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희곡

롤란트 시멜페니히 '황금용'

clint 2024. 9. 13. 04:57

 

 

 

유럽의 어느 한 도시의 동남아 간이식당인 '황금용'을 무대로 

구석 비좁은 주방에는 다섯명의 동양요리사들이 일한다. 

새로 온 중국인 꼬마가 치통을 호소한다. 하지만 모두 불법체류자인 

이들은 병원에 갈 수 없다. 결국 꼬마는 주방에서 이를 뽑는다.
'황금용' 식당 이웃의 독일 사람들 역시 행복하지 않다. 

젊어지고 싶은 할아버지, 원치 않은 임신으로 사이가 벌어진 젊은 연인들, 

새 애인을 따라간 부인을 원망하며 술에 취한 남자. 

장거리 비행에 지친 두 명의 스튜어디스 등의 에피소드가 대비된다.

이들은 부유한 나라인 독일의 동시대인들이지만 모두가 불만족스런 삶을

살아간다는 점에서 황금용 식당의 외국인 노동자들의 처지와 크게 다를 바가 없다.

모두가 좌절하고 자신의 처지에 만족하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모두 황금용식당의 손님들이기도 하다.
현실에 만족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에피소드이자 유머러스하고 시적인, 

냉혹한 현대사회의 파노라마인 작품이 이 <황금용>이다.

 

 

 

롤란트 시멜페니히(1967~) 의 작품<황금용>은 작가의 연출로 2009년 9월 5길 빈의 부르크테아터에서 초연되었다. 독일 초연은 2010년 3월 19일 알렉산더 실링 연출로 잉 곱슈타트 극장에서 이뤄졌다. 이 작품은 같은 해 뭘하임 연극제에 초청되어 일등상을 받았으며 월간 연극 잡지인《테아터 호이테》에서 '2010년의 극작품’으로 선정되었다.
오늘날 베를린 등 유럽 대도시에서는 아시아 음식을 파는 간이식당을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다. 이 극작품의 사건 진행은 유럽의 어느 도시에서나 볼 수 있는 이런 타이- 차이나- 베트남 간이식당인 "황금용"에서 전개된다. 음식점 한 귀퉁이에 있는 비좁은 주방에서 아시아인 다섯 명이 요리사로 일한다. 그런데 새로 온 중국인 꼬마가 치통을 참을 수 없어 고함친다. 동료가 파이프렌치로 충치를 뽑아준다. 소독약이나 마취제 대신 소주를 입에 들이붓지만 출혈이 심하다. 썩어서 구멍이 난 그의 앞니는 공중을 날다가 조리하는 냄비에 빠진다. 이렇게 해서 이빨은 손님인 스튜어디스가 주문한 타이 수프에 들어간다. 청년은 결국 과다 출혈로 죽는다. 밤이 되자 동료들은 시체를 황금용이 그려진 벽걸이 카펫에 둘둘 말아 메고 강으로 가 다리 위에서 강물에 던진다. 뒤를 이어서 스튜어디스가 수프에서 나온 이빨을 가지고가 역시 강물에 던진다. 돈도 벌고 집 나간 누이동생도 찾으려던 중국인 청년은 불법체류자이기 때문에 이가 아파도 치과에 갈 수 없다. 그는 옛날 방식으로 이를 뽑다가 이국땅에서 죽고 만 것이다. 시신은 강물을 타고 멀고 먼 바다를 건너 지구를 돌고 돌아서 고국인 중국 해안에 도달할 것이다. 거기서부터 또다시 황하를 3천 킬로미터 거슬러 올라가 그의 고향에 돌아갈 수 있을 것인가? 아마 그때쯤엔 살점이 다 떨어져 나가고 몇 개의 해초가 매달린 앙상한 해골만 남아 있을지도 모른다. 그가 찾던 누이동생은<개미와 베짱이>우화에 나오는 베짱이로 암시되는데 잠깐의 노리갯감으로 희생되는 것처럼 그려진다.

