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희곡

셰익스피어 김동현 재구성 '맥베드, The Show'

clint 2024. 10. 15. 11:13

 

 

스코틀랜드의 장군 맥베드는 전쟁터에서 돌아오는 길에 황야에서 
세 마녀를 만난다. 세 마녀는 맥베드에게 장 차왕이 될 것이라는 예언하고 
이에 맥베드는 스스로 깨닫지 못하고 있던 야심의 포로가 되고, 
아내의 부추김 까지 가세해 마침내 덩컨왕을 살해하게 된다. 
이어 왕위 유지에의 욕망으로 살인을 거듭하게 된다.
용감하고 충성심 많았던 장군 맥베드는 잔인하고 나약한 인간으로 전락해 
버리게 되고 결국 마녀들의 예언에 얽매이는 폭군이 되어버리지만
마음은 이미 약해질대로 약해져 삶의 의지를 잃어버리게 된다.
한편 맥베드를 부추겨 왕권을 빼앗게 한 레이디 맥베드 역시 죄책감에 
시달린 나머지 실성한 채 스스로 목숨을 끊는 등 
맥베드 부부는 파멸의 길을 걷게 된다.
마침내 이 독재자에게 반항한 많은 신하들이 덩컨왕의 아들인 맬컴을 
주축으로 맥베드를 공격하게 된다. 
버남 숲이 움직이지 않는 한 더욱이 여자의 몸에서 태어난 자에게는 
결코 쓰러지지 않는다던 마녀의 예언만을 믿고 있던 맥베드는 나뭇가지를 
몸에 꽂아 숲으로 위장한 맥더프 일행에 의해 마침내 목숨을 잃고 
맬컴은 아버지의 왕권을 다시 찾게 된다.



맥베드는 1605년 또는 1606년에 쓰여져 1606년 8월에 제임스 1세와 영국을 방문 중인 덴마크의 왕 앞에서 공연되었다고 전해진다. 실제로 궁전에서 공연되었는지 아니면 다른 그의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글로브극장(The Globe Theater)에서 공연되었는지는 모르지만, 셰익스피어 극단의 적극적인 후원자 인 제임스 1세를 상당히 배려했음이 희곡 곳곳에서 드러난다. 그 대표적인 예로 뱅코우라는 캐릭터를 들 수 있다. 존 레슬리(John Leslie)가 출판한 <스코틀랜드의 기원, 죽음 및 복된 일들>이란 책(1578)에 따르면 제임스 1세의 조상인 스튜어트 왕가는 뱅코우로 거슬러 올라간다. 셰익스피어는 그의 희곡 곳곳에서 뱅코우를 상당히 우호적인 필치로 그려내고 있다. 또한 던컨 왕의 적수가 역사에서는 덴마크의 왕이지만 그의 희곡에서는 노르웨이 왕으 로 바뀐 것도 특기할 만한 것으로, 당시의 공연 상황을 반영한 것임을 추측할 수 있다.

 

원작 공연사진

 


희곡 <맥베드>는 홀린세드(Raphael Holinshed)의 역사서인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아일랜드 연대기> (1587)를 참고로 해서 창작되었다. 하지만 <맥베드>가 역사극이 아닌 비극으로 분류되는 이유로는 여러 가지를 들 수 있다. 먼저 역사적인 사실 외에 많은 픽션이 가미되어 씌어졌다는 것이다. 홀린세드의 저서에 의하면 맥베드는 독재적인 군주로서 던컨왕을 살해한 후 꽤 오랫동안 훌륭하게 스코틀랜드를 통치했었고 반면에 던컨왕은 젊고 유약한 왕이었고 통치자로서의 오점이 많았다고 한다. 하지만 셰익스피어는 그의 주제에 맞게 인물의 성격을 다시 재창조하였다. 다른 이유로는 셰익스피어가 역사적인 사실을 넘어서 왕권을 탈취한 한 인물의 심리 변화를 구체적으로 다룸으로써 주제를 보편적으로 확장시켰다는 것이다. <맥베드>에서 셰익스피어는 부인을 제외한 살인의 공범자를 모두 빼버림으로써 주인공이 갖는 욕망과 죄의식을 강조하였다. 이를 통해 단순한 역사극이 아닌 욕망과 죄의식에 관한 강하고 치밀한 성격비극을 만들어 내었다.

 



