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희곡

김은숙 '바이러스 10√2'

clint 2024. 11. 24. 09:12

 

 

 

1 = 알파벳 L. 0 = 알파벳 O. √ = 알파벳 V. 2 = 알파벳 E
결국 '바이러스 러브' 혹은 '러브 바이러스'가 되는 것이다. 
제목만을 들으면 발랄하고 행복한 두 연인이 나와 샤방샤방한 사랑 바이러스를 
여기저기 흩뿌리고 다니다가 행복에 겨워 오래오래 잘 살았습니다~ 라고 
생각이 될 터이지만. 주인공들의 이름조차 없는 이 극의 등장인물들은 다음과 같다.
음험한 사랑, 암울한 사랑, 치명적 사랑, 순결한 사랑, 중독된 사랑, 거짓된 사랑...

어느 '여가수'가 사랑으로 고통받는 자신의 삶을 한탄하듯 노래하며
연극이 시작한다. 연극이 보여주는 것은 사랑이란 이름아래 서로에게
생채기를 주는 집착과 시기와 질투들이다. 어느 바람둥이 남자에게 '백치같은
여성'은 몸을 빼앗기고 버림받는다. '여가수'는 알콜중독 아버지로부터 성적
학대를 당했던 기억 때문에 남성을 혐오하다가, 백치같은 여자와 동성애에
빠진다. 이 여가수를 스토커처럼 쫓아다니던 남성은 여가수의 외면에 분노해
마침내 사고를 저지른다….

 

 

 

 

 

이 극은 다양한 사랑 백태에 관한 이야기다.
그 사랑의 모습들이란 하나같이 굴곡지고, 갈라지고, 깨어진다.
알콜 중독에 집을 나가 버린 아내를 증오하며 어린 딸의 벗은 등에

나비 문신을 새기는 아버지 : 근친상간
어린 시절 아버지에게 당한 성폭행의 충격으로

동성만을 사랑하게 된 톱 여가수 : 동성애
외모에만 치중하며 여자들을 헌신짝 내 버리듯 갈아 치우는 남자 : 바람둥이
임신한 후 남자에게 버림받고 동성간 사랑에 기대며

혼자 아이를 키우리라 다짐하는 여자 : 미혼모
어린 시절 어머니의 학대에 대한 기억으로 스토킹 하던 가수를

납치, 끝내 살해해 버리는 남자 : 스토커
현실에서의 사랑을 믿지 않고 고전 속의 언어적 행태와

빠롤에만 집중하는 남자 : 사회 부적응자

 

 

 

 

사랑이란 무엇일까. 이 극은 사랑을 이야기하고 있다.

흔히 볼 수 있고 흔히 상상할 수 있는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옵니버스처럼 여러 이야기들은 분리되어 있지만 겹쳐지고 혼합된 형태를 띄고 있다.

1. 사랑에 대해 이야기하는 해설자.

2. 어릴 적 어머니의 애정결핍으로 사랑에 집착하는 팬.

3. 의붓아버지에게 성폭행을 당하여 모든 남자와 거리를 두고 있는 가수 세희.

4. 사랑은 섹스뿐이라고 생각하는 남자.

5. 남자에게 버림받고 세희와 사랑을 하고 싶은 순정적이었던 여자.

이 극은 사랑의 부정적인 면을 부각시킨다. 사랑의 어두운 부분을 강조한다.

극 마지막에 해설자는 다시 등장하여 이 모든 어둠 속에

그래도 우리는 사랑 때문에 살고 있는 것이고 또한 사랑은 아직도 우리에게

삶의 희망이요 빛이라고, 세상은 아직 사랑 때문에 살만한 곳이라고 역설한다.

