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희곡

김현영 '마지막 녹음'

clint 2024. 9. 13. 17:53

 

 

배경은 밤 11시 45분 지하철 플랫폼. 
의자 세 개가 전부인 단출한 무대, 
단 두 명의 배우만 출연한다. 20대로 보이는 남녀. 
여자는 울고 있을 뿐이다. 
남자는 모노드라마에 가깝게 느껴질 만큼 객석을 향해, 
또는 여자를 향해 혼자 말한다. 
내용은 하나. "울고 있는 저 여자…왜 저기서 저러고 있을까요?"
빌려 입은 듯 제 몸에 맞지 않는 헐렁한 양복을 입고
 입사원서를 내고 왔다는 남자의 현실, 
묻어둔 사연 하나 꺼내 같이 울고 싶게 만드는 여자의 눈물, 
그러나 여자는 말이 없이 울고
그 역시 얼마전 다른 여자의 말 건넴을 묵살한 적이 있었다. 
단지 이야기를 듣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되었을 그 여자가 
그 이후 선택한 길을, 울고있는 저 여자에게 자신의 말 건넴이 
묵살당했던 이 남자가 똑같이 따라가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귀결이다.
그 마지막 말을 건넨 여자는 투신을 했고...
그 요청을 거절했던 남자는 울고 있는 여자를 무시할 수가 없었다.
엔딩 장면에 남자와 여자가 탱고를 춘다. 
그리고 어둠속으로 사라진다.

 



2004년 대산대학문학상을 받은 작품으로 20년이 훌쩍 넘은 이야기지만 낡지 않았다. 

황량해진 현실은 울고 있는 여자를 떠나지 못하는 '저 남자'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것만 같은 씁쓸한 느낌마저 준다.

원제가 '마지막 녹음'인데 '울고 있는 저 여자'로 바뀐 건 아래 심사평에도 나왔듯이 이윤택의 훈수 때문인 듯하다.   

 

 


심사평- 심사위원: 이윤택(극작가) 김홍준 (영화감독) 김정숙(극작가)
올해 대산대학문학상 희곡부문 심사에서 최종 논의의 대상이 된 작품은 「죽도록죽도록」과 「마지막 녹음」 2편이었다. 「마지막 녹음」은 지하철에서 일어날 수 있는 아주 작은 이야기를 소박하게 전개시켜나간 작품이다. 그러나 그 소박하고 단순한 구성에 비해 극을 이끌어가는 '말의 힘'은 묘하게 가속도를 더하면서 단숨에 끝까지 읽어나가게 하는 매력이 있는 작품이다. 그 매력에 이끌려 다시 읽어보면, 인간에 대한 따듯한 시선과 세상을 조용히 껴안으려는 작가의 심성이 아름답게 배어나온다. 그래서 한번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작가의 글쓰기 능력이 결코 예사롭지 않음을 확인하게 된다. 「죽도록죽도록」이 별로 크지 않은 이야기를 크고 복잡하게 구성한 것에 비해, 「마지막 녹음」은 작은 이야기에 정면승부를 건 글쓰기 태도가 느껴지는 것이다. 그러나 이 작은 이야기가 과연 대학로의 연극으로 공연될 수 있을까 하는 점에서 함량미달이 아닐까 하는 심사위원의 회의적 시선 또한 있었다. 그러나 차라리 이 작고 따뜻한 극이 오히려 요란한 21세기에 대한 단단한 저항, 혹은 조용한 혁명의 불씨가 되기를 바라면서 당선작으로 내놓는다. 자신의 작품이 너무 소박하지 않을까 지레 짐작하여 '마지막 녹음'이란 그럴듯한 관념을 제목으로 정한 것이 흠이라면 흠이 었다. 차라리 솔직하고 편하게 '울고 있는 저 여자' 정도의 제목으로 바꾸든지, 자신이 처음 정한 제목이 있다면 그것으로 바꾸었으면 좋겠다는 충고를 곁들인다.

 



당선소감 - 金賢永(김현영)
1983년 서울 출생 동덕여대 문예창작과 3학년 onell1213@naver.com


처음 희곡을 쓰고자 했던 때는 고2 때였다. 그때 나는 소설(소설이라고 하기엔 아주 모자라지만)을 쓰고 있었는데, 나로서는 소설의 많고 많은 지문을 쓰는 것이 지루하고 버거웠다. 그래서 나는 대사로 이루어진 희곡을 써보자 결심하기에 이른다. 하지 만 나는 대학에 와서야 희곡에 몰두하게 되었다. '전통적으로 강세인' 시, 소설 작가지망생들의 틈바구니에서, 시나리오 작가지 망생들의 '홍수' 속에서 선생님께서는 '방향지'를 알라고 하셨다. 지난 1학기는 희곡을 향한 내 방향지가 처음으로 흔들린 때였다. 작품에서는 '졸작 퍼레이드'가 계속됐고, 무엇보다 외적으로 습작에 몰두할 수 없는 상황들이 이어졌다. 이 賞은 말하자면 힘들었던 지난 3년간의 시간에 대한 '완벽한 보상'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수상은 기쁜 일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대산대학문학상 수상은 기쁨과 동시에 부담을 안겨주었다. '이제부터가 진경 껌난한 가시밭갈임을 알기 때문이고, 이 수상소감의 마침표를 찍는 순간부터 이 수상은 '과거의 영광'이 될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짧고 굵은' 멋진 수상소감을 쓰고자 했지만, 첫 수상이라 그러질 못한다. 하지만 앞으로 수상소감을 쓸 날이 많을 것이라고 생각하기에, 아쉬워하지 않고 다음을 기약하기로 한다. '무지한 어 린 양' 같은 나를 열과 성을 다해 가르쳐주신 김사인 선생님, 하 일지 선생님께 감사드리고, 늘 '마음속의 지표'이신 이만희 선생 님께 감사드린다. 작품을 뽑아주신 심사위원 선생님들께도 정말 감사드린다. 아빠 엄마, 건강하셔서 오래도록 나의 기쁜 날들에 함께하시길. 늘 내 손에 공연표 값을 쥐여줬던 큰형부, '작가의 길'을 믿어 주는 큰언니, 당선소식을 듣고 눈물을 보였던 작은언니에게 고 마움을 전한다. 내가 힘들 때 날 위해 기도해준 민정이, 당선을 진심으로 축하해준 민형이, 성아, 민서언니, 자랑언니, 진희언니, 내 작품을 가장 좋아해준 애틋한 친구 혜정이, 고맙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Soul mate 여진, 사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