이야기를 재구성하며 - 김동현/ 재구성및 연출
이 작품을 처음 해야겠다고 마음먹었을 때, 고전의 재현이나 현대화, 실험적인 거창한 모험을 하기보다는 제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그릇, 즉 구조에 이야기를 담아내는 방법을 모색하는 쪽으로 접근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 보니 지속적으로 제가 관심을 갖고 있었던 소리나 형식을 이용한 구조들을 보다 중점적으로 생각하게 됐다. 맥베드와 맥베드 부인을 주축으로 그 외의 인물들은 최대한 줄이고 잔 플롯을 버리되 원작이 갖는 드라마의 뼈대는 그대로 둔다는 구조로 재구성하였다. 맥베드는 드라마의 선이 굵으면서 전개과정이 복합적이지 않고 매우 단순하다. 나에게는 이 점이 주화자인 맥베드를 포함한 인물들의 목소리에 집중할 수 있다는 장점으로 보였다. 세익스피어의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극히 초월적이고 우주적인 인물들이고. 즉 그들이 토해내는 독백이나 방백들을 통해 한 사람이면서도 다자이고, 다자이면서도 한 사람이 될 수 있는 소리의 다층적 구조의 가능성에 생각이 머물었다. 맥베드를 둘러싼 주된 인물은 레이디 맥베스와 덩컨, 뱅코우이다. 덩컨은 맬컴으로 뱅코우는 맥더프가 되어 맥베드에 의해서 죽임을 받은 자는 맥베드를 다시 죽이는 자가 되어 되돌아옵니다. 죽으면 영원히 사라지는 인물이 아닌 반사되어 다시 돌아오는 사람들로 중심축을 만들었고, 또한 맥베드는 끝까지 무대에 남아 파멸을 맞지만 맥베드 부인은 실패로 인해 사라진다. 끝까지 공간에 남아서 파멸되는 자와 떠나는 자의 대비라고 할까. 
 나는 유년시절 다리가 불편했었다. 소위 후천성 소아마비라는 것인데 뼈가 굳어지면서 다행히 정상적인 걸음걸이를 회복했지만 내 콤플렉스의 팔할은 거기서 비롯되었다. 콤플렉스는 묘한 상상력을 자극한다. 증오보다 수가 높고 오묘하며 그로테스크한 상상력 말이다. 콤플렉스가 자극한 연상과 공 상에서 난 참으로 많은 사람을 죽이고 살렸었다. 그때 마음은 무슨 무기든 다 빚어내는 마술이었다. 난 손오공의 분신술로 수십이 되었다가 하나도 뭣도 아닌 괴상한 반쪽으로 변신했었다. 이상한 마당에서 안개에 젖어 있는 나를 비추기 위해 내가 번개불을 때리고 검은 빛을 발하고 있는 나를 또 다른 내가 보고 있기도 했다. 시간이 지나고 깨달았다. 그 상상들은 현실을 모면하거나 통과하기 위한 내 놀이였음을. 본인이 하는 작품에 대해서 글로 개념으로 설명하는 일이 점점 어렵게 느껴진다. 설명하는 순간 내 생각과는 한 치든 열 치든 멀어지는 경험을 많이 했다. 이 작품도 마찬가지인데 그래도 무엇인가 꼭 얘기해야 한다면 난 셰익스피어의 인물들이 가지고 있는 상상력에 대해서 얘기할 수밖에 없다. 욕망이 없는 자 누구인가? 스스로도 두려운 꿈을 안가져본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그것들과 현실과의 막막한 거리 때문에 절망할 수밖에 없는 우리들의 삶이 아니던가? 결핍된 무엇을 갈구하는 인간의 삶은 모두 잔 혹하다. 어떻게 감각이 갈구하는 것과 실재하는 현실 사이에 떡 버티고 있는 보이지 않는 벽을 뚫고 길 하나를 낼 수 있는가? 어떻게 그 벽을 통과할 수 있는가? 처음엔 그 벽을 맨주먹으로 쾅쾅 쳐대고 두드려 보겠지! 깊고 깊은 지하 감옥의 죄수처럼. 그러 다 절망의 메아리가 만들어 낸 공기의 떨림을 섬세하게 낚아챌 수 있을 때쯤, 슬픔과 절망을 뾰족하게 갈아 벽을 파내기 시작할 것이다. 천천히, 끈기를 가지고. 그런데 그런 순간 셰익스피어의 인물들은 단번에 치열한 자기 쪼개기를 시작한다. 형태 없는 신 체를 만들어 그 벽을 통과하는 것이다. 상상으로 충만한 신체는 현실적 살덩이로서의 조건을 훌쩍 뛰어넘는다. <맥베드>를 처음 제대로 읽은 날, 그 자기 쪼개기의 진수를 보았다. 욕망의 회오리 속에서 몸부림치는 맥베드는 결코 파멸이나 자기말살의 길을 걷는 것이 아니리라. 그는 수없이 가면을 바꿔 쓰면서 현실을 지탱하는 원맨쑈의 주인공이다. 그 지속은 치열 하고 순수하다. 그 순수의 마당에서 그의 모든 사유는 몸밖으로 빠져나와 날뛴다. 그러므로 맥베드는 보이지 않는 자신의 심리적 움직임을 느끼는 것이 아니다. 그는 그를 듣고 보는 것이다. 자신이 자신을 보고 듣는다는 것. 모든 원맨쑈가 그러하듯 형식이 탄생하는 것이다. 맥베드는 피로 피를 씻으려 하고 연민을 또 다른 연민으로 무찌르려 하며 불안을 불안으로 잠재우려 날뛴다. 상상이 모두 게워지면 그는 보게 되리라. 빈 껍질같은 육체를 쑈가 끝날 때, 광대는 이렇게 말한다. 
  "산다는 것은 걷고 있는 그림자 같은 꼴, 짧은 시간을 무대에서 잘난 척 떠들다가 한번 퇴장하면 다시 나오지 못하는 불쌍한 배우 같은 것.... 인생이란 바보가 지껄이는 이야기. 시끄럽고 소란스럽기만 한 광란의 소리에 불과할 뿐." 

 

김동현/ 재구성및 연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