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민왕은 고려시대의 왕들 중에서 개혁정치를 추구하여
쓰러져가는 나라를 일으켜 세운 왕이다.
전기의 공민왕은 막강한 대국이었던 원나라에 볼모로 잡혀가
10여년의 원나라 궁정생활을 하고 돌아와
여러 차례 개혁정책을 통해 나라의 기강과 질서를 잡는다.
그러나 원나라의 종속에서의 해방과 사회 전반의 과감한 개혁을 추구했던 공민왕은
이미 즉위 초부터 자신이 내세운 개혁을 추구하기엔 모순된 정치구조를 지닐 수밖에.
그것은 그의 신료들이 개혁 세력만으로 구성된 것이 아니라
원나라 때부터 그를 보좌하며 그가 왕으로 즉위하는데 도움을 주었던 친원 세력도
중심세력으로 함께 있어서 개혁과 보수, 안정과 변화라는 상반된 양면적 속성을
지닐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이렇듯이 공민왕은 개혁정책이 답보 상태에 빠지게 되고 방탕한 생활을 하면서
현실정치를 포기하고 신하들을 불신하게 된다.
죽음의 공간이며 동시에 삶의 공간인 "수릉"은 죽기 전에 미리 지어놓은 임시 가묘라는
뜻으로 공민왕의 자포자기적 삶을 상징적으로 함축하여 나타내 보여주고 있다.
<수릉>은 원나라의 간섭과 통치 속에서 위태롭게 주권을 지켜가던 고려 말의 혼란을 그 배경으로 삼고 있다. 수릉에 방어진을 구축하고 관 속에 자신의 쉼터를 마련하는 공민왕은, 격변의 한 가운데, 욕망의 질풍노도 한 기운데 외롭게 스스로를 세우고자 하는 문제적 인간이다. 극의 첫 장면을 묘사한 위 지문은 <수릉>의 갈등상황과 주제를 인상적으로 응축시켜놓는다. 임금이 생전에 미리 지어놓은 무덤인 수릉(壽陵). 공민왕은 생전에 미리 무덤을 만들고, 그 수릉 안에서 자신의 위태로운 왕위를 지키기 위한 권력놀이를 이끌어간다. 12세에 원나라 수도 연경에 인질로 머물렀던 공민왕은 형과 조카들의 재위기간이 짧게 끝나자 22세의 나이에 어렵게 즉위했다. 원나라가 기우는 틈을 타 친원세력을 물리치고 간접통치에서 벗어났지만, 곧 이어 홍건적의 침입과 숙부 덕흥군의 침략을 받아 만신창이가 될 만큼 불우했다. 반역의 기운을 물리치는 극약처방은, 권력욕의 사슬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공민왕 스스로 무덤에 묻힌 존재가 되는 것이다. 수릉은 무덤이지만, 공민왕은 첨의 신돈으로 하여금 섭정케 하고 무덤 안에 칩거한 채 비로소 살 수 있는 것이다. 극은 권력을 향한 의지가 전개되는 양상을 공민왕과 신돈을 통해 동시에 구축해간다, 권문세족들의 반란 조짐에 공민왕은 ‘왼팔을 심하게 떨며’ 자제위와 내비들의 음란한 성행위를 재촉하고, 신돈은 ‘추위를 타는 듯 온몸을 떨며’ 아현의 몸속으로 파고든다. 자제위 홍륜으로 하여금 익비를 간음케 하여 세자를 얻으려 하는 공민왕의 행동이나, 김란의 딸 아현을 통해 대권의 후계자 출산을 도모하는 신돈의 야욕은 모두 치명적으로 불안하다. 내비1이 아현과 익비의 역을 겸하는 극적 장치나, 자제위들과 내비들이 극중극으로 꾸미는 놀이들은, 이 거짓과 계략으로 아수라장이 된 정세를 드러낸다. 공민왕과 신돈의 오월동주도 오래가지는 않는다. 수릉에서 공민왕과 신돈이 상희 곧 장기를 두는 장면은 서로를 견제하다 칼날을 들어대는 권력 다툼의 결전장을 간명하게 표현한다. 공민왕과 신돈은 불안 속에서 서로를 의심하게 되고, 신돈은 역모를 꾀하다 오히려 공민왕에 의해 처벌당한다. 또한 오래지 않아 공민왕 자신도 자제위 홍륜에 의해 시해 당하니 권력욕 앞에서 안전한 평화란 영원히 불기능인 셈이다.
