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희곡

박상현 '치정'

clint 2024. 10. 1. 14:48

 

 

 

때는 1954년 3월. 서울시경 수사부. 남덕술 수사부장이 정비석의 소설 
「자유부인」을 읽고 있다. 대학교수 장태연의 아내이며 가정주부인 오선영은, 
우연한 기회에 사회지도층 인사의 부인들이 사교춤을 배우고, 애인을 만드는 등 
자유로운 생활을 즐기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녀는 옆집 대학생 신춘호에게 
사교춤을 배우다 연정을 느끼게 되고, 결국은 가정파탄의 위기에 처하고 만다. 
당대 사회에 만연한 퇴폐풍조와 춤바람을 경고하는 정비석 작가의 「자유부인」을 
둘러싼 황산덕 교수의 거센 비난과 애독자들의 열렬한 반응은 패가 갈리고, 
이 와중에 남덕술 수사부장의 싸모님은 상하이류의 대가 브루스 왕의 제자. 
전설의 춤꾼 신춘수와 춤바람이 나고마는데...

 

 


어딘지 알 수 없는 좁고 어두운 공간. 누군가 쭈그려 앉아 뭔가를 썰고 자른다. 
그 옆에는 커다란 여행용 가방이 단지 입을 열어젖히고 있을 뿐이다. 
또 다른 공간, 온라인 동호회 '한국고고학회' 채팅창에서 전설의 춤꾼 신춘수의 
행보와 순수 무도에 대해 의견을 나누고 있다. 공공성을 중시하는 
가상의 공간에서 흑산과 카르멘은 서로 틈틈이 질척거리고 있고, 
전라도와 경상도 조폭 간의 한국 현대 무협사에 대해 열띤 논쟁을 벌인다. 
그러다 정치적 이념과 지역적 갈등으로 번져 싸움이 시작되면서 
그야말로 막간 치정극이 펼쳐지는데....

 

 



연극 <치정>은 치정의 도구이자 자유로움의 상징인 '춤'의 계보와 그리스 신화의 비극에서부터 한국의 정치사, 현대 조폭사까지 면면히 이어져온 '폭력'의 계보를 그리고 있다. <치정>의 제목은 '정치'의 전도된 음절로서 일종의 말장난으로, '잘못된 만남', '불륜', '사랑의 죄악'의 이면에 숨어있는 '정치', 즉 숨겨진 '권력'을 도발한다. 1954년 서울시경 수사부 남덕술 부장의 책상 위에 놓인 정비석 소설 <자유부인>으로 시작하는 <치정>은 2015년의 가상 온라인 동호회 '한국고고학회' 채팅창까지 이어지며 온갖 무도(舞춤, 武道폭력)를 무대 위로 불러냈다. 그리스비극, 현대 조폭의 한국 정치사. TV뉴스 속 폭력사건들이 '자유부인 신드롬'과 '춤'을 매개로 과거와 현재를 종횡무진하며 정치 같은 치정을 그려내고 있다. 이 작품에서 외설과 예술, 윤리와 자유의 문제는 정비석(1911~1991)의 시대부터 그리스비극으로 거슬러 올라가고 현재에 이르면 정치이념과 지역갈등 속으로 스며들기도 한다. 이를 통해 결국 <치정>은 불륜 이면에 숨어 있는 '권력'을 다루고 있다. 1950년대 세상을 들썩이게 한 정비석 작가의 자유부인에서부터 이어져온 춤의 계보의 역사와 그리스 비극에서부터 현대 조폭사까지 내려온 폭력에 얽힌 이야기는 따로 흐르고 있으나, 두 계보를 통해 치정과 폭력으로 일그러진 권력 관계를 보여 주며 현대 사회를 우화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치정>은 인물들의 에피소드들로 한국사회의 문제의식을 뚜렷하게 그려내는 박상현 작가와 실험적이고 파격적인 연출로 존재감을 확고히 한 연출가 윤한솔이 함께 한다. 작가는 정비석의 <자유부인>을 곳곳에 그대로 인용하면서도 '일베' '홍어' 등 현재 언어를 능청스럽게 사용하고, 박인수라는 이름의 인물을 등장시켜 가수 박인수의 '봄비'를 대사로 가져다 썼다. 이러한 시대착오 기법을 통해 유머러스하면서도 동시에 과거와 현재를 넘나드는 통시성을 확보했다. 여기에 13인의 개성파 배우들이 출연해 극중 40개 이상의 배역을 소화하며 무대 위를 장악한다.「치정」은 비플롯적 서사구조로 되어있다. 타블로로 시작해서 댄스 강습으로 끝나는 「치정」은 희화적 구성이 두드러진다. 1954년부터 근미래까지, 정비석의 소설부터 인터넷공간까지의 시간과 공간 속에서 펼쳐지는 치정의 장면들은 각각 전혀 다르지만, 이상하게 참 닮아있다. 사적이고, 내밀하고, 격정적인 동시에 무정하고, 지극히 이기적이면서, 잔혹하며, 모두 칼부림으로 끝을 맺는다. 다른 장면에는 여행용 가방이 버티고 있다. 가방을 둘러싼 인물이 달라지고 사연이 달라지면서 가방 안에 담겨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내용물도 아마 달라질 것이다. 또한 살인이라는 단일한 모티프로 수렴되는 난잡한 콜라주 같다. 한 장면이 불편해서 눈을 돌리면 그에 못지않은 잔인한 살인 이야기가 기다리고, 그 이야기가 이해되지 않아 다른 장면에 도움을 청하고자 하면 더 불가해한 칼부림이 버티고 있다. 가까이 볼수록 안 보이고, 자세히 볼수록 모르겠다. 이렇게 납득 불가능한 잔혹한 그림 조각들은 그러나 전체로는 하나의 형체를 이룬다. 등을 보이고 무언가를 열심히 자르고 썰고 하는 누군가 극의 마지막 장면에서 모두가 춤을 출 때 콜라주는 완성되고, 거기서 우리는 우리의 현실세계가 애써 감추고 있는 매우 불편하고 잔인한 광기를 발견하게 된다. 