 

 

 

'황금 용' 식당에서 벌어지는 사건에 같은 건물 위층, 또는 이웃에 사는 독일 사람들의 이야기도 삽입되어 대조를 이룬다. 다시 젊어지고 싶어 하는 할아버지. 원하지 않는 임신으로 사이가 벌어지는 지붕 아래 방에 사는 젊은 연인, 새로운 애인을 따라 떠난 부인을 원망하며 술타령하는 버림받은 남자, 식료품가게 주인 한스, 장거리비행에 지쳐버린 두 명의 스튜어디스 에피소드가 대비된다. 이들은 부유한 나라인 독일에서 동시대에 살고 있지만 모두 나름대로 불만족스런 삶을 살아간다는 점에서 황금용 식당에서 일하는 외국인 노동자들과 처지가 크게 다르지 않다. 모두 자신의 처지에 만족하지 못하고 좌절한 사람들이다. 이들은 황금 용식당의 손님들이 기도하다.
베르톨트 브레히트(1898~1956)는 생소화 효과를 위해 작품의 배경을 독일이 아닌 중국 '사천의 선인', '코카서스의 백묵원', 시카고 '도살장의 성 요하나', '아르투로 우이의 출세' 등 외국 도시로 설정했다. '서푼짜리 오페라'에서도 베를린이 아니라 런던이 배경이 된다. 이것은 브레히트가 극작품을 쓰기 시작한 1920년대부터 20세기 전반기에는 유효한 수단이었다. 그러나 지구화 시대인 오늘날에는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베를 린, 런던, 파리 등 유럽의 대도시들은 이미 각지에서 온 이주민들로 법석을 이룬다. 독일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라인 강의 기적'이라 불리는 경제 부흥을 이루었다. 노동력이 부족해지자 1960~1970년대에 외국인 노동자들이 밀려들기 시작했으며 터키나 이탈리아 노동자들이 베를린 등 독일 대도시의 거리 풍속도를 바꿔 놓았다. 독일이 통일되기 전까지 터키 사람들이 많았던 베를린 크로이츠베르크는 한때 '작은 앙카라'라고 불릴 정도였다. 독일 통일과 동구권 붕괴 이후 오늘날, 독일 대도시에서 아시아인이나 아프리카인들은 이미 낯설지 않다. 이제 세계는 바야흐로 하나가 되었으며 모두가 서로 얽히고설켜 상호의존 관계를 맺고 있다.

 

 

 

브레히트는 생소화라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해설자 도입, 관객을 향한 대사, 보고하기 등 새로운 기법을 작품에 적용했다. 이러한 생소화 기법은 그후 알게 모르게 현대연극에 녹아들어 일반화되었다. 브레히트가 20세기 전반기에 새롭게 도입했던 생소화 기법은 이제 고전이 되었다. 시멜페니히는 이런 고전적인 브레히트의 생소화 기법을 극작품에 통합해서 새로운 희곡기법으로 발전시켰다. 가령 배우들은 일인 다역을 함으로써, 그리고 원칙적으로 성과 나이를 바꿔 역할을 함으로써 자기 역할에 감정이입을 할 수가 없다. 그는 단지 자신의 역할을 제시할 뿐이다. "제시한 다는 것을 제시하라!”고 브레히트는 요구했다. 배우들이 연기하는 동안 "제시의 자세”를 잊어서는 안 되며 "연기하는 등장인물 뒤에서 여러분 자신이 보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자기 역할과동일시하지 않고 다만 역할의 여러 가지 자세를 제시하는 배우는 관객을 최면에 빠지게 할 수 없고 당연히 관객은 등장인물과 배우 그리고 극적인 사건 진행에 대 해 비판적인 거리를 가지게 된다. 이런 브레히트의 요구를 시멜페니히는 그의 혁신적인 서사극 기법을 통해 황금용에서 자연스럽게 충족시키고 있다.
지구화 또는 세계화가 정확히 언제부터 시작되었는가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지만 대체로 구소련과 동구권이 붕괴되고 독일이 통일되면서 가시화되지 않았나 생각된다. 지금은 일반인도 세계화된 일상을 체험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돈만 있으면 세계 어느 곳이든 쉽게 여행할 수 있고 또한 세계 각지에서 몰려드는 관광객들을 접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세계인이 법적으로, 문화적으로, 또는 인간적으로 더 가까워진 것은 아니다. 돈을 많이 벌겠다는 꿈을 안고 독일에 온 중국인 꼬마는 불법체류자이기 때문에 이가 아파도 치과에 갈 수 없다. 베짱이는 그의 누이로 암시되는데, 독일인들은 베짱이를 대할 때 중국 문화에 대한 고정관념을 벗어나지 못한다. 세계화가 타문화를 좀 더 깊이 이해하는 데는 도움이 되지 못했음을 입증하는 것이다.