역사와 야사를 조리 있게 응축해놓은 이러한 사건 전개 속에서, 작가가 촛점화하는 것은 폭력적인 욕망이 잦아드는 상태를 갈망하는 공민왕의 내면이다. 노국공주의 환영에 시달리며, 잃어버린 자식을 대신하는 목각인형을 만지며, 관 속의 평화를 꿈꾸는 공민왕의 소슬한 내면. 이러한 극의 초점을 살리기 위해 작가는 수릉을 주요 공간으로 설정하고, 수릉의 12지신상이 공민왕 주변의 정치세력들을, 수릉에 놓인 관이 권력에의 야망과 환멸을 동시에 지닌 공민왕의 내면을 상징케 한다. 공민왕은으 수릉에 스스로를 유폐시키는 연극을 함으로써 살육과 야만의 아수라장에서 자신을 지키는 한편, 잃어버린 사랑, 되찾을 수 없는 평정을 꿈꾸는 것이다.
이 극은 연출의 무대 표현에 따라 공민왕을 주인공으로 하는 사실주의적 스타일의 연극이 될 수도 있고, 수릉이라는 공간의 상징성을 곧추세우는 시청각적 이미지의 조율에 의해 중층적 의미망을 구축해갈 수도 있다. 수릉의 12지신상이 왕 주변의 정치세력이나 자객이 되었다가 천천히 뒤로 사라지며 다시 동상으로 변하는 장면, 죽은 노국공주의 환영이 등장해 공민왕과 대화하는 식의 설정을 통해, 이 극은 현실과 환상, 생과 사의 경계 지점에서 아스라히 멀어지는 평화로운 공존의 보잘 것없는 가능성을 끝내 붙잡고자 한다.
홍창수 작가의 글 - 공민왕에게
그대를 만나 수릉에서 지난겨울을 보냈소. 그대가 묻혀 있는 능은 그대가 죽은 후 ‘현릉’ 이라 이름 붙여졌으나, 나는 ‘현릉’이라는 명칭보다 ‘수릉’이라는 명칭이 그대에게 적합하다고 생각하오. ‘수릉’은 임금이 죽기 전에 미리 준비해두는 무덤을 뜻하여 어느 특정한 왕릉의 고유명사가 될 수 없지만, 그대를 떠올릴 때마다 ‘수릉’의 이미지가 겹쳐지는 걸 어쩔 수 없소. <고려사>를 읽어가다가, 그대의 명령으로 자신의 무덤을 짓게 했다는 대목을 접하면서 잠시 상념에 잠겼소. 무엇이 한 나라의 왕으로 하여금 자신의 무덤을 짓게 만들었던가. 기울어가는 고려의 국운을 회복하려고 즉위 초부터 원대한 포부로 개혁 정책을 시행했던 젊은 개혁가에게 도저히 헤어나려 해도 헤어날 수 없는 죽음의 그림자를 드리우게 한 것은 무엇인가. 그 모든 불행의 씨앗이 원나라가 고려를 간섭하고 있었다는 시대적 모멸과 국내 정치의 부패와 함께 이 경국의 상황에 대처하는 그대의 명민한 성격에 잠재되어 있는 것을 보았소. 그대의 반원적 성향은 이미 그대의 형인 충혜왕이 원에 의해 유배당하다가 죽는 사건을 목격한 데서 비롯되었소. 따라서 그대의 총명함과 반원적 성향은 원나라가 충분히 경계할 만한 것이었고, 왕위경쟁에서 두 차례나 그대를 패하게 했을 요인이오. 그대는 원나라에서 그대를 왕위에 앉히지 않으려는 강대국의 일방적인 외교정치를 보았고, 그대가 왕위에 오르는 것을 싫어하는 국내 정치 세력의 음모를 간파했고, 원나라에 간섭받아야 하는 고려의 무기력한 운명에 안타까워했소. 