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초혼 2017은 위안부 할머니가 가족 앞에서 지난 기억으로 고통스러워하다
마침내 숨을 거두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가족들과 죽은 본인의 ‘아이고’ 곡소리가 점점 합쳐져 음악이 되고 합주곡이 된다.
등장인물들이 모두 흰 상복으로 갈아입고 망자의 혼을 부르는 제의가 시작된다.
작품에 흐르는 음악은 특별한 반주 없이 배우의 소리 ‘아이고’가 아카펠라 형식으로
주로 흐르지만 전통곡조, 이중창, 사중창을 비롯해 복잡다단한 자연화성을 선보인다.
중간의 불협화음 끝에는 혼을 달래는 대표 장례곡조인 ‘어훠어, 어훠어’로
이어지는 상여소리를 연출한다.
무대는 광목 7쪽을 내려트린 가운데 광목 위에 위안부할머니들의
생전 인터뷰 영상, 수백 개의 위패 등이 펼쳐진다.

안민수 작, 김지욱 연출의 <초혼(招魂)>은 특별한 연극이다. 무엇보다도 배우들이 구사하는 대사가 거의 “아이고”뿐이다. “아이고”는 장례 때 하는 곡(哭)소리로 가족을 잃은 이들의 슬픔을 하나로 집약한 추상(抽象)의 전형이다. 이렇게 응축된 표현을 갖고 80여분을 이끌어가는 작품이 바로 <초혼>이다.
초혼(招魂)은 “사람이 죽었을 때에, 그 혼을 소리쳐 부르는 일”이다. “죽은 사람이 생시에 입던 윗옷을 갖고 지붕에 올라서거나 마당에 서서, 왼손으로는 옷깃을 잡고 오른손으로는 옷의 허리 부분을 잡은 뒤 북쪽을 향하여 ‘아무 동네 아무개 복(復)’이라고 세 번 부름”으로써 죽은 사람을 소생시키려고 시도하는 이 절차가 끝나야 비로소 죽음이 공식화된다.
원래 1980년 <동랑레포토리극단>이 공연했던 <초혼>의 대본은 그냥 “노인”을 초혼의 대상으로 하고 있다. 그러나 2016년 김지욱이 연출한 <초혼>에서는 초혼의 대상이 어떤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이다. 아마도 이 시대 가장 위로받아야 할 대상으로 그분들을 생각한 결과일 것이다. 사실 아직 생존해 계신 분들도 제대로 된 사과도 위로도 못 받은 채 계속 마음의 상처만 커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새라새 극장은 돌출무대이다. 돌출무대는 무대와 객석이 대립형이 아니라 무대를 객석이 감싸고 있는 모습이다. 결국 무대 위의 장례 의식은 배우와 관객이 함께 치르는 셈이 된다. 그래선지 극 중간 쯤 관객 일부를 무대에 올려 죽은 이에게 예를 표하도록 권하기도 한다. 아마 김지욱 연출은 극장을 선택할 때부터 이런 점을 고려했을 것이다. 무대는 철저히 절제되어 있다. 눈에 들어오는 건 거대한 장방형 천 7개를 천정부터 바닥까지 늘어뜨려 놓은 것뿐이다. 그것은 때로 위안소가 되기도 하고 죽은 이의 혼을 부르는 지붕이 되기도 하며, 또 때로 죽은 이를 모시는 상여가 되기도 하고, 위안부 할머니들의 영정과 위폐를 투사하는 막이 되기도 한다. 그렇게 거의 빈 무대를 배우들의 소리와 동작만으로 너끈히 채우고 있는 것이다. 단 3음절의 대사 “아이고”로 과연 연극이 성립할 수 있을까? 확인 결과 그것은 가능했다. 원래 아주 작은 것에도 집중하고 집중하면 그것이 어느새 거대한 우주로 확산되는 법이다. 꼭 나노(nano)예술까지 안 가더라도 우리 일상에서도 그런 경험은 얼마든지 해볼 수 있다. 아마 길 옆에 우연히 난 잡초 한 줄기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난생 처음 보는 오묘한 모습을 발견하고 감탄하게 될 것이다.
관객들은 더 이상 복잡한 의미 해석에 매달리지 않아도 된다. 배우들로부터 출발하는 슬픔을 받아 같이 공감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말을 절제하고 절제하면 시가 되고 노래가 된다. 슬픔이 응축된 표현 “아이고”는 바로 시와 노래가 되고 슬픔을 표출하는 몸짓은 바로 무용이 된다. 그래서 결국 일상의 말보다 수백수천만 배 강렬하고 밀도 높은 슬픔의 블랙홀이 된다.
“아이고”가 어찌 죽은 이들만 위로하겠는가? 망자를 애도하며 산 자들은 슬픔을 토해 놓는다. 그렇게 위로받은 망자의 혼은 편하게 이승을 떠난다 한다. 하지만 어찌 보면 장례란 죽은 이보다 산 자들을 위한 절차일 수도 있다. 짙은 슬픔을 토하고 나면 정화가 찾아오기 때문이다. 아마도 이런 점에서도 죽음과 연극은 통하는 것 같다.
공연단체의 이름이 ‘삼류극단’이다. 영문명을 보니 ‘The Creative Minority’이다. ‘창조적 소수’ 쯤으로 번역되는 그 말에는 역시 겸손함과 절제가 담겨 있다. 특히 우리말 ‘삼류’는 더욱 그렇다. 스스로 ‘삼류’를 칭하는 사람들이 모여 오로지 “아이고”만 외치는 연극을 만들었다. 아주 작고 세밀한 부분에 천착하는 작품을 올렸다. 참으로 어울리는 일이라 생각된다.

<초혼(招魂)>은 '동랑레퍼터리' 극단에 의해 1980년 10월 28일부터 10일간 서울 남산 '드라마센타'에서 초연(初演) 되었다. 이 작품 작가인 안민수에 의해 연출되었으며, 무대장치에 양정현, 의상에 김현숙, 조명에 이상봉이 맡았다.
김 교수는 이번 작품은 “현재 우리나라에서의 주류 뮤지컬과는 조금 다르지만 음향과 음악으로 대사를 대신 전달한다는 점에서 음악극, 뮤지컬이다”며 “장례의식이 주로 등장하지만 예술작품인 만큼 고증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의식 중 주된 장면만을 뽑아 구성하는 ‘해체’ 기법으로 표현했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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