 

 


정비석과 황산덕의 논쟁
대학교수의 아내가 춤을 배우면서 외도를 한다는 내용의 서울신문 연재소설 <자유부인>이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이에 황산덕 서울대학교 법학대학 교수가 1954년 3월 1일 대학신문에 '자유부인'의 작가 정비석을 비난하는 글을 게재하였고, 정 작가가 반박하는 글을 열흘 뒤인 3월 11일 서울신문에 게재함으로써 논쟁이 시작되었다. 황 교수는 급기야 정 작가를 '문화적, 문학파괴자, 중공군 50만 명에 해당하는 적'으로 묘사하며 맹렬하게 반격하였다. 그러자 논쟁이 점차 번져가 대학 교수단과 여성 단체까지 논쟁에 뛰어들었고, 연재 금지를 요구하는 한편 다른 쪽에서는 '작가는 용기를 갖고 계속 집필하라'는 격려가 쏟아졌다. 정비석과 그의 작품 <자유부인>은 1950년대 문학계에 큰 파문을 일으켰다.
한국판 카사노바 박인수 사건
1955년경 박인수라는 한 명의 남성이 불과 1년 만에 70여 명의 여성과 정사를 벌여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는데, 그중 대부분은 교육을 잘 받고 자란 여대생들이나 고관, 국회의원 등 상류층 가정 출신의 여성들이어서 더 큰 충격이었다고 한다. 대학 재학 중 해군에 입대하여 헌병 대위로 복무하던 중 애인에게 배반을 당하자 타락하기 시작한 그는 전역 후 현역장교를 사칭하며 인기 댄스홀을 무대로 여성들을 만나기 시작했다. 검찰은 박인수를 혼인빙자간음죄로 기소했지만 정작 박인수를 고소한 여성은 두 명뿐이었고, 박인수는 재판에서 "댄스홀에서 함께 춤을 춘 후에는 으레 여관으로 가는 것이 상식화되어 있었으므로 굳이 결혼을 빙자할 필요가 없었다"고 말했다. "내가 만난 여성 중 처녀는 미장원에 다니는 그 여자 한 명뿐이었다" 는 그의 말은 모두를 놀라게 했고, 권순영 판사는 "법은 정숙한 여인의 건전하고 순결한 정조만을 보호한다"는 명언을 남기며 박인수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인천 제자 살인사건 : 2013년 여교사가 뜨거운 물을 부어 동거하던 10대 제자에게 3도 화상을 입혀 사망하게 한 사건. 치정에 얽힌 관계가 부른 비극이었다.
안산쑨씨 사건 : 경기도 안산에서 한 중국 불법 체류자가 한때 연인사이였던 정모씨를 살해하고 유기한 사건
삼각관계 살인 사건 : 한 여자를 사이에 두고 삼각관계에 있던 두 명의 20대 남성이 강남구의 초등학교 운동장에서 이른 아침 칼부림을 벌인 사건. 등의 내용이 이 작품에서 재현된다. 

또한 조폭계의 거두인 김태촌, 조양은을 비롯한 영호남의 거두들의 일화와 전쟁, 그들의 아면에 있던 여자의 치정 관계가 나온다.

 


치정, 그리고 정치 - 박상현 작가의 글
보통은 정치 뒤에 치정이 있다. 그래야 드라마가 된다. <치정>에는 치정 뒤에 정치가 있다. 사회적 계급관계, 권력관계가 사랑을 만들고 사랑을 깬다. 영부인과 경호원 수준만이 아니라 장바닥의 사랑도 그러하다. 사랑이 원래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이번엔 그렇게 해 보았다. 어느 정도 보편성과 개연성이 엮일지는 보는 사람들이 판단할 몫이다. 그러나 권력도 욕정도 헛되고 헛된 것이다. 그런데 그 속이 빈 것일수록 인간은 눈을 감고 달려든다. 허상이 편견을 낳고, 편견이 허상을 세운다. 돌이킬 수 없이 사망에 이르러서야 어렴풋이 진면목을 본다. 연극도 그런 것일까. 우주라는 허깨비가 인간을 낳고, 인간이라는 허깨비가 무대라는 허깨비 세상을 짓는다. 아름답게도, 찰나에 사라지는 것들이다. 그러나 바름을 이룰 수는 있으나 욕망을 채울수는 없다. 어떻게 살 것인가. 허깨비들이 칼춤 추는 이 시대, 바르게살기는 고사하고 제정신을 지키기도 힘들다. 

 

 

박상현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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