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희곡

이재빈 '주리'

clint 2024. 10. 2. 09:10

 

 

아파트의 거실. 
남자가 출근 준비를 하고 여자는 늦잠에서 일어나 나온다.
아침도 전부 준비해 놓은 남자. 여자는 소설가다.
밤늦게 창작을 하다가 늦게 잔 것이고, 최근 그녀의 신작들이 모두 호평에 
잘팔려 남편은 그저 기쁘고, 아내가 예쁘기만 하다.
 "오늘 조율사가 오는 날이지?" 묻는 남자에
 "유일한 낙이 피아노 치는 건데 피아노 없으면 글도 안 써진단 말야."
라고 답하는 여자. 남편은 퇴장하고 잠시 후 조율사가 등장한다.
그런데 피아노 조율이 아니라 몽둥이를 꺼내 주리를 튼다.
비명을 지르며 괴로워하는 여자.
조율사 왈 신체적인 고문이 정신 창작활동을 활성화 시킨단다.
외국에서는 예전부터 암암리에 행해지던 방법이란다.
여자도 이 조율(주리)을 통해 나온 신작들이 뜬 것이다.
조율사는 주리를 틀면서 창작이 막힌 곳을 묻고 고치게 계속 질문한다.
그녀가 지금 쓰고 있는 작품을 얘기하는데 남편은 눈이 먼 피아니스트이고
아내는 귀 먹은 화가이다. 일을 보러 나갔다가 들어온 남편이 

조율사가 아내를 주리 트는 모습을 보고 총으로 조율사를 죽인다....
이 장면에 남자가 등장하며 재연하고 사라지고, 총에 맞았다가 일어난 

조율사가 장님이며 총이며 모두 개연성이 떨어진다고 고치라고 한다.
아내는 지금 자신의 얘기를 쓰고 있는 듯하다. 그리고 또 수정본을 설명하면
남편이 등장해서 재연한다... 뒤에는 아내가 조율사의 주리를 틀기도 한다.
몇 번의 시도 끝에 무대는 암전되며 아내의 타이프 치는 소리가 들린다.
피아노 연주 소리와 섞이며 막이 내린다.


심사평 - 성기웅, 윤미현
희곡부문 응모작들의 소재는 다양했다. 소재는 다양했지만 인간에 대한 통찰력이 돋보이거나 개성있는 작품은 드물었다. 응모작 56편 중 「주리」는 자의적인 전개를 펼치는 작품이었다. 그런데 그게 묘한 매력으로 읽혔다. 왜 하필 작품의 제목이 '주리'일까? 죄인의 두 다리를 묶고 다리 사이에 두 개의 주릿대를 가하는 형벌이라는 주리를 튼다 는 그때의 주리란다. 이야기 속에 또다른 이야기가 들어있는 것도 흥미로웠다. 1장부터 4장까지의 구성력 또한 단단한 매우 개성있는 작품이었다. 심사위원 두명은 「주리」를 당선작으로 정했다. 이 작품이 지닌 개성에 손을 들어주기로 당선자에게 마음을 다해 축하를 전한다. 희곡을 쓴다는 일은 참 고단한 일이지만, 부디 앞으로 정진해주길 바란다. 응모해주신 다른 분들에게도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당선소감 - 이재빈
꽤 오랫동안 마음 한구석에 얼음덩어리 하나가 꽉 박혀있는 기분이 었는데, 얼음조각으로 빚는다고 이리저리 주물주물 만지작거리다보니 저도 모르는 사이에 슬그머니 사라졌습니다. 왜 안톤 체호프가 「갈매기」를 코미디라 칭했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었는데, 어느날 「갈매기」를 읽다보니 갑자기 뜨레쁠레프가 우스워 보였습니다. 스스로는 햄릿처럼 진지한데 거리를 두고 보니 어릿광대처럼 우스꽝스러웠습니다. 내가 고민이라고 부르던 놈도 별반 다르지는 않았겠구나 하는 깨달음이 스치자 태산같이 커보이던 고통이 티끌처럼 작아보였습니다. 단막극 「주리」는 그런 고민에 대한 고민들이 누적된 결과물인 것 같습니다. 학교에서 연극을 좀 더 하고 싶었는데 이제 연극을 더는 할 수 없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을 때 희곡집을 읽는데 재미를 붙였습니다. 저에게 희곡집을 읽는 것은 머리에 가상현실 기계를 쓰는 것 같은 체험이었습니다. 세상에 그 어떤 양식의 글보다 희곡집을 읽는 게 더 재밌었습니다. 공기업 A매치를 준비하는 사람들의 틈바구니에 져서 늙은 나무 밑둥처럼 우두커니 걸터앉아 찬찬히 희곡집을 읽고 또 읽다보니 문득 이런 꿈도 꾸었었습니다.
이 몸이 졸업하여 무엇이 될꼬 하니. 
먼지 앉은 책장위에 한권 희곡집 되어,
백설이 만건곤할 제 독야청청하리라.
귀하고 영광스러운 지면에 자리를 마련해주신 대산문화재단과 창비 출판사, 그리고 심사위원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첫 타석에 멋 모르고 힘껏 휘둘렀는데 빗맞은 공이 담장을 넘어간 격으로 과분한 큰 상을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앞으로 더 좋은 글을 쓰라는 채찍으로 알고 희곡을 쓰고 또 쓰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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