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대는 1950년 강원도 양구군 암리, 일명 무명리와 2000년 서울의 모 기관 조사실,
시대와 공간을 초월한 두 장소다. 높은 봉우리에 둘러 쳐지고 수풀이 우거진 탓에
그림자 볼 시간도 없다하여 붙여진 이름이 그림자 없는 마을 무영리다.
1950년 6월 무영리에 한 계집아이가 태어난다.
아이의 어머니는 서울에서 시집을 와 ‘서울네’라 불리는 벙어리,
아이의 아버지는 무영리에서 태어나 어릴 때부터 서울로 유학 가있는 ‘박일국’이다.
그러던 어느 일요일,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하게 된다.
마을 주민들은 성벽을 쌓듯 나무를 더 우거지게 해 숨어 지내지만
전쟁이 끝난 후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무영리는 비무장지대에 포함되어 버린다.
한편 서울에서 유학하던 중 어느 문학 동인에 소속되어 활동하던 박일국은 당시
판매금지됐던 시인의 시를 암송하고 다닌다는 이유로 사상범이 돼 구속되어버린다.
돌아가야 할 가족과 고향이 있기에 이어진 전향 권유에는 응하지 않는다.
50여 년의 세월을 감옥에서 보내고 비전향 장기수로 출옥한
그는 고향으로 돌아가길 원하지만….
이 작품의 한국사회 읽기도 비관적이다.
탈출을 꿈꾸지만 결국 실패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다만 미래형인 '지네와 지렁이'와 달리 이 작품은 과거와 현대의 거역할 수 없는
연결고리를 천착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 암울한 구조는 더욱 견고하다.
박수진은 새파란 신예다. '춘궁기' '용병' 등 두 작품이 공연됐는데
사회를 보는 눈이 '애 어른'의 그것처럼 수준이 높아
단연 극작계의 기대주로 꼽힌다. 박씨는
이 작품을 전작의 연장선에 있는 '현대사 읽기 완결 편'으로 정의했다.
두 전작에서 박씨는 전쟁과 이산(離散)의 아픔을 깊이 있게 묘사했다.
'영광의 탈출'의 주제는 통일. 6.25의 무풍지대였던 '무영리'라는 가상의 마을과
이곳 출신의 비전향 장기수 박일국을 통해 통일을 갈구하는 전후세대의 한 시각을 담았다.
지금까지 정부 주도의 통일 노력은 '쇼'라는 관점 위에
작가가 제시한 대안적 개념은 중립(中立)이다.
"나는 전쟁 경험도 없으며, 이산의 아픔을 간직한 친척도 없다. 그래서 분단과 통일은 나와 상관 없은 일로 여긴 적도 있었다. 그러나 어느 때부터인가 내 삶이 그런 문제와 결별한 채 살 수 없다는 자각이 들기 시작했다. 그 결과 우리 모두 '중립의 초례청'에서 다시 숙고해 보는 작업이 돼야 진정한 통일을 이룰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연극은 중립사상을 설파한 고 신동엽의 시 '술을 많이 마시고 잔 어젯밤은'에서 모티브를 얻었다.
<영광의 탈출>은 비무장지대에 자리한 무영리라는 마을을 배경으로, 박일국의 현재와 과거의 기억이 병행되어 분단 50여 년 역사를 풀어낸다. 원수지간의 집안에서 태어났기에 죽어버린 젊은 로미오와 줄리엣처럼 또는 탑이 완성될 때까지 남편을 만나서 못해 그리움으로 죽음에 이른 아사녀와 아사달처럼 무영리와 박일국을 서로를 애타게 부르지만 비껴간다. 그저 술을 마시고 잔 어젯밤에 꾼 우스운 꿈’ 이라고 노래하는 박일국은 모든 짓을 포용하는 아름다운 땅, 중립국을 기다린다. 죽지 않고 젊은 연인들이 만날 수 있는 공간, 잃어버린 아내와 가족들을 다시 찾을 수 있는 그 땅을 찾으려는 그의 기다림은 결국 말 못하는 아내의 수화처럼 침묵 속으로 시그러진다. 개인에 있어 지난 시대의 논리가 얼마나 큰 폭력이며 횡포인가를. ‘영광의 탈출’은 출구 없이 맴도는 한반도 분단의 아픔을 반어적으로 설명해준다.
”제 주제가 너무 진부한가요? 그러나 언젠가 누구라도 지나간 역사의 무게를 느낄 때가 있어요. 그때 그 충격은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나에게는 꽤나 큰 감정이었죠. 계속해서 눌려져 내려오는 무게감, 열등감일 수도 있는 어떤 것. 신문 사회면에 아주 작게 실려 전해진 타지에서의 죽음이나 제대로 말하지 못했던 사람들의 이야긴 제 화두의 중심입니다. "
서른을 갓 넘어선 박수진은 자신이 들어선 작가로의 길목을 되새긴다. 고등학교를 졸업할 즈음 그에게는 무언가를 목적으로 할 대상이 없었다. 그가 늦깎이 대학생으로 출발한 건 처음으로 자신 있게 선택한 일 나는 누구인가라는 묻는 낯선 시험문제는 그가 처음 만난 글쓰기의 하나였다 불량식품. 대량생산품 속에 박혀진 하나라고 답한 그가 자금은 자신만의 생각과 글을 통해 사람들에게 말을 건넨다.
'한국희곡'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임희재 '꽃잎을 먹고 사는 기관차' (1) | 2024.11.23 |
---|---|
이병복 '옷굿-살' (6) | 2024.11.21 |
김풍년 '그물' (1) | 2024.11.20 |
홍창수 '수릉' (2) | 2024.11.20 |
살롱 뮤지컬 '울고 있는 저 여자' (1) | 2024.11.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