 느리거나 반복되며,
공간은 '재'가 놓인 사각형의 바닥과 그 주변
그리고 검은 벽으로 둘러싼 뒤쪽 공간 모두 3겹으로 나누어지는데,
이미지들은 이 독립적인 각각의 시간과 공간 안에서 서로 연결되거나 병치된다.
공연은 이들 겹의 공간과 시 간을 자유로이 왕래하는 현실과 이미지 사이에 있다.
<빛, 소리, 움직임>
검은 벽과 '재'가 놓인 바닥이 있을 뿐인 무대는 빛, 소리,
배우의 움직임에 의해 시공간이 완성되므로
이들은 환경장치이자 무대의 요소이다.
요소들은 무대 위의 물질로서 스스로의 정체성(Identity)은 가지지 않는다.
이러한 요소들의 채워진 비어있거나 또는 꽉 차있는 무대에서 이들이
어느 순간 정체성을 갖고 지향점을 향해 움직임이므로
드라마가 만들어진다.
<살>
죽음을 사회, 문화로서 다루지 않는다면 우리는 스스로의 존엄을 잃을 것이다.
우리가 속한 사회는 삶의 공동체일 뿐만 아니라 죽음의 공동체이어야 한다.
즉, 죽음이 곧 삶의 통과의례 일 뿐이라는 위로가 죽음을 준비할 수 있게 한다.
연극은 이러한 인간공동체를 회복하는 작업이며 공연에서는
산자와 죽은자의 관계를 재현이라는 형식을 통한
만남으로서 씻김굿의 형식을 빌린다.
작가의 말 - 이병복
주어진 무대 시공에서 배우의 몸과 더불어 연소되는 옷들, 공연 막이 내리면 그저 벗어던지는…. 그것뿐인 슬픈 옷들, 그들의 서러움을 내 맘이 듣는다. 어느 것은 아까워서, 어느 것은 빛도 보지 못해 한스러워서, 맘에 차지 않는 것은 다시 손질하고 싶어서, 이런 이유 저런 사연 때문에 차마 어쩔 수 없어 간수해온 옷들과 도구들. 연극 공간을 꾸미고, 옷과 도구들을 만들면서 무대 뒤에서 보내온 40년 가까운 내 시간들, 그 흔적들이 한 올 한 올에 담긴 옷들. 이 옷들은 연기자가 입고 무대에서 움직일 때 비로소 그 생명을 얻는 것이 아닌가. 하지만 그 옷들은 나의 분신이라고 감히 나는 말한다. 그래서 덤벼든 것이 이 작품이다. 이 분신들의 수의를 만들어 몸을 빌어서 어디엔가 좋은 곳으로 천도하고자 하는 것이다.
‘옷살풀이 공연의 의미’ - 서연호
이번에 이병복이 하고자 하는 ‘옷살풀이’는 전승개념인 살풀이가 바탕이 된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의 삶을 대상으로 한 새로운 연희를 만들고자 하는데 목표가 있고, 동시에 삶의 본질성을 표현하려는 점에 의도가 있다. 전통에 근거를 두고 있지만, 매우 새로운 실험극인 셈이다. 평생 무대의상을 만들어 온 이병복이 그 옷을 연극도구로 하여 연행하게 되는 만큼 ‘옷살풀이’로 부르기로 한다. 옷은 인간을 만든다. 인격과 인간성은 옷으로 기억되고 상징된다. 사람은 죽으면 옷이 남는다. 그 옷은 인간으로 상징되고, 옷 가운데는 영혼이 깃드는 것으로 인식된다. 연극의 배역도 옷을 입어야 인격으로 되살아난다. 무대의상을 가지고 배역의 인격을 되살리고, 인격들의 삶을 재현하며, 인생과 동등하게 그들에게도 수의를 입혀 좋은 저 세상으로 모시고자 하는 것이다. 이병복은 이처럼 주변의 숱한 인생뿐만 아니라, 자신이 창조한 배역들에게도 살을 풀어주려는 옷 철학을 지니고 있었다. 무대 위의 배역들에게도 부끄럽고 속죄하는 마음을 지닌, 그래서 그들의 영혼을 비는 이 아름다운 ‘옷살풀이’야말로 또 하나의 원형의 연극이라 할 수 있다.