 
 

 

 

 

이 작품은 '그리스 로마 신화'를 객석으로 불러들이다. 관객은 배우들을 통해 흔하고 지루할 일상 속에서 프로메테우스와 판도라를 만나고 파르테논 신전의 장난끼 많은 신(神)들을 만나게 된다. 이 작품의 출발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판도라의 상자' 이야기 이다. 하지만 이 작품의 작가는 그 신화를 새롭게 배열하고 있다. '판도라의 상자' 맨 밑바닥에 남겨진 것이 '희망'이 아니라 '사랑'이라는 흥미로운 관점에서 이 작품은 출발한다. 따라서 온갖 질병과 죄악이 든 상자의 밑 바닥에 들어있던 '사랑'이란 것은 신이 인간에게 준 가장 아름다운 선물이 아니라, 에이즈나 감 기처럼 치유 불가능의 질병이며 죄악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 것이다. '사랑'이란 이름으로 그럴듯하게 포장된 시기와 질투, 배신과 집착, 거짓말과 욕망 같은 비합 리적인 감정들을 이 작품은 아주 낮은 목소리로 날카롭게 해부한다. 작품 속의 등장인물들은 이름이 없다. 이름 대신 '치명적 사랑' '중독된 사람' '음험한 사람' 등으로 불린다. 그들은 세익스피어의 대사처럼 해, 달, 또는 별이라는 대자연의 법칙에 순종하는 힘없는 유기체이다. 따라서 그들이 앓고 있는 '사랑 바이러스'는 그들의 탓이 아니다. 등장인물들의 철저한 익명성은 그 인물들이 현재의 '나' 혹은 전생의 '나' 그도 아니면 내가 알고 있는 그 누구일지도 모른다는 암시성을 내포하고 있다. 이 작품을 관람하기 위해서는 많은 장애물을 통과해야만 한다. 관객과 배우사이에는 투명한 유리벽과 투명한 헌들로 막혀있다. 이 작품을 보는 관객들은 투명함이 주는 소통의 단절을 경험하게 된다. 사실 이 작품의 줄거리를 이야기 한다는 건 불필요하다. 암컷과 암컷사이의 무대에서는 '사랑'에 대한 이미지들이 모자이크처럼 나열된다. 모자이크란 것이 원래 가까이 들여다보면 전체를 볼 수 없듯, 이 작품 또한 막과 막 사이를 이해하는 것은 이 작품을 관람하는데 아무 의미가 없다. 하지만 마치 사고처럼 등장하는 세익스피어의 명대사들을 유의해서 들은 관객이라면 이 작품을 이해하는 패스워드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현재, 과학의 발전은 현대인들을 현실적인 공간보다 사이버 공간으로 불러 드렸고, 사이버 공간에서 만남을 갖고 대화를 나누는 현대인들의 '사랑'에 대한 개념 또한 많이 바뀌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작품은 현대인들의 새로운 사랑법을 제시한다. 

 

 

 

작가의 글 - 김은숙
난 늘..... 만삭이였다. 난 늘 불안하고 무서웠다. 언제 부턴가 내 몸 속에는 사생아가 자라고 있었다. 사랑을 속삭이던 이들은 내 안에 살고 있는 벌거벗은 한 아이를 발견하게 되면 서둘러 나를 떠났다. 그 아이가 어디로부터 내게 왔는지 나는 알지 못했다. 달도 없는 밤 끊임없이 중얼거린 내 기도를 따라 왔는지, 무더운 여름 어느 날, 아주 잠깐의 혼몽 속을 걸어 내게 왔는지... 어쩌면 나는 태어나기도 전에 이미 그 아이를 잉태하고 있 었는지도 모른다. 불행하게도 그 아인 정맹과니에, 벙어리였고, 귀먹어리였다. 무서운 일이었 다. 듣지도 보지도 못하는 그 벌거벗은 아이는 세상으로 나오고 싶어 저 혼자 몸을 키웠다. 깊이 잠든 밤이면 나 몰래 탄생을 준비하는 아이의 심장 소리가 쿵쿵 내 속을 걸어 다녔다. 난 두려웠다. 아이를 조롱하는 무수한 눈동자와 손가락들을 어찌 감당할 수 있을까. 밤마다 무서운 진동이 거듭 되었지만난 그 아이가 어둡고 안락한 내 속에서 영원히 살기를 바랬다. 몇번의 밤과 몇번의 낮이 교차 했는지 나는 알지 못했다. 긴 잠에서 깨어났을 때, 내 옆에 누워 있던 작고, 따뜻하고, 말캉한 것도 지금 막 잠에서 깨어나고 있었다. 
내게 이 작품은 그런 아이다. 듣지도 보지도 못하면서 빛과 소리에 대한 희망으로 심장만 커다란 기형이다. 하지만 아이의 심장 소리를 듣는 밤은 아직도 황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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