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희곡

장진 '택시 드리벌'

clint 2024. 11. 9. 07:51

 

 

거대한 도시 속에서 개인 택시를 몰며 사는 서른 아홉의 노총각 장덕배.

그는 컵라면을 살까, 봉지라면을 살까로 고민하는,

자물쇠를 위부터 열까, 아래부터 열까로 고민하는 소심한 남자이다.

새벽부터 속을 빡빡 긁어대는 동네 아줌마, 바쁜 출근 시간 떼거리로 올라타

택시 안을 점거해 버리곤 "공항"을 외쳐대며 나몰라라 쉴새없이 지껄여대는 여자 아이들,

목이 제대로 붙어있는 지도 모를 정도로 잔뜩 쫄게 만드는 깡패들,

술에 절어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밤손님들 속에서 짜증마저 내성이 되어버린 채

하루하루에 지쳐 꿈을 잃고 사는 소시민인 것이다. 

그런 그가 어느 날 몽상에 빠진다. 누군지 모를 아가씨가 두고 내린 핸드백을 놓고

그녀와 사랑에 빠지는 달콤한 꿈을 꾸는 것이다.

그 상상은 회상과 맞물리며 뭉게뭉게 커져간다.

꿈도 낭만도 잊어버린 그에게도 자신을 환멸스럽고 지리멸렬한 일상에서 탈출케 하는

유일한 뭔가가 남아있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그가 꿈꾸는 사랑은 자신의 가슴에 남은 과거의 잔재이다.

''화이'', 가슴아픈 첫사랑의 환영.

덕배는 그녀와 꿈이라는 사랑의 방식으로 재회한다.

"나도 낭만알아."라고 외치며 풀어내는 묵을 대로 묵은 과거의 앙금에 가슴이 서걱거린다.

한낮의 태양이 쪼개져 쏟아져 내리는 것 마냥.....

비록 덕배의 몽상은 순식간에 덕배를 자멸감에 빠뜨리며 허망하게 끝이 나지만

주저앉은 덕배에게 ''화이''가 따스한 미소를 건넨다.

 

초연시 배역: 엄정화(화이) 최민식(덕배)

 

 

하루에도 수십 명씩 각양각색의 손님들을 싣고 도시 구석구석 비좁은 틈을

누비고 다니는 것이 바로 택시 기사이다. 별별 세상사며 인생사를 싣고 달리는 그들이야말로

세상 돌아가는 것에 가장 빠삭할 사람들이다.

하지만 그들에게 택시는 비좁은 생계의 공간일 뿐이다.

그들은 낯선 손님들이 끊임없이 토해내는 감정과 생각 속에서

허우적거리며 버둥대고 있는 것이다.

모두 그가 감당해야만 할 현실적인 존재들이기에.....

 

 

 

<택시 드리벌>은 꿈을 꾸는 것 자체가 무모한, 모험과 같은, 바보가 될 지 모르는 세계와

그 속에서 황폐화되어가는 인간의 모습을 풍자하고 있지만

그 은유에는 따스한 웃음의 시선이 베어있다.

그의 작품에 늘 등장하는 ''화이''로 상징되는 희망을 믿기 때문에...

확실히 장진은 관객의 욕구를 잘 아는 작가임에 틀림없다.

긴장감과 호기심이라는 두 줄을 놓았다 줬다 하며 전개되는 극적구성과,

기막힌 언어유희, 기발한 무대 소품, 신속한 전개에 실려오는 재미와 웃음으로

자연스럽게 관객의 박수와 환호성, 휘파람까지 유도하니 말이다. 

 

작가 겸 연출 장진은 이 희곡을 썼을 당시

"우리가 살고 있는 도시는 다시 우리를 만든다.

도시의 밑바닥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꿈을 통해 도시와 인간을 그리고 싶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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