 

 

 

 

세계화를 가속화하는 것은 전 세계를 거미줄처럼 연결하는 국제항공 노선이다. 황금 용 식당에 손님으로 온 두 명의 스튜어디스들은 이제 막 칠레에서 오는 길이다. 18시간이나 걸린 장거리 비행이다. 이들은 겉으로 보기엔 화려한 직업을 가진 것 같지만 좁은 공간에서 손님들에게 식사를 나눠 준다는 점에서 황금용 식당 종업원들과 크게 다를 바 없다. 기착하는 아름다운 도시에 관해서도 그들은 말로만 들을뿐 실제로 가볼 수는 없다. 비행기가 아프리카 대륙을 거슬러 올라갈 때 첫 번째 스튜어디스 잉가는 바다 위에 떠 있는 보트를 발견한다. 두 번째 스튜어디스에게는 잘 보이지 않지만 아프리카의 난민을 가득 싣고 유럽으로 향하는 보트인 것 같다. 오늘날에도 아프리카 난민들은 이렇게 보트피플이 되어서 부유한 유럽 대륙을 향해 죽음을 무릅쓴 항해를 계속하고 있다.
<황금용>이 보여주는 세계화의 모습은 답답하고 슬프고 암울하다. 유러피언 드림을 꿈꾸며 독일에서 많은 돈을 벌어 보려던 이주민의 꿈은 결국 죽음으로 끝난다. 독일인들도 불행하기는 마찬가지다. 희망의 실마리가 전혀 보이지 않는 가운데 감수성이 강하고 이해심 많은 두 번째 스튜어디스 잉가가 사막의 오아시스 같은 위안이 된다.

 

 

 

작가소개
롤란트 시멜페니히(Roland Schimmelpfennig, 1967~,괴팅겐 출생)는 현재 독일에서 가장 많이 공연되는 극작가다. 최신작<황금용>(2009)은 2010년 5월 뭘하임 연극제에 초청받았으며 여기서 그는 뭘하임 희곡작가 상을 수상했다. 그의 극작품들은 40여개 외국어로 번역• 공연되어 호평받고 있다. 시멜페니히는 고등학교 졸업 후 이스탄불에서 자유 저널리스트 및 작가로 일하다가 1990년부터 뮌헨에 있는 오토 팔켄베르크 연극학교에서 연출을 전공했다. 졸업 후 뮌헨의 캄머슈필레 극장을 필두로 베를린의 샤우뷔네, 빈의 부르크 테아터 그리고 베를린 폴크스뷔네 등 저명한 극장에서 조연출로 일했다. 1996년에 첫 번째 극작품<영원한 마리아>가 오버하우젠 극장에서 공연된 이후 지금까지 29편의 극작품과 9편의 방송극을 발표했으며 1999년부터는 연출가로도 활동하고 있다. 2000년부터 2009년까지 모두 여섯 번에 걸쳐 신작 희곡의 경연장으로 정평이 나있는 뭘하임 연극제에 초청받았다.
엘제 라스커 쉴러 상 (1997, 2010), 바덴 뷔르템베르크의 실러(Schiller) 기념상(1998), 네스트 로이 연극상(2002, 2009), 뭘하임 희곡작가상(2010)을 수상 했으며 2004년에는 방송극 <더 낳은 세상을 위해서>가 '올해의 방송극'으로 선정되었다.