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희곡

조정화 '화가들'

clint 2024. 9. 29. 08:51

 

 

 

창고같은 화실. 숙식을 겸하는 듯한 장소이다
가난한 화가 2명. 
이들은 어느 숙녀의 초상화 의뢰를 받고 그녀를 관찰했다.
그리고 각자가 보고 느낀 숙녀의 모습을 얘기한다.
55분.... 29초를 관찰한 화가2는 성모마리아를 생각했다.
화가1은 창녀로 봤단다. 관점이 틀린 것이다.
술을 마시는 화가1, 커피를 마시는 화가2.
화가2에게 담배를 사다달라 부탁하는 화가1.
사러가는 화가2. 그사이 화가1은 화가2가 애지중지하는 
수달 붓을 불로 태워버린다. 그리곤 돌아온 화가2에게
빚쟁이들이 너를 찾아와 행패를 부렸다고 거짓말을 한다.
괴로워하는 화가2. 술이 취한 화가1.
다시 조명이 들어오면 술병이 깨져있고 화실은 엉망이다.
화가1의 붓으로 그림을 그리는 화가2
옆에서 주절주절거리는 화가1
화가1의 얘기는 그 초상화를 의뢰한 숙녀는 창녀라고 한다.
그날 55분.... 29초. 관찰한 후에 화가2은 가고
화가1은 그녀를 만나 섹스를 했단다. 3시간 동안.
그리고 화가2가 말한다. "네 말이 맞았어. 그 년은 창녀야." 
어떤 놈과 신나게 뒹굴고 있는 걸 봤다고 한다.
또 이번에 여자 초상화 일거리가 들어왔다고 화가2가 말한다.  
화가1이 신나서 묻는다. 얼마나 보여준대?
화가2의 대답은 "55분.... 29초."

 


인류가 계속해서 진화를 한다면 머리와 성기만이 남는다고 한다.
여기에 등장하는 두 화가도 커다란 머리통과 성기를 주체할 길 없어
덜렁거리고 있다. 그들이 캔버스 앞에 있는 것은 
화가적 정열을 소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냥 짜부라져 있는 셈이다.
그들이 주고받는 말들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왜냐하면 그들의 머릿속은 온통 에로티시즘의 지독한 이미지로
도색 되었기 때문이다. 그저 욕망의 되새김질을 반복하며 
그 이미지를 키워나가는 것이다.
괴물처럼 자라난 이미지는 그들을 긴장으로 몰고다니며 그들을 조종한다.
어쩌면 텍스트의 일상어들이 좀 더 무의미하거나
구체성을 거세당하던가 횡설수설해야 할 텐데...
따라서 무대는 꿈 속처럼 몽환적이고 오로지 머릿속 욕망의 칼라만이 
꿈틀대도록 단순화되거나 흑백톤이 유지될 것이다. 
그들을 한정짓는 작업실 공간은 귀퉁이 커튼 사이로 
우주 낭떠러지가 펼쳐져 있다던가 이쪽 커튼을 젖히면 
빨갛게 찢겨나간 무수한 그림들이 숨겨져있을 가능성은 없는가?
그 틈새를 비집고 온몸에 애무의 흔적이 가득한 나신 하나가
담배연기처럼 홀연이 피어오르나니.....
그 담배연기는 관객들의 옷깃에 붓터치 만큼씩 염색된다. (김낙형 연출의 글)

 

 

제1회 2인극 페스티벌 : 2000년 8월. 극단 동숭무대의 공연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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