랑은 오늘로 열다섯 살이 되었다.
‘라이제노카 소속 직원들과 그 가족만 거주할 수 있는
핵심인류 잔존구역’인 A구역에서 자신을 ‘엄마’ 대신 중립적인 이름으로
불러 달라고 말하는 ‘생물학적 엄마’ 미무와 살고 있다.
랑은 인간의 도시를 돔으로 구획하여 보호하는 초인공지능 라이카
덕분에 지극히 안온한 삶을 살아간다.
라이카는 책을 들려주고, 사용자의 실시간 신체 상태를 모니터링하며,
통증을 제어하여 고통을 느끼지 않을 수 있도록 돕고,
모든 면에서 완벽한 식사 키트를 제공한다.
오류를 최소화하고 우연을 통제한다.
랑은 바로 이 라이카가 키운 아이로 오후에 라이카와의 커넥팅 시술만
받고 나면 ‘두 글자 이름’을 갖는 ‘생산가능인구’가 된다. 라이카를 위한
활동을 시작해 A구역에 기여하는 쓸모 있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그런 랑이 정체불명의 ‘식별 불가능 개체’ 노인 ‘페’를 만나면서
전혀 예측하지 못한 이야기가 펼쳐진다.
멸망한 세상, 돔으로 덮인 도시. 초인공지능의 보호를 받으며 각자의 세계에만 몰입한 채 살아가는 소수의 인간들. 어느 날, 효율로 무장한 도시에 ‘식별 불가능 개체’가 침입하면서 누구도 예상치 못한 모험이 시작된다. 돔 안에서 시작된 여정은 견고한 도시에 균열을 만들며 질문한다. 인간이 꿈꾸는 ‘완벽한 세계’는 실존하는가? 무대 위 펼쳐진 모험이 막을 내리고, 모든 질문이 잦아들 때 인간과 비인간, 그 ‘모든’ 것을 뒤덮을 찬란한 디스토피아가 당신의 세계로 쏟아진다! 약 1년의 개발 과정을 거치며 그로테스크하면서도 서정적인 SF 세계관을 탄탄히 구축해 온 작가 신효진. 왕성한 작품 활동으로 무르익은 연출력을 보여주며 관객과 평단의 사랑을 한 몸에 받는 연출가 김 정. SF 장르에 천착하며 완성도 높은 서사를 탄생시킨 작가와 도전적이고 감각적인 연출력을 인정받은 연출가가 최첨단 무대 효과와 영상 등의 과학기술 대신, 연극 본연의 상징성과 문법으로 빚어낸 밀도 높은 SF 연극으로 펼쳐진다.
신효진 작가는 생성형 AI, 비인간, 머신러닝 알고리즘 등에 대한 심도 있는 탐구를 바탕으로 <모든>을 완성했다. 작가는 인간의 활동으로 생태계의 파괴와 멸종을 앞둔 시대, 초인공지능(AI)과 인간의 삶이 완전히 결합된 세계를 통해 진정한 의미의 인간성, 종(種) 간의 연결성에 대한 본질적인 질문을 던진다.『모든』은 신효진 작가가 구축해 온 그로테스크적 SF 세계관의 일부를 보여 준다. 작품은 디스토피아적 근미래를 배경으로 인간 지성의 집대성인 AI가 전 가정에 보급된 세계에서 인간과 비인간의 공존 방향에 관하여 이야기한다. 인간의 활동으로 생태계의 파괴와 멸종을 앞둔 시대에 초인공지능(AI)과 인간의 삶이 완전히 결합된 세계를 통해 진정한 의미의 인간성, 종(種) 간의 연결성에 대한 본질적인 질문을 던진다. 이 작품의 말미에 순결한 몸, 멸균된 세계란 환영일 뿐임을 환기한다. ‘독립적인 개체’라는 생각은 인간이 가졌던 나르시시즘적 착각이자, 인간이 인간뿐 아니라 지구의 모든 공동거주자의 생을 위협하는 방향으로 써내려온 근대적 세계관의 근원적 오류라는 동시대의 통찰을 구체적으로 감각하도록 이끈다. 오염이 협력의 다른 이름이라는 놀라운 통찰. 모든 것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마치 버섯의 균사처럼 촘촘하고 얇은 그물망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따라서 연결 안에서 변형되는 것이 유일한 생존의 길이다. 기꺼이 오염되는 것. 오염이 바로 협력이고, ‘오염하기’의 영원한 지속이 세계가 생존하는 유일한 길이다.
작가의 말 - 신효진
우리는 요즘 아무에게도 영향을 끼치지 않으려 노력하며 산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하지만 아무에게도 영향을 끼치지 않고, 그러니까 누구도 어떤 것도 오염시키지 않고 산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 아닐까, 우리가 살아간다는 것은 결국 무언가를 누군가를 계속 오염시킨다는 것 아닐까, 그것이 세계이든 사람이든 물건이든 기계이든 우리는 오염으로 파장을 만들어 나가는 것이 아닐까, 그런 고민들로 이 이야기가 시작됐습니다.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내가 홀로 존재한 적이 없다는 것이 느껴졌을 때 단 한순간도 혼자인 적이 없었다는 생각을 할 때. 저는 그것이 버겁기도 하고 기쁘기도 하고 징그럽기도 하고 무섭기도 하고 즐겁기도 했습니다. 이 복잡하고 알수 없는 감정을 조금이라도 나누고 싶었습니다. 누구나묻고 있지만 누구도 묻지 않는 질문들을 함께 하고 싶었습니다.
어떻게 이런 세계가 가능할까요? 감사합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사람이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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