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희곡

박정의 재창작 '선녀와 나무꾼'

clint 2024. 9. 12. 12:44

 

 

 

옛날 옛날 순수함과 혼란이 공존하던 시절, 하늘의 사람들과 땅의 사람들이 

아직 왕래를 할 수 있었던 시절, 그때에도 여전히 인간들은 자연에 대한 도전과 

서로간의 싸움으로 피 흘리고 있었다. 

깊은 산 속에서 늙은 어머니와 장성한 아들이 가난하지만 행복하게 살고 있었다. 

노모는 속세의 혼란을 피해 깊은 산골에서 아들과 함께 동물들을 이웃하며 살았다. 

그러던 어느 날 밤 산속에 총성이 울리고 사냥꾼들이 나타나 동물들을 마구 죽였다. 

달아나던 사슴 한 마리가 노인의 치마 속으로 숨어들었다. 

어둠속에서 사냥꾼은 노인을 향해 총을 들었고 이것을 본 놀란 아들이 달려들어 

몸싸움하던 중 사냥꾼이 죽게 된다. 그 사건 후 모자는 더 깊은 산속으로 들어간다. 

도중에 목욕하는 선녀를 만나 늙은 어머니가 선녀의 날개옷을 훔친다. 

 

 

 

갈 곳이 없는 선녀는 그들과 함께 가게 되고 어머니의 꾀로 마침내 선녀는 

아들의 아기를 갖게 된다. 임신하자 선녀는 더 이상 하늘나라를 그리워하며 눈물

흘리지 않았다. 그러나 선녀가 온 후로 줄곧 비가 오지 않아 땅은 몹시 척박해졌다.

산에도 더 이상 먹을 것이 없었다. 굶주림에 젖이 나오지 않는 산모와 아기를 위해

시어머니는 아들에게 예전에 죽은 사냥꾼의 총과 선녀의 날개옷을 주며

사람들이 사는 곳으로 보낸다. 하지만 마을에 내려간 아들은 강제로 군인이 되어

다시 돌아올 수 없게 된다. 오지 않는 남편을 기다리던 선녀는 마침내 더 이상 산속에

살 수 없어 늙은 시어머니와 아기를 데리고 마을로 내려온다.

그러나 내려오자마자 선녀는 군인들에게 강간을 당하고 강간하는 군인을 죽인

늙은 어머니도 다른 군인들에 의해 죽게 된다.

그때부터 선녀는 어린 아들을 위해 매춘으로 생활을 꾸려간다. 

그러던 선녀 앞에 마침내 남편이 나타난다. 하지만 남편은 죄책감으로

선녀의 눈을 보지 못하고 날개옷을 주며 떠난다.

그러나 선녀는 날개옷을 입고 하늘로 돌아가지 않았다.

산속의 예전 집으로 돌아와 남편을 기다리며 늙는다.

오랜 시간이 흐른 뒤 남편은 더 이상 군인으로서 싸울 수 없게 되어 자유의 몸이 되었다.

그리고 고향으로 돌아왔을 때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여전히

아름다운 선녀가 그를 맞이한다.

 

 



설화 "선녀와 나무꾼"은 무슨 이야기일까? 어떤 교훈을 우리에게 주는 것일까?
대충 보면 위기에 빠진 사슴을 구해줘 보답을 받는 나무꾼의 이야기 같다. 하지만 선녀를 얻기 위해 옷을 훔치는 장면이나, 선녀가 다시 하늘로 올라가서 내려오지 않는 부분, 또 하늘에서 행복하게 살다가 홀로된 노모를 만나기 위해 내려온 아들에게 뜨거운 팥죽을 줘서 말에서 떨어지게 하는 부분이 아무래도 결혼 생활에 당연히 있어야 할 고부간의 갈등이 생략되어 있을 것만 같았다. 그리고 그것은 오랜 역사 속에서 늘 존재해 온 가족이라는 아름다움으로 포장된 폭력일 것이다. 하늘나라에서 선녀로서 행복하게 살던 처녀가 어느 날 옷을 볼모로 붙잡혀 가난한 나무꾼의 집에서 온갖 고생을 하면 살아야했을 고통이 느껴졌다. 그러나 여자는 정말 강하다. 울고만 있지 않고 시어머니를 이겨냈을 것이다. 그래야 다음 대를 이어갈 집안의 가장으로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 아닌가? 그리하여 남편을 시어머니의 치마폭에서 빼내고 새 가정을 이루기 시작했다. 그리고 자식을 낳아 척박한 삶에 희망을 안겨주었다. 그러나 그러한 아웅다웅도 잠시, 세상의 전쟁이라는 큰 재앙 속에서 가족은 처참히 파괴된다. 그리고 그때서야 비로소 그들은 서로 의지하고 힘을 모을 수 있었다. 그리하여 질긴 민초의 목숨을 이어나갔을 것이다. 
원작 설화 "선녀와 나무꾼"에서 아무래도 이러한 이야기가 숨어있을 거란 생각에서 작품을 만들었다. 원작은 깊은 산골, 노모와 장성한 아들이 포수로부터 사슴을 구해준 대가로, 선녀의 옷을 얻어, 선녀와 가족을 이루나, 아이를 셋 낳기 전, 선녀에게 날개옷을 보여줘 선녀가 하늘로 돌아가 버린다는 이야기다. 극단 초인의 박정의 연출은 이 이야기 속에서 인간 역사의 순환 고리와 태초의 폭력을 끄집어내 작품의 주제로 확대시켰다. 원작 설화에서 작가가 차용해온 부분은 노모와 아들, 선녀라는 세 명의 <등장인물>과 최초의 폭력을 상징하는 <선녀의 옷을 훔치는 행위이다. 작품의 공간적 배경이 되는 <깊고 깊은 산골>은 인간의 역사가 시작되기 전 어느 시대를 상징할 수도 있고, 인간이 스스로를 파멸시키고 난 후의 어느 시대를 상징할 수도 있다. 시대적 배경이 태초이거나 자멸 후이거나 간에, 이 공간에 생존해 있는 인간은, 문명의 언어를 습득하기 이전의 자연스런 상태로 존재한다. 그리하여 <말이 없음>은 당연히 이 작품의 표현법을 몸짓과 호흡 언어의 형태로 이끌어간다. 어느 날 이곳에 총을 들고 등장한 포수는 작품 속에서 큰 의미를 획득한다. 총은 문명을, 포수는 파괴자(폭력의 생산자)를 상징한다. 산골이 갖고 있던 <태초>의 평화의 이미지는 포수의 등장으로 파괴당한다. 연출은 극중 아들로 하여금 본의 아니게 포수를 살해하고 총을 취하도록 한다. 이 사건은 노모와 아들이 더 깊은 산골로 도주하는 계기를 만들어, 천상의 선녀를 만날 수 있는 동기를 부여해준다. 동시에 이 산 속 밖에 존재하는 문명의 세계, 즉, 폭력의 역사가 여전히 존재하고 있는 세계를 이 작품 속으로 끌어들여 더 큰 재앙의 복선을 제시하기도 한다. 하지만 정당방위 살해라는 죄의 씨앗은 이후 커다란 원죄를 잉태한다. 