‘또 다른 이미지 연극 창작을 지켜보며’ - 최준호,
이 작업은 공동창작이 불가피하기에 여러 분야의 예술가들에게 매력이 있고, 이번 창작에서도 좋은 예술가들을 불러모았다. 의상(이병복), 움직임(김삼진), 소리(김벌래), 빛(이상봉)이 배우들과 함께 연출(윤정섭)을 중심으로 한 편의 현대적인 시극을 쓴다. <살-이병복의 옷굿>의 창의로운 세계는 이런 만남을 기초로 하고 있기에 호기심이 더욱 커진다. 여느 이미지 연극과 다른 창의로움은 몇 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먼저 제목 ‘살-옷굿’이 시사하듯이 이 작품은 죽음을 둘러싼 우리의 의식을 주내용으로 담고 있다. 의상디자이너이자 무대미술가인 이병복이 창작에 참여한 작품들 중 <피의 결혼>, <억척어멈>, <왕자호동>, <햄릿>에서 죽음을 맞는 장면들이 움직임, 소리, 빛을 중심으로 재현되고 서로 연결되며 전체는 죽은 자들을 위한 하나의 진혼굿을 이룬다. 망자들의 잿빛 옷은 흙이 되어 사라지고, 위로받은 산자들의 인생이 옷을 갈아입고 기억처럼 하나씩 눈앞을 지나간다. 공연의 맥이 이렇게 의상에 의해 형성되어 있는 점이 새롭고, 반대로는 공연을 수용하는데에 어려움을 줄 수도 있겠다. 전체적인 추상성이 다양한 생각의 길을 열어주기 보다는 끊임없이 감각과 감성을 두드리기 때문이다. 하지만 빛, 소리, 몸의 움직임, 색, 질감이 주는 강렬한 느낌은 현실을 지시하는 고리를 통해 은유의 차원으로 관객을 이끌고 감으로써 현장예술만이 줄 수 있는 독특한 체험과 사색의 세계를 열어준다. 효과를 위해 쓰이던 음향은 극의 시작부터 관객의 압도하며 하나의 감정으로 묶어주고, 나아가 조명과 결합되며 소리의 영역을 확장시켜준다. 그들이 연습에서 실험하던 ‘햇빛음악’이 실현된다면 어떤 환희로운 느낌을 줄 수 있을까. 18인의 배우들이 따로 또는 함께 보여주는 굵고 격렬한 몸짓들도 제의성과 표현성을 동시에 가지면서도 궁극적으로는 전체를 표현하는 수단이 된다. 이들로 인해 피어오르고 던져지는 흙 먼지의 뽀얀 색깔조차도 조명의 도움으로 극이 표현하는 세계를 만들어낸다.
‘위기 속의 시도들, 1999년 창작무대’ - 이화원,
서울국제연극제 공식참가작 중 하나였던 극단 자유의 <옷굿-살>의 경우 역사와 전통으로부터 단순히 소재를 가져오기보다 전통 연희에 풍요롭게 내재되어 있는 굿의 제의성을 주축으로 하는 흥미로운 발상과 창의적 무대표현으로서 주목을 받았다. 윤정섭 연출로 문예회관 대극장에서 공연된 이 작품은 무대의상가로서 무수한 인물들의 의상을 만들어 온 이병복이, 막은 내리고 모든 것이 스러진 가운데 남겨진 옷들의 한을 씻어주고자 하는 개인적 염원에서 시도한 한판의 씻김굿이었다. 막 뒤 그들만의 머나먼 시공간으로 스러져 간 역할들의 혼을 순간에 불러내듯 초혼의 음향이 진동하는 가운데 옷들의 퍼레이드가 장중하게 진행되었다. 전반부 밀가루를 활용한 시각적 효과가 기승한 가운데, 다섯 편의 서로 다른 연극에서 불려 온 역할들과 그들의 옷이 변별성 있는 이미지로 구축·전달되지 못하여, 다소 밋밋하다는 평도 있었다. 그러나 연극의 제의성을 구현하고자 하는 실험적 의도를 품격 있게 실천한 공연으로서 ‘전통의 재발견’이라는 이번 서울국제연극제의 주제를 나름대로 살려낸 무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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