그대가 왕위에 오르자 젊은 혈기로 즉각 펼쳤던 반원 정책의 천명은 그대가 원나라 시절에 정치현실의 살벌한 생존법칙을 직접 체험하면서 가슴 속에 품어왔던 대야망의 일단이었소. 그만큼 그대는 젊은이다운 패기와 노회한 정치 감각을 갖추었소. 그러나 개혁의 의지는 친원 세력들의 등등한 기세와, 보수적인 권문세족들에 의해 꺾이었소. 고려를 간섭하던 원나라가 기울어간다고는 하나, 그 황혼 빛은 여전히 강렬하였고, 그대는 일등공신들의 모반에 충격을 받아 신하들에 대한 불신의 성벽을 높이 쌓고 말았소. 그대에게 남은 것이란 왕권을 지속시킬 명민한 정치 감각뿐이었소. 그리하여 그대의 개혁 정책은 어느 새 왕권 유지 및 강화라는 또 수레바퀴와 함께 굴러가고 있었소. 환락에 탐닉했던 충숙왕과 충혜왕을 닮지 않겠다던, 즉위 초의 의지는 온 데 간 데 없고 측근들의 세력 증대에 불안을 느끼어 그들의 기세를 꺾었소. 신하들은 점차 그대에게서 등을 돌리고, 그대의 성(城)이나 다름없었던 노국대장공주마저 세상을 떠났을 때, 그대가 집착했던 권력은 내부에서부터 무참히 무너져가고 있었소. 궁여지책으로 신돈을 내세워 섭정을 하게 했으나, 이미 그 계략속에는 신돈의 종말이 예정되어 있었을 것이고, 무소불위의 권력으로 인해 타락해가는 신돈의 모습 속에서 그대의 모습을 생생히 보았을 것이오. 태조 왕건을 숭앙하며 신료들에게 <서경>의 ‘무일’편을 읽게까지 했던 그대의 근면한 정신은 절망의 체념과 환락의 도피, 그리고 비관적인 죽음에게 자리를 내주며 선대왕들이 빠져들었던 늪으로 가라앉았소. 수릉. 그대가 왕으로서 죽음을 예비했던 절망의 공간은 이제 새로운 생성의 의미로 극적인 전환을 이루어야 한다고 생각하오. 임금에게만 부여하는 가묘가 어=니라, 절망과 체념, 그리고 도피와 죽음의 장소가 아니라, 오늘을 사는 우리들의 삶에 대해 근본적인 성찰을 던져주는 내면의 공간이 되어야 할 것이오. 이런 점에서 수릉은 삶과 죽음, 과거와 현재, 현실과 환상의 마지막 팽만한 긴장이고 경계이며, 죽음을 위한 삶의 종점이면서 삶을 위한 죽음의 새로운 출발점이오. 나날을 살아가는 것은 나날이 죽어가는 것. 탐욕과 위선과 거짓과 이기로 가득 찬 위정자들이 자신의 내면에 죽음을 예비할 수릉을 짓고 산다면, 일용할 양식을 소화시켜 생명을 유지시키는 위처럼 간직하고 있다면, 그래서 나날의 삶이 진정으로 매순간 죽음을 맞이하며 살아간다면, 정직한 노동과 정치한 욕망을 가진 자들이 진정으로 일상의 생활을 기쁘게, 새롭게, 그리고 가슴 벅차게 살아가는 세상이 조금씩 열릴 것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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