 

 


<노모가 선녀의 옷을 훔치는 행위>는 얼핏 청춘 남녀의 만남과 사랑을 이루어낸다는 허울로 아름답게 묘사될 수도 있는 부분이지만, 작가는 이 행위를 폭력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선녀에게서 보여지는 공포와 분노의 모습은 작가의 의도를 잘 반영한다. 전통적인 가정의 틀 속에서 시어머니가 그녀에게 강요하는 것들은 개인으로서 존재하던 선녀에겐 낯선 폭력이다. 선녀 또한 지지 않고 그녀의 시어머니에게서 아들을 빼앗고 자신만의 가족을 만들려 한다. 이 모든 것은 태고 때부터 가정 내에서 일어났던 인간의 삶속에 스며있는 폭력의 모습이다. 공식적으로 죄 이후에는 응징이 나타난다. 작가는 인간의 역사를 통해 반복되어온 응징 중 가장 가혹하며 대표성을 띠는 것으로 더 큰 폭력, 즉 전쟁을 선택했다. 고요한 산골에도 마침내 군대가 들어오고 폭격이 시작되어 산은 생명체가 살아갈 수 없는 척박한 땅으로 변해간다. 더욱이 이들 공동체는 자신들 보다 더 큰 폭력의 제조자, 군대에 남편을 빼앗긴다. 그리하여 척박한 땅에서 먹을 것을 구할 수 없게 되자 스스로 문명 속으로 첫발을 내딛게 된다. 그러나 문명의 세상은 소음과 전쟁의 아수라장이다. 언어가 통하지 않는 무력의 공간에서 선녀는 힘없는 존재이다. 연출은 군인이 된 나무꾼과 전쟁터의 또 다른 기생충으로 전락하는 선녀의 움직임을 더 이상 자유롭지 않은 판이한 양식과 템포로 변화시킴으로써 낯선 현실에 대한 부적응을 강렬하게 표현해내는데 성공한다. 하지만 그 지옥의 땅에서도 선녀는 강인한 모성의 힘으로 현실을 살아낸다. 모진 폭력을 온 몸으로 감내하고, 폭력의 땅에 터를 잡는다. 어느새 공동체를 이끄는 주체가 노모에서 선녀로 전이되어있다. 선녀가 거침없이 홍등을 걸고 군인에게 몸을 팔아 제 자식을 거두는 행위는 역사 속 민초들의 끈질긴 삶을 연상시킨다.

 

 



연극은 설화를 차용했지만, 단순한 스토리 구조에서 벗어나 인간관계 속에 잠재된 갈등과 내재된 폭력의 구조를 드러내 비폭력, 반전의 메시지를 전한다. 이 작품에서는 크고 작은 폭력의 형태가 등장한다. 나무꾼의 노모가 자식을 위해 선녀의 날개옷을 훔치는 행위,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선녀에게 아내이자 며느리로 살아갈 것을 강요하는 개인 간의 폭력, 전쟁이라는 상황이 개인에게 행하는 폭력 등이다. 작품은 이러한 폭력을 설화의 현대적인 재해석을 통해 고발한다. 연극은 이와 같은 재해석과 고발로 국내 관객과 평단은 물론이고 해외관객과 평단에도 충격을 안겼다. 가족, 그리고 전쟁이라는 이름의 폭력에 주목하며 ‘선녀와 나무꾼’을 새롭게 읽어가는 이 작품은 제목을 바꿔 ‘우리 엄마는 선녀였다’로 2021년 다시 공연했다.

 

'한국희곡' 카테고리의 다른 글

윤미현 '크림빵을 먹고 싶었던 영희'  (3) 2024.09.14
김현영 '마지막 녹음'  (1) 2024.09.13
변사극 ‘순애 내사랑’  (2) 2024.09.12
김상열 악극 '눈물 젖은 두만강'  (3) 2024.09.11
이용우 '불장난'  (1) 2024.09.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